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중주Quartet] 유령들이 차지한 객석

구보씨 2011. 5. 12. 11:59

제목 : 사중주Quartet  - 2011 게릴라극장 기획 ㅣ브레히트 ± 하이너 뮐러 기획전3

일시 : 2011.05.12 ~ 2011.06.05

장소 : 대학로 게릴라극장

출연 : 배보람, 윤정섭

원작 :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

연출 : 채윤일

주최 : 게릴라 극장

제작 : 극단 쎄실


 

그녀

기획사를 두지 않고 극단 자체 시스템으로 관련 업무를 운영하는 연희단거리패 공연을 보러 가면, 작품과 별도로 극장 주변에서 소소한 재미를 발견하곤 한다. 예를 들어 작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를 올릴 당시 팸플릿을 팔던 이는 밀양연극촌장 남미정 배우였다. 연출가도 겸하는 연기를 기막히게 잘하는 배우인 그녀한테 팸플릿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는데, 무대 위에서 당당한 모습과 달리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대관작도 그러니 자체 극장인 게릴라극장에서야 말할 바가 없다. 매표소에서 표를 팔고 객석을 안내하는 이들이 죄 무대 위에서 봤던 배우 아니면 연출이니 말이다. 

 

쉬지 않고 자체 공연이나 올리고 연관하여 참여하는 데다, 기수제를 운영하면서 젊은 연극인을 양성하니 분업이 아닌 가내수공업에 가까운 지라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무대 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맡은 소임을 하는 배우들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낯선 오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하이너 뮐러 원작 <사중주>는 무려 게릴라극장장 김소희 배우가 객석 진행을 맡았다. 연희단거리패 대표배우이자 언론이 주목하는 한국 연극 여배우 10인에 뽑힌 그녀는 다른 매체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연극에만 매진하는 정말 멋진 배우이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익숙하다보니 주말 낮, 화장하지 않은 민낯에 수줍어하는 모습이 꽤나 낯설다. 하지만 짙은 무대 화장 이면에 청순함마저 갖췄구나 싶어 내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엇? 극장장님이 직접 표를….” 정도긴 하지만 마주보고 대화를 나눠보기는 처음이다.

  

이러나저러나 <사중주>가 2인극이라도 배보람, 윤정섭이면 일당백 팔색조 배우들이라 눈을 떼지 못할 판인데, (뒷줄에 나를 기준으로) 앞으로 두 칸 왼쪽으로 예닐곱 칸 객석에 앉은 김소희 배우의 옆얼굴로 자꾸 시선이 간다. 그녀는 분명 공연을 처음 보는 게 아닐 터인데 무척 진지하다. 어쩌면 나처럼 힐끔거리는 주위 관객들을 의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좀 든다만, 해서 두 편의 연극을 동시에 본 느낌이랄까, 그렇다.



김소희는 <하녀들>에서 배보람과 <맥베스>에서 윤정섭과 호흡을 맞췄다.


이날 공연의 색다른 재미로 채윤일 연출이 톡톡히 한몫했다. 김소희 배우가 어둠속에서 빛나는 외모로 시선을 끈다 싶자, 좌청룡우백호인 듯 통로를 사이에 두고 동떨어진 C열에 홀로 앉은 채윤일 연출이 사운드의 마법사로 나섰다. 하필 하이너 뮐러의 난해하고 골치 아픈 대사를 빠르게 주고받는 와중에 그가 코를 골기 시작한 것이다. 관객들 시선이 연신 돌아가면서 눈치를 주는데 어두운 객석이 또 잠들기에는 적격이라, 소용이 없다. 극단 쎄실 대표이자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으로 올해 ‘브레히트 ± 하이너 뮐러 기획전’을 견인한 중심이자 다시 돌아온 연출로 기대를 모은 그이다. 그런데 자기 작품을 보고 졸다니! 피식 웃음이 나올 상황이지만 무대 위 열연과 겹치자 예상하지 못한 부조리극이 극장 안에 펼쳐진다.

 

연출마저 졸 정도로 난해하고 지루한 작품이라는 증명일까? 뭐, 단순히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피곤한 탓이라고 보지만 두루 흥미진진하다. 짐작하자면 토요일 2회 공연 사이, 점심을 드시면서 반주를 좀 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시간을 잘못 알고는 1시간이나 일찍 와서 하릴 없이 극장 앞에 앉아 있을 때, 내 앞으로 지나간 얼굴 불콰한 중년이 그이지 싶은 정황이 있다. 그때 난 사중주 팸플릿에 시선을 딱 고정하고 있어서 확정은 못하지만-팸플릿이 재밌었다는 게 아니라 히브리어사전을 읽고 있었다고 한들 지나가는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그녀와 그

이런 게 영화나 드라마가 줄 수 없는 연극의 묘미이다. 채윤일 연출이 잠깐잠깐 깰 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색을 하니 왠지 1인극을 보는 듯 하더란 말이다. 종종 극장 뒷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면 객석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광경을 볼 수 있긴 하다. 김소희 배우는 못 들은 척, 배우들에게만 집중한다. 불혹을 넘겼다고 하나 귀가 어두워 못 들었을 리는 없고, 무대 위 후배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려는 배려다.

 

잠시 좌우로 돌아갔던 시선을 무대 위에 던지니 소극장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출이 코를 골고 졸고 있으니 연기하는 배우들은 죽을 맛이겠구나 싶다. 그러나 시끄러운 야구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면서 훈련하는 국가대표 양궁선수들인양 연출의 남다른 연기 지도(?)에도 흔들리지도 않고 한 페이지 분량의 대사를 잘도 주고받는다. 틀리거나 대사가 엉키는 경우 없이 제대로다. 날도 덥고, 하루 두 번째 공연이라 힘이 빠졌을 만도 한데 흔들리지 않는 배보람, 윤정섭은 연희단거리패 차세대 기수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Choderlos de laclo) 소설 <위험한 관계, 1782>를 원작 삼은 <사중주>는 마르테유(Merteuil) 후작 부인과 발몽(Valmont) 자작(영화 <스캔들>의 조씨 부인과 조원, 그러니까 이미숙과 배용준)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허나 ‘프랑스 혁명 전 살롱/제3차 세계대전 이후 벙커’로 배경을 난데없는 위기 상황으로 설정한 지문이 상징하듯 두 주인공은 여흥 수준(적어도 겉으로는)의 내기가 아닌, 광기 충만한 대결 구도의 2인극이다. 연극을 보고 극장을 나와서 대본을 다시 읽어도 알쏭달쏭 상징 범벅인 내용을 오로지 연기로 흥미롭게 풀었다. 이 둘의 연기를 보면 대화에서 텍스트가 차지하는 부분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참이라 걸 새삼 깨닫는다. 




극중극

하이너 뮐러가 1981년에 이 작품을 쓸 당시라고 해서, 연극이 정색하고  점잖게 목소리를 낸다고 얌전히 들어줄 세상이 아니었다면, 통속소설에서 차용한 늙고 추하고 망한 천박한 귀족들의 지루하고 난해하면서도 시답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늘어놓는 수사어 난발이 겨냥하는 바는 명확하다.

 

다른 도움 없이 단 둘이서 서로 성역할을 바꿔가며 격하게 조롱을 퍼붇는다는 설정은, 암전으로 길게 끌 수도 없는 상황이라  주섬주섬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쓰고 부랴부랴 등장하는 모양새가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키가 작고 몸피가 작은 배보람이 윤정섭이 연기한 발몽 역할을 맡을 때 남성호르몬 철철 흘리는 발몽보다 귀여운 찰리 채플린이 생각나기도하지만, 덩치 큰 윤정섭이 가짜 가슴과 넓은 잠기지 않는 드레스를 살짝 걸치고 너른 등짝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투르벨 부인 역을 할 때에는 정말이지 좀 암담하다. 투르벨 부인을 향해 메르테유가 ‘암소, 힘 있는 살덩이, 탁한 수챗구멍’이라고 비유를 들기는 한다만 말이다.

 

핵전쟁일 가능성이 높은 제 3차 세계대전 이후 벙커 안이라는 지구종말적 설정으로 연극을 해석하면 <사중주>는 신화판 아담과 이브가 아닌 다큐판이거나 혹은 중늙은이 둘만 남아 똥, 오줌을 연발하다가 최대한 조롱거리로 추락하는 전개 자체가 디스토피아 종결판이다. 발몽과 메르테유가 벌이는 짓거리가 문란한 놀이쯤으로 보이지만, 늙은 메르테유가 순결을 잃기 전 꽃다운 10대 조카딸 볼랑주로 역할을 바꾸면서 회춘하는 대목은 마치 구약 창세기 1장 26절처럼 새로운 인류사의 한 장을 써내려갈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암에 걸린 메르테유 대신 젊은 성처녀 볼랑주와 생식력이 좋은 발몽의 만남은 종말에 처한 인류사의 새희망일까만은, 허구는 허구일 뿐 발몽은 메르테유가 권하는 선악과를 발효한 (사과주가 아닌 포도주지만) 독주를 마시고 죽고 메르테유는 아마도 방탕한 음주가무와 시기 질투 등이 원인인 암으로 자멸한다. 

 



위기

아무려나 게릴라 극장에서 벌어진 상황을 내 시각으로 정리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손꼽히는 김소희 배우가 극장 안팎 경계인 극장 입구에 서 있을 때부터 연극이 시작됐나 싶었는데, 연출이 조는 와중에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상황이라면, 극단이 “절망스런 세계관”이라고 해석한 하이너 뮐러의 작품 의도가 극장 안과 밖을 오가고, 객석과 무대에서 겹치면서 들어맞은 셈이다.

 

절망적 세계관을 작품 안으로만 한정하면 '1박2일 - 여배우 특집 편'에 나가서 이승기의 총애를 받아 마땅할 김소희 배우는 표를 받으면서 객석을 정리하고, 3년 공백을 깨고 연출을 맡은 채윤일 교수는 코를 골고, 배우들은 분명 관객이 기억할 리 만무한 대사를 반라 차림으로 풀어놓지만, 관객은 이들과 더불어 심각했으나  연극이 끝나고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토요일 저녁 게릴라극장을 매개로 총체적 난관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원전사고 7등급 가운데 5등급쯤 해당할 위기 상황은 극장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아주 깔끔하게 해결된다. 찻잔 속의 태풍이란 게 이런 건가, 쑥스럽다. 하늘은 맑고 오가는 발걸음은 느긋하다.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미필적 고의이기는 하나 그 의도를 제대로 알린 채윤일 연출을 봐서라도 흐지부지 풀어지면 안 된다 싶다. 작품에서 의미망을 해체하고 나면 가발을 바꿔 쓰느라 눌린 배보람의 머리와 윤정섭의 풍만한 엉덩이만 떠오르고 말 게 아닌가. 연극 대사를 곱씹고 나면 그 위기라는 게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는 게 증명되지 않을까, 팸플릿을 펴든다.

 

하지만 무대를 떠난 대본은 당최 그 당당한 악다구니가 보이지 않는다. 하이너 뮐러가 쓰고 정민영 교수가 번역한 대사는 폭력, 대립, 권력 구조 등 뭔가 절망적 세상을 이해할 실마리를 담았나 싶지만 냉전 당시 검열 혹은 숙청이 무서워 문제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가십처럼 주변에서 변죽만 울리면서 떠돌던 수많은 담론을 희화화하여 삽입한 듯하다. 작가의 의도가 실제로 이런 지는 확인할 바 없지만 연극을 전제로 하는 대본인 이상 극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다면 아무리 수식어로 도배한다고 해도 요즘 시중에 떠도는 수많은 주장, 설교, 선동과 경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희극

작가가 “사중주는 희극”이라고 밝혔듯이,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대사이되 대사 과잉을 통한 아이러니라, 자본주의와 나치주의를 각각 과잉 이미지로 빗대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등장 캐릭터가 4명이라 4중주라는 제목이 붙었겠지만, 배보람이 1인 3역(메르테유, 발몽, 볼랑주), 윤정섭이 1인 2역(발몽, 투르벨)을 맡고, 의상, 분장을 퇴장 없이 소화를 하니 연극 모든 역할을 도맡는 작품에서 1인 2역/3역으로만 보기 힘들다. 무대를 벗어나지 않으니 따로 암전이 필요 없고, 빠르게 오가는 장황한 대사 앞에 음악이나 효과음 역시 필요 없다. (조명 변화를 주긴 하지만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다.) 다시 말해 배우 둘이 연극 구성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도맡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내공이 없으면 맡기 힘든 배역이다.

 

허나 연극 배경을 프랑스 혁명 전의 살롱으로 보면 그 어수선한 시국에 볼 관객이 있다고 하나 누가 한가로이 연극을 볼 것이며, 제3차 세계대전 이후의 벙커로 보면 타나 남은 시체가 뒹구는 와중인데 보고 싶다고 하나 죽고 없는 관객이 어떻게 극장을 찾을 수 있을까 말이다. 관객 없이 진행되는 연극이란 설정은 2인극이면서도 사중주를 하듯이 남녀를 바꾸고 캐릭터를 달리하고 연극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죽어라 도맡는다고 해도, 딱 한가지 역할 관객으로 분열할 수 없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그렇게 둘의 가상한 노력이 빈 객석까지 아우르면 코미디가 되고 만다. 




확장

작가 의도를 극중극에서 파악했다면 한 발 나와 극단 쎄실의 <사중주>는 어떨까. 그 모호한 배경을 채윤일 연출은 옷이 어지럽게 걸리고 소품이 뒹구는 소극장으로 꾸몄다. 이를 두고 대본에 적힌 배경과 비교하자면 어두침침한 객석은 벙커와, 화려하고 퇴폐미가 흐르는 무대는 살롱을 닮았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뒤, 객석은 텅 비고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의상이 낡은 소품이란 게 드러나면 극장은 비극적 공간으로 탈색한다. 문제는 희비가 교차하는 극장을 벗어난 다음에 발생한다.

 

1시간 10분 남짓 공연 시간 동안 작은 극장 안에 모인 배우, 관객, 스텝 포함 100여 명 쯤 되는 이들이 작품 의도나 설명처럼 사뭇 진지하게 “타락이 자초한 허무한 현실”을 대한민국 현실에 비춰보자고 한들,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가 과연 극장 밖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따져 보면 효율 9%(0%라고 적으려다가 오타가 났다. 우연이나 9% 정도 힘을 발휘하길 바란다)에 가깝다.

 

극중극 설정으로 객석이 텅 비었다고 했지만, 실제로 지금 극장에서 무대 위와 객석을 넘나들며 연출, 극장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한들 연극 의도하는 바가 극장 밖에서 맥없이 휘발하고 만다면  객석을 채우고 있는 건 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지박령이라고 해도 맞을 것이다. 관람료를 지불했다는 점에서 보면 9% 정도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 




메타극

이윤택 대표는 드라마터지의 글에서 현실을 반영해 연극에 녹여내길 원했으나 채윤일 연출이 대본에 충실한 작품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윤택 대표의 해석처럼 ‘남성의 일방적 폭력성과 여성성의 타락’이 ‘세계의 황폐함’에 따른 원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소설에서 따온 인물들이고, 극중극을 빼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들, 배우가 주인공인 메타 연극이라는 데에 좀 더 관심이 간다. 

 

동시대 폭력과 타락을 단순화시켜 직설로 풀어내기에는 얼마 전에 개봉해 화제를 모은(모았다고 생각하는)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Inside Job, 2010>이 금융 마피아들이 지배한 미국 사회를 조명하면서 복잡한 구조적 모순이 세계를 지배한 지 오래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2008년 세계적 재앙을 몰고 온 경제 위기와 이후 반응을 보면 잘라내야 할 암이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격이라 어쩔 수없이 암을 계속 키우는 식이다.

 

아무튼 이윤택 대표 의견처럼 원작 배경을 재앙이 덮친 이후 서울 소극장으로 꾸몄다고 해도 (관객 입장에서 무대가 이미 그렇게 보였지만) 관객들에게 강한 반향을 가져왔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메타극으로 한정하면 작품에서 말하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를 관객 없는 극장, 즉 작품성을 담보하는 예술로 연극 무대가 아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무대에 관객들을 빼앗긴 극장의 미래가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로 관객들이 외면하는, 더 자극적인 매체를 찾든(프랑스 혁명 전 살롱) 연극 장르 자체를 외면하든(제3차 대전 이후 벙커), 2명의 배우만 남아 허겁지겁 캐릭터를 바꾸면서 어울리지도 않고 해괴망측한 코미디가 되고 만 막장드라마를 연기하는 상황, <사중주>에 이르고 만다.  


연극을 보면서 하이너 밀러가 하필 통속소설인 <위험한 관계>를 <사중주> 안에 끌어들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작품이 잔인하고 비참한 이유는 연극이 끝나고, 연극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배우 둘은 남아서 그 허망함을 견디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기억하는 관객 몇몇 역시도.*


 


추신 : ‘비만, 고지질증, 당뇨병, 고혈압’을 죽음의 사중주(deadly quartet)라고 부른다고 한다. 풍요에서 비롯되는 생활습관병으로 사망 원인 1위를 다투는 사중주를 뮐러가 앞서 예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 게릴라극장, 극단 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