연극

[정의의 사람들] 연기와 진심을 담아야

구보씨 2021. 8. 7. 03:46

 희곡의 갈래를 보면 레제드라마고, 공연을 전제로 하지 않는 희곡, 읽기 위한 희곡이 있다. 희곡이 문학의 한 갈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구분이라고 본다면 소설가로 알려진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이 큰 의미는 없지만 이 범주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궁립극단의 '정의의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다시 든 생각이다.

 

실제로 독재자 총독을 폭탄 테러한 러시아 젊은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의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희곡은 강렬한 테러 현장이 주 무대가 아닐까 하는 짐작과 달리 지하실처럼 좁은 밀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밀실에 모인 테러범들 사이 오가는 이야기로 관객은 모든 상황을 짐작해야 한다. 즉 우리는 사건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일방적 주장에 우선 동조를 해야 하는 상황을 전제로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지켜봐야만 한다.

 

다시 말해 희곡이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당시 당원들의 생각이나 의사가 각각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쟁(연극의 대부분) 즉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상을 구해야 한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허용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그들의 말다툼을 보면서 한편으로 동조를 하거나 혹은 의구심을 품거나 반대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무대로 옮겼을 때 밀실에서 논쟁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누구랄 것도 없이 열정적인 수다쟁이들의 진지하지만 지루한 말싸움을 관객이 졸지 않고 받아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대충 극중 대사를 통해 독재자의 폭압이라는 전제를 뒤고 있다고 해도, 그 전제에 대한 고민 혹은 경험 혹은 숙고가 없으면 정형화된 철학 논쟁으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테러를 이틀 혹은 한두 시간 앞둔 전제에서 배우들의 말은 점점 빠르다. 동선은 적고 대사는 많은데, 내용도 쉽지 않고 만만치 않다. 앞서 레제드라마에 가깝다고 한 이유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지만, 물병도 술병도 심지어 창문도 없이 오로지 의자 몇 개와 책상 하나 뿐인 공간은 낭독극에 딱 어울릴 만하다.

 

애초 그 많은 대사를 위해 잠깐의 여지를 둘만한 소품을 죄 치운 듯하다. 3년 만에 감옥에서 돌아온 스테판을 두고 술 한 잔을 내밀지 않는 혁명당원이라니! 혁명당원보다는 작가가 그렇듯 토론회에 나온 엘리트 지식인들처럼 보인다. 하여 다른 극장에서 봤던 경험을 떠올린다면 연기력이 받침이 되지 않으면 매우 지루한 시간 지옥이 되고 만다.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다 신생극단인 궁립극단 작품을 본적이 없었으나 프로듀서로 김수로가 나섰다는 데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본 참이다.

 

극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 축을 담당한 스테판을 제외하고 모든 배역을 2명이 나눠 맡은 바, 하루걸러 연기를 하거나 할 텐데, 5막 중에 1막은 시작부터 다소 경직돼 보이고, 호흡이 급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나, 갈수록 빠른 전개 와중에 배우들 사이 안정적인 흐름이 생기면서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배경이 밀실이고 소품이 거의 없는 데다 이렇다 할 음향 효과를 쓸 수 없는 무대는 조명이 배우들의 감정이나 주요 지점에서 꽤 많은 역할을 하는 편이다. 연출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과하게 친절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배우들을 연기력을 올리기에 쓴 약이다. 몸에 좋지만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또 사회, 정치, 역사, 철학 등 사전 배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몸에 체화되기 힘들기도 할 것이다. 연기에 완숙미를 기대할 수 없지만 일정 부분 배우들은 극을 끌어가면서 지탱하는 성과를 거둔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극단이 목표를 어디까지 잡을 것인가, 에 따라 결과물의 진폭이 매우 다를 수 있다. 관객도 마찬가지이다. 정의를 지금처럼 각각 다른 의미로 정의내리고 쓰고 있는 시절이 있을까, 이 작품이 던지는 화두, 부조리 앞에 젊은 혁명당원들의 절규와 결단과 의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