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들오리_한예종] 얼굴에 분칠한 들오리들의 슬픈 광대극

구보씨 2011. 11. 10. 14:26

제목 : 들오리Vildanden

기간 : 2011.11.10(목) ~ 2011.11.12(토)

장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

출연 : 김혜령, 박선영, 박 영, 박은비, 오희중, 윤 박, 이강희, 이상원, 이은이, 장유화, 전운종, 조정문, 홍진일

원작 : 헨릭 입센Henrik Ibsen

연출 : 김철리

조연출 : 강수현 윤가람

공동번역 : 강수현 배규자 윤가람

제작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넓은 무대에 선 배우를 보면,  한편으로 참 왜소해 보인다. 더 나아가 그가 어떤 배역, 어떤 연기를 하건간에 무대에 선 자체만으로도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세트로 무대를 좁히고 대도구와 소도구로 공간을 채우고, 조명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누고, 음악으로 힁한 허공을 채우지 않는 이상 연극이 끝날 때까지 배우는 의지와 상관없이 일종의 굴욕을 당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헨릭 입센 원작, 김철리 연출 <들오리>에 등장하는 들오리처럼, 헛간으로 개조한 다락방에 닭, 토끼 사이에 있는 들오리처럼.

 

연극에서 들오리는 박제로라도 보이지 않지만 무대 깊숙하게 이층 구조에 버티컬로 막아놓은 다락방 구조 안에서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이런 구조는 연극 도입부에서 그레거스 대저택 장면에서 무대 전체를 가린 비닐막을 걷어 올렸을 때 드러나는 얄마의 집이 드러나는 구조와 통한다. 즉 사냥개에게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긴 들오리의 삶이 그레거스 집안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에크달의 운명도 같은 운명에 이르리라는 암시이다.

 

배우들은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고 등장한다. 도드라진 얼굴은 얼핏 피에로처럼 보이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가면’으로 가린 거짓으로 가득한 인생사를 보면 그 이유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거짓을 드러내고 진실한 삶을 살자고 주장하는 그레거스의 모습은 검증되지 않거나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한 이상이 거짓만도 못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레거스와 대립하는 인물로, 허위나 가식이 삶에 중요한 원칙이고 일부라고 믿고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정신과 의사 렐링의 주장은 타당할까.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나가 남편 얄마에게 숨긴 과거 그레거스 아버지와의 불륜은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틀이 되었지만 아이의 자살이 보여주듯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삶이란 누구도 예단할 수 없는 법이다. 얄마의 아버지는 한때 동업자였던 그레거스의 아버지의 배신으로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지만, 나름 숲 대신 다락방에 올라가 사냥을 하면서 최소한의 즐거움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런 삶이라도 원수나 다름없는 발레 영감 덕분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마치 다락방 들오리처럼 주는 모이로 연명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다들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성공미담을 동경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백조의 물길질이 그렇듯이 고단하고, 또 때로 추악하기 일쑤이다. 일정 부분 포기와 만족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삶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간략하게 표현한 단순한 무대 구조에 꼭 필요한 소도구 외에 없는 데다 19세기말 유럽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니 중간 휴식을 갖는 2시간 30분 긴 공연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봐도 흥미진진한 입센의 드라마는 요 사이 막장드라마의 원형을 보듯 인물들 사이 14년 동안 꼬였던 관계를 들춰내면서 흥미진진하다. 배우들이 역할을 다소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연기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마지막 다락방에서 벌어진 비극은 올 2월, 연희단거리패가 해외연출가 기획전으로 게릴라극장에서 올린 <맥베스> 무대 연출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연출가 알렉산더 젤딘과 무대미술가 사말 블랙이 꾸민 무대 위 작은 방은 좁은 극장을 구조적으로 잘 활용했으면서도 버티컬을 영상막으로 활용해 피와 대비되는 상징으로 소공간을 잘 활용했다. <들오리>에서 중극장 무대 에 세운 다락방은 마지막 헤드빅의 비극이 벌어진 후 훑어진 배우들을 좁은 공간에 모으면서 집중력을 보강한다.

 

버티컬로 가린 다락방은 들오리의 존재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흰색 버티컬이 헤드빅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한편, 스스럼없이 그 안에서 총을 쏴대는 얄마 부자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자기 스스로 정의내린 얄팍함에 박제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액자 역할을 한다. 한예종 연극으로 처음 만난 <들오리>는 분량이나 주제로 보아 기성 무대에서 볼 수 있을 여지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사진출처 - 한국예술종합학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