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서울의 착한 여자] 착한 사람을 경계하고 주목하라

구보씨 2009. 12. 18. 16:37

원작_ 브레히트 ‘사천의 착한 사람’

각색/연출_ 양정웅

출연_ 정해균, 전중용, 최현숙, 김영조, 장현석, 박선희, 이성환, 김진곤, 김지연, 이은정, 정우근, 김상보, 정수연, 변민지, 남승혜, 도광원, 이신우, 문석형

공연시간_ 120분

주최_ 아르코예술극장, 극단 여행자

주관_ 극단 여행자

제작_ 극단 여행자

 

 

정언명령 혹은 황금률
인간은 착한가? 아니면 악한가? “당신은 순이와 강 사장 중에서 누구의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연극 말미에 물장수 김씨가 관객들과 배우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을 때 칸트의 정언명령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회피가 아니었나 싶지만 아무려나)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준칙인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정언명령은 이른바 황금률이라 불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한 단계 더 뛰어넘어 인간의 주관적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명령으로 따라야 한다는.

그러나 누구라도 들어봤음직한 황금률, 정언명령대로 살지 못하는 혹은 살지 않으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세상은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매년 찾아오는 독감처럼 점점 독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에게서 비롯한 성악설? 글쎄.. 그 이유를 그보다는 설득력 있는 칸트의 견해에서 다시 말해 인간이 도덕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통해서 역으로 그 단서가 발견된다.
  
‘인간에게 당위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이중적 구조, 즉 인간은 동물처럼 욕구에 의해 움직이지만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의무를 이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명백해진다. 인간은 도덕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안에 내재한 동물성이 문제인가. 동물에게 선과 악의 개념 적용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동물성을 누르지 못하는 나약한 자유의지, 이성의 부족 때문인가. 그러나 이성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악이 벌어졌는지. …. 한도 끝도 없이 말려들어가는 질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정언명령. 영 입에 붙지 않은 이 말만은 잊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쩌면 자신이 없다기보다 이제는 구태의연한 질문이 되어버린 듯하다. “착하게 사는 게 맞지. 근게 그게 말처럼 되지가 않아.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연극을 보고 나서 몇 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들은 엇비슷한 대답이다. 서글프지만 모범답안일 수도 있겠다.




다시 돌아온 그때 그시절

“방대한 구조와 사유의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쉽고, 단순 명료하게 재해석해 음악극으로 재구성한 <서울의 착한 여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현대인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서울의 착한 여자' 팸플릿 소개 중에서


1942년 원작을 극단 여행자가 2003년부터 고정 레퍼토리로 연이어 올리는 이유라면 여전히 브레히트의 시선이 대한민국에서 유효하다고 보기때문일 게다. '착한 여자'라는 나름 진지하고 순수한 제목은 나쁜 남자, 혹은 나쁜 여자에게 환호하는 시대에 키치로 되살아났다. 나쁜 세상은 이독제독(以毒制毒), 내가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기인한다. 그러나 독이 독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독이 점점 더 독을 부르고, 어느 순간 내가 독에 중독된 사실조차 잊고 말았을 때 세상은, 작품처럼 신이 등장해 벌을 내리는 상황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끼리 공멸을 하게 될 것이다.



극단 여행자는 2010년 즈음을, 한국 전쟁 직후의 가난이 부른 처절한 악함이 지배하는 배경을 삼은 작품을 다시 복기할 정도로 비슷한 상황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아니러니하게도 한반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후, 가장 풍족함을 누리고 사는 지금을 말이다!  

 

<서울의 착한 여자>는 무거운 주제를 품었으나, 가볍고 유쾌한 외유내강형 악극이다. 우선 무대를 전쟁 직후 분위기로 제대로 꾸몄다. 아코디언까지 갖춘 그럴듯한 악단을 꾸려서 무대 뒤에서 든든하게 받치고, 무대 양쪽 가에 마이크를 설치해서, 종종 무대 중앙을 후끈후끈한 무도장으로 몰아간다. 그 대부분이 아귀다툼이지만 한편으로 산다는 게 결국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스테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바레 손님들처럼 자리를 잡은 관객들에게 던진다.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햄릿>, <한 여름밤의 꿈>으로 명성이 높은 극단 여행자의 두 해를 잇는 공연답다. 극단의 농익은 배우들과 패기 넘치는 젊은 배우들이 좋은 조합으로 등장하는데다, 극단 작은 신화 소속으로 캐릭터마다 톡톡히 한몫하는 최현숙까지 거들고 나서니, 총 18명의 배우들이 소극장 치고 좁지 않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을 꽉 채운다. 시대를 제대로 반영한 소품 하나, 의상 한 벌에도 충분히 구질구질한 테가 제대로 난다. 머릿수도 수지만 각자 캐릭터가 뛰어나고 1인2역이 다반사이다보니, 골목 동네 북적북적한 분위가 제대로 산다. 극중 돈에 연연하는 찌질한 분위기와 브레이트의 서사극 영향을 빌어서 말하자면 객석에 앉아만 있어도 본전은 찾는 공연이다.


 

 

순이가 착할 수밖에 없는 까닭

그런데 하나같이 약삭빠르고 속고 속이고 치고받는 극 초반 몽타주에서 유독 튀는 한 인물이 보인다. 서울의 착한 여자 순이이다. 믿을 건 몸뚱이 뿐인 고아 창녀지만, 동대문구 이문동의 착한 여자도 아닌 서울 대표 착한 여자인 그녀는 당연히 삼위일체 신들이 찾던 바로 그 인물이다. 지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신들 입장에서는 하룻밤 잠자리일 뿐이지만, 순이는 먹고 살기 위해 말 그대로 치열하게 발버둥 쳐야 하는 영업장을 내어준 것이다.


그녀는 그(이) 시대에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어쨌거나 주위의 하마평은 그녀를 ‘거리의 천사’라 칭송하지만 , 한편으로 ‘봉’ 취급을 한다. 어쩌면 ‘거리의 천사’라는 별칭이 악하게 살려야 살수 없도록 막는 가로막일 수도 있고, 그녀의 영업전략일 수도 있다. 이런 혐의는 그녀 내면에서 분열한 강사장이 골목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가장 악독한 인물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극중극에서 1인2역인 강사장이 등장한 이후, 그녀의 착한 반달눈웃음을 보면서 오싹오싹하기 시작한다. 정부 공인도 아니고 삼신 공인 착한 순이가 돌현 가장 악한 인물을 돌변할 수 있다는 설정은 단순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설정 자체로만 볼 게 아니다. 강사장과 순이는 한 몸을 두고 자유자재로 오고 간다. 두 존재 사이에서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이 아닌 이상, 순이의 수줍은 웃음 뒤에 있는 순도 100% 악의 정체를 우리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연극과 달리 선한 얼굴 사진 공개로 논란이 된 사이코패스 강호순 사건에서 보듯, 그 정체는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하다. 깍두기 머리에 문신을 한 밖으로 드러낸 이른바 조폭 식 캐릭터는, 개가 짖는 이유와 동일하다. 나 역시 무서우니 다가오지 말라는 어설픈 속내이다. 순이의 동글동글한 얼굴과 반달눈웃음은 애써 정언명령을 되새기며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브레히트의 목소리를 빌어서  원인을 사회에서 찾고 있다. 


원인보다  더 무서운 건, 브레히트 작품의 일관된 문제 제기이기도 한데, 악은 속성상 거대한 자본과 권력 뒤에 숨어서 그 정체 자체를 무화시킨다는 것이다.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버리면, 죽어나가는 것은 노동자와 이들을 막는 구사대들뿐이고, 이들의 부딪힘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생계 수단이 되어버리면서 심지어 선과 선의 대결 구도로 무효화 시켜버린다.  사이코패스 사회가 되어 버린다. 연극에서 강사장이 공장을 세워서 성공을 하고, 세상에 복수를 하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하여 거대 자본가로 우뚝 서는 방식은 브레히트가 매섭게 포착한 시선이 자본주의 꽃을 찬란하게 피운 지금에 와서  더 유효하다는 반증이다. 동시에 6.25 직후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극단 여행자나름의 분석이다. 


 

 

신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연극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본주의의 폐단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작품에서 난데없이 신이 등장하는 이유를 보자. 남루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 그들이,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나선 이유는 ‘착한 순이’를 우르르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악한 강사장’을 1대3로 막아보자는 의도로 보인다. 극 마지막에도 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따져 묻는 되돌아온 착한 순이의 울부짖는 물음에 “여전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내린다. 정언명령은 말 그대로 위로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래서 강사장으로의 회귀를 막기 위한 강구 조치처럼 보인다.

 

당신은 어떻게 살겠는가? 짙고 엷음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순이와 강사장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충 타협하면서 어설프게 그러니저러니 장삼이사로 사는 동안에 세상은 진짜 악독한 것들이 지배하고 말았다. 착한 순이를 내몬 영악한 사람들은 강사장의 어설픈 시다바리로 전락하고는 지들끼리 또 공장장 자리를 두고 싸움질을 한다. 원인 제공과 해결 주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만, 연극에서는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순이가 밴 축복받지 못한 아이는 강사장의 부른 배로 서로 치환된다. 사랑인가, 돈인가. 둘은 겉보기에 비슷할지 모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 생명과 착취는 이율배반이니 동시에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가만 있으면 중간을 간다는 말은 당연히 허구이다. 사산을 하거나 푼돈을 쥘 뿐이다.*

 

 


 사진출처 - 극단 여행자, 디자이너 이은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