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처의 감각] 내로남불, 내가 하면 희생 남이 하면 살인

구보씨 2018. 4. 20. 18:11

제목 : 처의 감각

일시 : 2018/04/05 ~ 2018/04/15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출연 : 윤가연, 백석광, 이수미, 최희진, 황순미, 임영준, 최순진, 권겸민, 김정화

대본 : 고연옥

연출 : 김 정

제작 : 남산예술센터

주최 : 서울특별시

주관 : 서울문화재단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고, 솔직히 해도 된다. 연극 리뷰, 비평, 해석이라는 게 사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때론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며, 과장할 수도 있고, 지나고 보면 아무도 기억 못할 무엇일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쓰는 글 역시 사족이고, 틀렸거나 귀찮아서 뒤로 미뤄둔 채, 미처 근거를 확인하지 못한 채이다. (그리고 곧 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내린 정의가, 호의에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자칫 그대로 규정화될 여지를 경계해야 한다. 연극에 관한 토론은 관심이 없는 이들, 그리고 연극애호가 중에서도 작품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국민 극소수나 관심을 가질까 말까한 얘기란 거다. 그러나 '이렇게 하겠다'고 한 주장이나 '이럴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어느 순간 은근슬쩍 '이렇다'라는 정의로 바뀌는 경우를 나는 다들 거들떠보지 않는 공연판에서 종종 봐왔다. 하물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검증하는 정치판에서도 비일비재한 바에야. 연극 처의 감각을 보고 왔다.

 



고연옥이 쓰고 김 정이 연출한 '처의 감각'2016년 남산예술센터가 고선웅에게 의뢰 각색과 연출을 통해 '곰의 아내'로 제목을 바꿔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2년이 지난 지금, 새삼 이 작품이 다시 남산무대에 오른 이유는 뭘까? 비평가 배선애는 프로그램 내 원형의 복원, 원칙의 환기라는 글에서 이른바 희곡의 복원을 꼽는다. 부속품으로 희곡이 아닌 원작자의 의도를 온전히 살린 희곡, 혹은 희곡작가의 위상에 대한 고민 혹은 재발견이다. 이 논지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새삼스럽지도 않고 그다지 실효성도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작법으로 시나리오, TV드라마와 크게 구별이 없는, 외국의 경우 희곡과 대본 작업을 겸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방법론에서 자본의 유입에 따른 제작의 규모에 따라 선택적으로 갈리는 상황에서 대중성에 작품성을 갖춘 미국 드라마 시장의 경우 억대 원고료를 받지만 제작사에 의해 철저히 조율되는 경우이다.

 

무대 작업을 원칙으로 한 대본의 경우에도 대사 외에 소품, 영상, 무대 등 다양한 표현방식이 가능해 제작 과정에서 충분히 풍성해질 여지가 높아진 현재, 비단 '공동창작' 외에도 작품 기획부터 협업을 통해 작품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 이상 희곡작가와 연출가 사이 경계의 구분이 원론적인 구분 외에 의미가 있을까 싶다. '처의 감각'에 앞서 4회 수상한 <조치원 해문이>를 쓴 이철희는 배우로 오래 활동하다 작가로 데뷔한 경우이고, 심지어 햄릿을 개작한 작품이다. 경계의 구분이 흐릿하다는 의미가 희곡작가에게만 부당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희곡작가로 익히 알려진 동이향이나 최치언은 스스로 연출을 한다. (고연옥도 이럴 거면 차라리 연출을 했으면 좋겠다)




 ‘곰의 아내공연 당시 원작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처의 감각희곡집을 출판했다는 이음출판사 희곡집 시리즈를 보면 남산예술센터가 창작극장을 표방하는 만큼 남산에서 올린 공연을 기준을 삼는데, 박근형, 장우재, 김수정은 작가인 동시에 연출, 배우 등으로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남산예술센터가 희곡작가 발굴 프로그램을 매 년 운영하는 이상, 희곡만 쓰는 작가를 외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양질의 대본과 연출과 기획의 키를 쥔 작업자가 연출이라는 걸 반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낭독용이 아닌 이상 연출, 배우, 작가의 역할, 자질 구분은, 배선애의 주장은 다소 뜬금없다고 봐야 한다. 더욱이 고선옥은 대한민국 희곡작가 중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한 경우라 더욱 그러하다.

 

강일중 기자의 말처럼 당시 작가와 연출 사이 조율을 하지 못한 남산예술센터의 탓을 하면 차라리 중간은 가는데, 배선애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녀도 각색이라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완성도를 떠나 그저 작업의 일부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연옥은 이를 모를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알기로 한국 연극계에서 각색자로 인지도가 높은 희곡작가가 바로 고연옥이다. 희곡작가 중에 각색 참여 정도로 마케팅이 가능한, 혹은 가능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는 인물이 그녀다.

 



그녀의 각색은 원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가, 이를테면 '처의 감각'과 비슷한 시기에 각색자로 이름을 올린 '엘렉트라'(4.26~5.5)를 보면 한태숙 연출은 그리스에서 현재로 시대, 무대, 상황, 인물을 과감하게 바꾼 작품을 두고 "고연옥 작가의 과격함과 저의 용단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언급한다. ‘엘렉트라를 본 입장에서 고연옥의 각색을 두고 할 말은 많지만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이 유명한 고전을 홍보하면서 작가 소포클레스 대신 고연옥과 한태숙만 광고 포스터에 얹혔기에 왜 그럴까 싶었는데 기획사 의도가 무엇이든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려나 고연옥 좋은 평가를 받으니 각색을 맡는 것이라고 본다. 졸작이든 수작이든 고연옥은 각색 작마다 손때가 도드라지는 작가이다.

 

이게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닌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그녀가 각색본에 본인의 취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졸작으로 바꿨다고 한들, 그녀의 희곡이 그녀가 용납하지 못할 만큼 함부로 취급당해도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곰의 아내의 무엇이 고연옥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는가? ‘곰의 아내를 보지 못한 입장이라 조심스러운데 차후 남산예술센터가 '곰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길 기대한다. 다시 당시 기사, 리뷰 등을 보면 주로 남산예술센터 기획작이 대부분 그랬듯 무난하다는 평이다.

 



당시 고선웅은 '고선웅의 전성시대'라던가 '정점에 섰지만 진화는 계속 된다'라는 식의 오글거리는 찬사를 받으며 비주류에서 주류로, 특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정점에 섰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박병성 편집장이 고선웅의 양식적 연출이 중국 고전과 만나 만개하다. 올해 꼭 봐야 하는 작품 리스트 가장 앞자리에 추가라고 극찬을 하며 별 다섯 개 만점을 매겼는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를 본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수작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이른바 양식적 연출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었더랬다.

 이런 패턴이 온갖 상찬을 듣다보니 당연히처의 아내를 의뢰받고도 스타일을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좋다, 나쁘다, 별로다 등등 평가가 있는데 가장 객관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곰의 아내>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원작 <처의 감각>과 이번 무대가 인간다운 삶이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비슷한 듯 다른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과 연극 간의 시선 차는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대본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비교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 "과연 인간의 삶은 동물보다 나은가" 작성일 2016.07.05. 조경은 기자 (매거진 플레이디비)

 



고연옥과 고선웅이 부딪친 지점은 연극 마지막 대목이다. 당시 작품이 못마땅했던 배선애 비평가는 객석에 쓴 리뷰에서 공연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작가와 연출가가 마치 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소통할 수 없듯 서로 다른 세계관의 합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희곡은 죽음과 현실에 대한 비유와 상징, 은유가 가득하며, 이성과 논리보다 원형적 감각이 앞선 곰의 언어'인 반면 고선웅은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연출이라 맹숭맹숭한 작품이 나왔다고 평했다.

 

고연옥의 희곡이 원형적 감각이 앞선 곰의 언어라는 해석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지하생활자들부터 내 이름은 강’ ‘칼집 속에 아버지로 이어지는 그녀의 설화적 세계가 신화 속 웅녀를 만나 신화적 상상력으로 더욱 확장했다'고 주장하려면 '지하생활자들', '내 이름은 강'을 연출한 김강보나 칼집 속에 아버지를 연출한 강량원(2013), 전지욱(2018)이 고선웅을 지적했듯 신화의 언어에 익숙한지 인간의 언어에 익숙한지, 주장처럼 신화적 언어를 잘 해석했는지 점검을 해야 한다. 그러나 '칼 집 속에 아버지' (2013) 플레이DB 전문가 20자평을 보면 극작 고연옥과 연출 강량원의 조합이 어색했다. 희곡의 재미가 무대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해 배선애가 끌어온 두 번째 프레임 즉 희곡작가의 위상에 이은 신화적/인간적 언어의 대립이니 뭐니 하는 엉뚱한 문제가 아니라 개성이 강한 고연옥과 역시 연출 스타일이 뚜렷한 연출가 사이 궁합이 맞지 않는다, 라고 진단하는 게 옳다. ()

 



여기까지 쓰고 이어가자니 한도 끝도 없고, 자신도 없고, 게으르기도 하거나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무리한다. 대충 이후의 전개는 프로그램 북에 무엇보다 어둠과 광기와 폭력을 주관하는 곰 아내가 칼을 든 채 처의 감각으로 열어내는 새롭고 넓은 여성의 길이다. 어떤 슬픔도 없이.’라는 김지희 문학평론가의 해석을 보면 작가가 그런 의도로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신화에 의탁하거나 신화에 기대 해석하는 건 과하고, 얼토당토 없다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프로그램북에 논고를 쓴 세 사람 중 신화 전공자라 좀 더 객관적이거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역사학자 이선이는 김지희의 해석과 정반대로 이 작품이 새롭고 넓은 길을 개척한 게 아니라 실현불가능을 전제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대척점에 있는 의견이 나온 걸 보면 작품이 갈팡질팡하거나 정보를 주는데 인색한 이유라고 본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 안의 모성의 을 뿌리 채 뽑아버리지 않는 한 내면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길로 걸어 나갈 수 없다는 지극히 내밀한 여자의 속내를 토로한 것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 ‘처의 감각과 곰 신화 (역사학자 이선이)

 

의문점을 제기하다 정작 연극처의 감각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는데, 짧게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김 정이 연출을 맡기도 전에 프레임이 곰의 언어, 신화적 언어를 구현하라, 고 짜인 틀 안에서 불가능한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무용을 배운 배우도 아닌, 연극을 해본 적도 없는 전문 무용수 윤가영에게 중극장 무대를 맡긴 과감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일종의 굿판으로 올린 작품에서 재담가는 입담이 좋은 배우들이 충분히 메꿨다.*




사진출처 -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