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3월의 눈雪, 황혼의 시詩_오픈리뷰 칼럼] 장오와 배만의 집은 어디인가?

구보씨 2011. 3. 11. 11:28


3월의 눈

서울역 기차 역사를 통해 뒤쪽 3번 출구로 나오니 너른 마당을 끼고 담장과 지붕을 빨갛게 칠한 극장 건물 두 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작년 7월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국립극단이 열린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곳으로, 그중 400석 백성희장민호극장과 200석 소극장 판이 반갑다. 한때 서울역 근처로 출퇴근을 했으면서도 뒤쪽 풍경은 꽤 낯설다. 극장과 연습실이 자리 잡은 공간이 전에 기무사 수송대 부지였다는 데 설핏 내가 이쪽으로 오지 않은 이유가 그런 이유일까, 싶다. 춥다. 숙대 쪽에서 청파로를 타고 내리 부는 칼바람이 써늘하다. 서둘러 종종걸음을 쳐서 서울역 계단을 내려갔다.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작 <3월의 눈>(배삼식 작/손진책 연출)을 보러갔고, 3월 중순께였다.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가건물을 극장으로 살린 터라 옆 도로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객석에서도 들렸다. 그래도 백성희, 장민호 두 원로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을 문패로 단 극장에서 선보이는 연기에 그리 방해가 되지 않는다. 좀 시끄러워도 몸과 마음이 같이 편안히 누일 수 있는 곳이 집이라면 그곳이 천국이다. 국내에서 처음 한옥호텔을 지은 대목수 조전환이 지어 무대에 올린 손때 묻은 한옥 세트는 어린 시절 어렴풋 기억에 남은 외가댁을 닮았다. 시골 빈집을 그대로 떠서 옮겼을가, 배우만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었다.

 

입방정일지 모르겠으나 여든을 넘기고 미수米壽에 가까운 이분들 연기를 무대 위에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달려간 자리였다. 근데 웬걸 발성이나 연기에 흐트러짐이 없고 정정하다. 이런 게 내공이다. 개관작답게 원로배우들의 무대로 한국연극사를 되짚은 의미를 더해 시의적절 올라간 <3월의 눈>은 초연이 끝난 뒤, 두 달 지난 지금, 다시 공연 중이다. 입방정을 다시 떨만큼 우둔하지는 않지만 6월 5일까지 한다니 연극 참맛을 보려면 봐두어야 한다. '나가수'처럼 공중파 덕을 보는 게도 아닌데  백성희, 장민호 배우의 연극이 앵콜 공연에다 종종 매진이라니 중년 관객들의 힘이겠지만 앳되야 인기를 끄는 요즘 문화 세태에서 연극이란 게 별스러우면서도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황혼의 시

3월 이후에도 두어 번 더 국립극단을 찾아가 연극을 봤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더니 어느새 떠나고 오는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길이 익숙하다. 4월 소극장 판 무대에 오른 <황혼의 시詩>(이철 작/박해성 연출)는 이순, 장오 부부에 비하면 열 살 터울 동생뻘이지만, 역시 70대 노인 이배만을 중심에 둔 작품이다. 중견 작가가 쓰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한 개막작과 신춘문예로 막 데뷔한 신인 작가가 쓰고 젊은 연출가가 연출한 작품은 각각 경제 성장 뒤 가정 해체의 가장 큰 피해자인 노인 문제를 다룬다. 허나 다른 시선을 견지하고 푸는 방식이 달라서 <3월의 눈>이 사그라지는 추억과 기억을 되새기는 여운을 남겼다면, <황혼의 시>는 장오가 오래 전에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 이순이나 다를 바 없는 집을 떠난 뒤 맞닥뜨릴 만한 현실을 냉정하게 조망한다.

 

무대 위, 버리고 간 낡은 쇼파가 덩그러니 놓인 재개발을 앞둔 빈 아파트 거실은 을씨년스럽다. 벽에 흐릿하게 남은 낙서가 이 집에 살던 깡패 지석의 어린 시절을 가늠케 하지만 달콤한 추억만 남은 곳이 아니라는 것쯤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3월의 눈>에서도 아들 빚에 팔린 한옥이 각각 부잣집 거실 장신구로 해체되는 모양새가 스산했는데, <황혼의 시>에 오면 재개발 다툼에 데모와 진압으로 동네는 아수라장이고, 그 싸움도 이권 싸움이지 깡그리 건축 폐자재로 허물어질 아파트에 관심을 둔  게 아이어서 비교할 바 없이 퍽퍽하다.

 

재개발업자 용식의 미심쩍은 배려로 집 없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빈 아파트에 며칠 묵게 된 이배만은 그래도 좋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쇼파 잠을 자면서도 빈 집을 제집인양 “어멈아. 밥 차리거라~.“ 거드름도 한 번 피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지만 의용군 출신이라 국가에서 변변한 대접은 받지 못했어도 원망 대신 건전한 보수 가치로 평생 자존심 한 가지로 버틴 이배만이다. 그러나 점점 재개발업자 용식과 보수신문 기자 병진의 부드러운, 때로는 강압적인 요구에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어느새 '수구꼴통'이라 부르는 존재로 뒤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배만이 주판알 튕기는 이해타산 앞에 하릴없이 이용만 당하는 배경에는 집 없이 찜질방과 사우나를 부초처럼 떠도는 현실에 있다.




그들

노인을 두고 한 작품은 지키고 보전할 유산으로 한옥에 빗댔고, 한 작품은 경제개발시대 성공 아이콘이었으나 철거를 앞둔 애물단지 아파트에 견줬다. 작품 완성도는 배우, 제작 등 이런저런 이유로 <3월의 눈>이 앞서나 문제 제기의 핵심을 세밀하게 짚는 건 <황혼의 시>가 적절하다. <3월의 눈>에서 40~50대 중년은 경제논리에 따라 집을 해체하서도 못내 그 가치를 지키지 못한 데에 송구하다는 식이라면 <황혼의 시>에서 50대 용식은 배만을 이용해먹으려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친절을 가장하지만 전혀 소통을 하지 못한다. 50대 용식과 20대 지석 사이도 마찬가지다.  

 

결국 두 작품 말미에 외로운 독거노인은 집을 나서야 하고 갈 곳이 없다. 부푼 욕망의 표적이 된 이순의 집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서 당최 되찾을 엄두도 못 낼 환원가치가 되어버릴 참이니 연극이 끝난 뒤에도 그가 집으로 돌아갈 도리는 없다. 어딘가 있을 배만의 집도 다르지 않다. 소극장 판 역시 백성희장민호극장과 구조가 그리 다르지 않아 도로 소음이 그대로 무대에 묻힌다. 감안했는지 박해성 연출은 아파트에서 들리는 생활소음을 그대로 차용하는 극사실주의를 택했다고 했다. 국립극단 극장들은 배우나 관객에게 아주 좋은 시설을 갖춘 극장은 아니나 밖에서 들리는 현실이 무대에서 하나로 엉기는 치열한 현실 참여작을 선정하면서 불편하기 보다는 색다른 연극성을 부여했다.

 



서울역

주말 낮 공연으로 <황혼의 시>를 봤으니 해가 여전한데, 서울역 앞쪽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이배만인 듯 늙수그레한 노숙자 한 무리가 술을 마시고 있다. 벌써 곯아떨어진 축도 있다. 입을 닫은 그들의 얘기가 극장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연극 장면 장면이 어른어른 되새김질된다. 그때, 처음 서울역 뒤편으로 넘어오는 길 위에서 내 기분이 썩 마뜩치 않았는지 알만했다. 최신식 건물로 바뀐 뒤로 단속을 심하게 하기 전, 서울역 부근 기대거나 누일 자리마다 노숙자들이 있었다. 전에 서울역을 돌아 나오는 길 즈음에는 노숙자들이 지린 오줌줄기가 가늘고 길게 그들의 명줄처럼 위태위태하게 끊길 듯 흐르곤 했다. 

 

겨울이었다. 깨진 소주병에서 흐른 술과 섞였는지, 몸에서 알코올이 그대로 빠져나왔는지 얼지 않고 흐르는 지린내가 고약했다. 냄새를 풍기며 길 한쪽에서 사람들을 몰아내면서 김을 가느다랗게 피어 올리는 오줌줄기는 고개 숙인 그들이 “나 가고 싶은 집도 있어. 먹고 싶은 것도 많아.” 꿈틀대며 악다구니를 치는 듯했다. 그때, 난 아마 눈살을 살짝 잡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집, 집, 집. 당신도 주저 앉지 않고 되돌아갈 집을 늘 꿈에서 꿀 텐데, 그들은 연극 두 작품에서 말하는 집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아내가 유령처럼 떠돌더라도, 생판 남의 벗은 몸뚱이 때를 벗기더라도 살붙이 있는 자리가 집이다. 하지만 길 위는 먹고 자고 싼다고 한들, 가짜로 세운 연극무대 세트만도 못한 너무 허전한 집이다. 

 

열린문화공간이라 이름 붙였으나, 옛 기무사 터의 기운은 드나들 때마다 왠지 여전히 엄격하니 출입 통제를 할 듯하고, 표가 있어야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건 당연하니 노숙자들이 극장에 들어올 일이 드물다. 허나 소음이 비집고 들어오는 극장은 안과 밖 경계를 지우고, 되레 극장 밖에는 허구의 연극보다 더 파란만장 주인공들이 서성인다. 한 여름이나 다를 바 없이 무더운 5월 말, 아득한 일 같지만 겨우 4개월 전만 해도 지독하게 추웠고, 서울역에서 연례행사처럼 노숙자가 얼어 죽었다. 구제역으로 생매장을 당한 가축들의 잔혹사가 하도 충격이라 스리슬쩍 지나갔을 뿐이다. 노숙자가 죽어나간 근처 대형쇼핑몰에 봄맞이 이벤트 대형 광고판이 내걸렸나 싶더니, 여름 티셔츠를 가판에 놓고 판다. 연극이 현실처럼 생생하고, 현실이 연극처럼 생경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지만 서글픈 연극이 가슴을 꽉 조인다 싶다. 하지만 노숙자인듯 누군가가 째려보는 시선에 얼른 정색을 하고 고작 전과 다를 바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서울역 북부역세권개발 설계공모 당선작 ‘어반 트라키아(URBANTRACHEA)’ . 그의 집은 어디인가? 


오픈리뷰 2011년  5월 칼럼 http://www.openreview.co.kr/


사진출처 - 국립극단, lucidchang 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