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드렁큰 루시퍼drUnken lUcifer] 취한 혹은 취할 수밖에 없는

구보씨 2012. 6. 1. 13:52

제목 : 드렁큰 루시퍼drUnken lUcifer

기간 : 2012/06/01 ~ 2012/06/03

장소 : LIG아트홀

출연 : 류장현, 배민우, 이정인, 송보현, 김환희

안무 : 류장현

주최 : LIG문화재단

주관 : LIG아트홀

 

"국내 무용계에서 표값으로 돈을 버는 안무가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을 짜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숙제가 관객들이 저를 알아보는 것,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끌어 들이는 문제인 것 같아요.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가족끼리 와서 손뼉 치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럴 거면 집에서 문 잠그고 혼자 춤추면 되죠."그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류장현 공연 정말 재미있다. 보러 가자'고 말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8 문화] 설레는 새해 ④안무가 류장현 2007-12-23

 

4년 전, 류장현이 주목받는 무용수로 인터뷰에서 말한 얘기는 어느 정도 실현된 듯하다. 서너 달에 한두 편쯤, 현대무용을 어쩌다 보는 내 시야에도 그는 눈에 들어온다. 작은 키에 작은 눈에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시선을 우선 잡는데, 무용수가 대략 이래야 한다는 몇 가지 외모 공식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허나 현대무용이 고전무용이나 클래식 발레도 아니고 다양한 군상을 보여준다고 하면 소두에 긴 팔다리가 장점만은 아닐 게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로 치자면 개성 넘치는 조연급 배우일 게다.

 

튀는 이미지와 어울리는 코믹한 안무도 안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몸이 근질근질 참지 못하는 몇몇 동작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내려가는 막에 더불어 바닥에 코를 박을 때까지 객석을 바라보는 식이다. 자유로운 그의 성격이 언뜻 엿보였다. 무용계를 잘은 모르겠으나, 초창기 그의 외모가 장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큰 키와 길쭉한 사지가 무용가로 적격이라는 것쯤 상식이다. 뭐, 그런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가 보여주는 무용은 다채로운 표정이 있다. 

 


2009.11 / YAC FOCUS! 'Fly' 사진. 오른쪽 끝 콧수염쟁이가 류장현

 

2012년 LIG아트홀 레지던스 아티스트 프로젝트 <드렁큰 루시퍼>는 무용가이자 광대로 류장현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그가 ‘몸’ 외에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이나 오브제를 다루는 다양한 변주에서 익히 공식을 따르거나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써 현대무용을 찾지 않으니 이전 그의 작품에서 해왔던 방식인지는 알 수 없다.

 

비지정석이라 관객은 미리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100명 쯤 길게 늘어선 줄은 객석 출입구를 막고, 무대 뒤로 극장 전체를 빙 도는 통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구조를 따라 이어진다. 무대 뒤편을 완전히 개방하지는 않지만 흰색 천으로 둘러친 통로는 곧 무용수들의 숨은 동선이기도 하다. 또한 공연이 끝난 뒤에서도 (굳이 나가자면 나가겠지만) 객석 문을 개방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은 술에 취한 광대 혹은 악마들에 의해 밀폐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관객에게 불편을 주고 한편으로 불필요해 보이는 구조 변경은 무대 활용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극 시작 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악마들이 실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거나 혹은 이종(異種)이 아닌 실재 세상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의도, 관객과 무용수가 같은 공간을 같은 경로를 통해 드나들면서 구분을 없애려는 의도이다.

 

무채색인 흰색으로 통일한 무대, 소품, 분장은 곧 하나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또 강요하는 장치이다. 흰색 분칠을 온몸에 한 무용수들이 악마인가, 혹은 천사인가 하는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동일한 구조 안에서 그들이 흰색으로 물든 이유는 환경에 지배받는 그 ‘무엇’이고 흰색 벽을 통과하는 순간 관객들도 마찬가지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바뀐다. 극 중반 이후 객석에서 관객이 부끄러워하거나 웃거나 외면하는 다양한 반응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이유 역시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벽이나 구조물에 머리를 박는 슬랩스틱 코미디는 단박에 웃음을 터트리지만 그 무모한 반복은 삶에서 겪는-각자 다를 사적 영역이든 사회구조적 모순이든-부조리함이고, 익숙해져서 부조리를 부조리로 인식 못하는 세태 풍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쨌거나 광대에 가깝다. 효과음처럼 들리는 뉴스는 요 근래 일어난 근친 살인을 비롯해 이른바, 사회 규범을 벗어나는 중범죄를 보도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도 실제와 엇비슷하다. 이들을 인간의 내면이라고 정의내리자면 왜 천사가 아니고 ‘루시퍼’(천사에서 악마로 타락한 존재)인가, 하는 해석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격식에서 자유로운 현대무용은 사유의 무저갱에 빠지는 우를 종종 범하고 만다. 무용수 자신은 알까 싶을 정도로 엄한 화두에 휘둘리는 무의미한 반복이나 변주는 종종 관객을 쉬이 지치게 한다. 그렇다고 학예회를 열 수는 없으니, 늘 어렵게 다가온다. ‘류장현과 친구들’이 보여준 방식은 이분법으로 나뉜 도식적인 구조를 띄고 있고, 의도 역시 다소 상투적이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지만 무용극으로 풀어내는 아이디어가 뛰어나다.

 

젊은 무용수들 역시 류장현 닮은꼴로 연기에 위트가 넘치고, 무대와 객석이 가깝다보니 문외한이 보더라도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쉬이 실력이 드러날 판인데, 수준 이상 실력을 갖추기도 했다. 오브제 활용도 그렇고 음악이나 조명 역시 영리하게 잘 사용한다. 억매이지 않는 무용가로 류장현이 가진 장점과 LIG아트홀이 그를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선정하고 제작 지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무대였다.*

 


 

사진출처 - LIG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