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을 소나타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12월 10일 ~ 2010년 1월 10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손숙, 추상미, 이태린, 박경근
원작 : 잉마르 베르만
연출 : 박혜선
기획 : 신시컴퍼니, SBS
신시컴퍼니의 가을소나타
<손숙, 추상미의 가을 소나타(이하 가을 소나타)>는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르만 감독의 동명 영화 '가을 소나타'(Autumn Sonata, Hostsonaten, 1978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7년 만에 만난 모녀의 상봉을 다룬 작품은 짐작과는 달리, 애증이 용암처럼 끓는 팽팽한 심리극으로 수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다.
하지만 30여 년 세월을 넘어서(한국 개봉은 2004년) 연극으로 다시 올라가는 <가을 소나타>는 손숙, 추상미라는 유명 배우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주목 받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작품이다. 배우 4명이 등장하나 2인극이나 다름없는 데다, 모녀 사이 갈등이라는 다소 익숙한 주제를 다룬 대사 위주의 심리극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둔 배경으로 제작사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는 자본력을 첫 손에 꼽는다. 자본력 바탕으로 양질의 기획, 제작, 홍보가 가능하다는 말은 누구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알 만한 얘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대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종종 실망스러웠던 경험을 개인적 떠올리면 막대한 자본 투자가 수준 높은 연극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 자본에서 자유로운(말 그대로 상대적으로) 연극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주로 소극장에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소극장 위주의 대학로 풍토와 비싼 대관료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환경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어쨌거나 소극장 연극이 무대, 소품, 조명 등 제약이 따르는 대신 배우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연극만이 가진 생예술(Live Art)의 짜릿함을 체험하기에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역으로 배우 한 명의 부족한 실력에 작품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
올해, 뮤지컬 기획사의 연극 진출이 눈에 띈다. <가을 소나타>의 신시컴퍼니는 올해 4편의 연극 제작을 공헌했다.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탤런트와 영화배우들 진출이 수월한 편이어서 <가을 소나타>에 이은 신시컴퍼니의 <엄마를 부탁해>에도 중견 배우들의 참여가 눈에 들어온다. 올해부터, 스타들을 앞세운 중극장 규모의 연극 제작이 보다 활발해질 전망이다. 상대적으로 흥행 여부를 장담하기 힘든 연극에 대한 본격적 투자 계획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한편으로 관객 싹쓸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가을 소나타>는 소극장에서 올려도 어울릴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신시컴퍼니가 제작을 맡으면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라갔다. 대극장 대여, 걸맞는 무대, 소품 등 당연히 티켓 가격의 상승 요건이다. 원작이 워낙 탄탄하고, 명 배우들이 참여한다지만 이 작품이 어떨지는 직접 보고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손숙, 추상미의 가을 소나타더블 캐스팅 없이 두 달 장기레이스를 온전히 손숙, 추상미 2인 책임으로 끌고가는 이면에는 흥행에 따른 개런티(연극계의 열악한 사정에 비해 비교적 높은 액수겠으나)때문은 분명 아닐 것이다.
우선 배우 손숙이 직접 대본을 들고 제작사를 찾은 작품, 이라는 연극 소개가 눈에 띈다. 거기에 배우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싶은 만한 좋은 원작에 기획력을 갖춘 메이저 기획사라면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애초 중극장 규모의 작품으로 얼개를 잡은 부분도 눈에 들어온다.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연극 메카, 대학로 100여 곳 극장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공연 환경을 갖춘 극장이다. 1,2층 합쳐 504석 규모 중극장을 등장인물은 총 4명이지만 거의 주연 배우 2명이 끌고 가기에는 좀 무리한 선택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배우와 연출 박혜선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덕에, 2인 심리극이지만 중극장 무대 정도가 되어야 제대로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믿음을 갖고 극장에 들어섰다.
가을 소나타가 중극장이 필요한 이유무대는 꽉 채운 2층 목사관은 1층에 주 무대인 널찍한 거실을 앞에 두고 그 뒤로 부엌과 서재가 있다. 2층에는 발작 장애로 침대 생활을 하는 엘레나의 방과 엄마 샬롯이 머물 방이 계단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았다.
인형놀이 세트처럼 보이지만 1:1 축적은 세운 무대 위 각각 분할된 공간은 효과적 암전과 부분 조명 집중으로 각 방이 작은 소극장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배우에게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1층과 2층을 오고 가는 동선은 정적이고 대사 위주 심리극의 단조롭고 지루한 부분을 보완한다. 다만 복층 무대는 객석의 위치에 따라 사각이 나올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에바와 샬롯에게 집중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에바의 남편 빅토르나 여동생 엘레나는 에바의 상황과 심리를 보여주는 상징 또는 극적 전환 정도에 머무는 점이 못내 아쉽다. 배우 2명에게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겠지만 빅토르는 등장을 절제하고 여동생 엘레나는 대부분 자는 듯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
대신 구구절절 설명 없이도 에바와 빅토르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엄숙하고 검소한 목사관 세트가 빅토르의 역할을 대신한다. 나이 많고 인자한 목사 빅토르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대체할 안식처로 안정을 원하는 에바의 심리를, 평생을 두고 돌봐야 하는 동생 엘레나는 어머니 샬롯에게 받지 못한 애정에 대한 역설적 반항, 대리 만족을 보여준다.
엘레나의 존재는 그녀의 착한 심성과 상관없이 샬롯과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무대에 공을 들인 데에 따른 효과이다. 실측 건물을 무대로 옮기는 방식은 대형 뮤지컬에서 종종 쓰는 방식으로, 신시컴퍼니의 제작 노하우가 보이는 측면이다.
에바와 샬롯, 다른 선택 다른 인생
에바의 어린 시절 이후 처녀 시절까지 이어진 내적 갈등과 결혼 이후 아들의 불의의 사고에 따른 죽음을 겪은 에바에게 목사관은 치유와 회개와 추모의 충만한 공간이다. (엘레나의 방은 아들이 살았다면 차지했을 방이다. 그래서 엘레나는 자책에 대한 치유의 상징이다.)
샬롯을 위해 비워둔 이층 방은 미처 치유하지 못한 에바의 어린 시절, 그때 상처가 가득 괸 공간이라고 봐야 한다. 어린 시절 화려하고 완벽한 샬롯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괴감, 사춘기 시절 상대적 열등한 외모, 상대적 평범한 재능에 대한 열등의식은 에바 혼자 치유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에바는 샬롯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녀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게 방을 꾸민다. 샬롯이 도착하고 목사관을 빈 방 없이 꽉 채우고 나면 에바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잡는다.
샬롯이 며칠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는 이면에는 7년 만의 해후로 인한 낯섦, 모녀가 서로 속내를 털어놓은 이후의 바뀔 수밖에 없는 관계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난 갈등 외에 에바, 그녀 자체나 다름없는 목사관은 샬롯에게도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 가족의 재현이다. 평생을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으며 살아온 샬롯에게 희생, 나눔, 배려 등등 가족 내 엄마라는 역할은 굴레로 작용했고, 늙어 뒷바라지를 받아야 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방황을 떨치고 금욕적 정착 생활을 선택한 에바와, 애인의 죽음, 실력 퇴보에대한 불안에도 연주자로 떠도는 삶을 고집하는 샬롯의 7년 만의 만남이 화해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현실에서도, 작품에서도 좀처럼 납득 가능하지 않다. 에바는 샬롯이 며칠 되지 않아서 떠나려고 거짓 핑계를 대는 전화 통화를 목격한다. 하지만 부러 잡지 않는다. 원작자인 잉마르 베르만 감독은 하룻밤, 서로 속을 터놓은 정도로는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한 걸까? 상처 부위만 덧나고 만 것일까?
이브로 다시 태어난 에바
에바는 구약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의 라틴어식 이름이다. 에바는 샬롯과의 짧은 만남 이후, 자신의 숙명처럼 따라 붙은 이름의 기표(記表)와 기의(記意)의 일치를 이룬다. 극 마지막에서 에바가 어머니에게 쓴 화해의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읽는 목소리는 에바, 추상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읽는 화자인 샬롯, 손숙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닌 것이, 이후 관계는 샬롯의 태도에 달렸겠지만 연극이 이 지점에서 끝나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샬롯은 에바의 편지를 읽지 않고 태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비슷한 듯 다른 목소리로 들리는 내레이션은 에바가 이브처럼 비로소 다시 태어났다는 반증으로 들린다. 샬롯을 만난 이후 에바는 이전의 에바와 분명 다른 인물이다. 그래서 더 이상 샬롯을 억지로 잡아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해자가 세상을 떠났든 아직 살아 있든 어린아이를 고문했던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아직도 파괴적인 힘을 그대로 갖고 있는 가해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옛 피해자가 기억과 의식 그리고 무의식에 담고 있는 그이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 가해자이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엄청난 힘을 갖는 망령인 것이다.
- 가브리엘 뤼벵의 심리학 저서 '증오의 기술' 중에서
편지를 읽는 목소리는 어쩌면 내내 신음소리만 내던 엘레나, 이태린의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연극적 장치로만 처리한 부분이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녀의 발작 장애가 중증으로 치달은 결정적 계기가 어머니 샬롯에서 비롯되었던 과거를 떠올리면 그렇다는 것이다. 에바에 비해 엘레나는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이고 무의식적 해소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안정을 되찾은 에바의 변화는 엘레나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샬롯의 인생은 실패작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녀가 우리가 보통 평범하다고 말하는 삶과 다른 삶을 살았고, 또 앞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가을 소나타, 그리고 봄
주로 중년 관객들이 객석을 채운다는 기사를 봤고, 극장에서 둘러봐도 반 이상이 중년이다. 그중 친구끼리 온 주부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그녀들은 에바와 샬롯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라면 화려한 예술가를 고집하는 샬롯의 선택이 오히려 회피로 보이고, 갑갑해 보이는 에바의 삶이 도전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가을 소나타의 운율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기교로만 판단할 게 아니다. 가을 소나타 이후 에바에게 닥칠 겨울은 혹독하겠으나, 이내 찾아올 봄은 이전과 다른 환희일 것이다. 에바처럼 성찰이 오롯이 외형이 아닌 내면의 몫이라면 딸, 아내, 어머니로 사는 주부 관객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극장 무대를 채우는 건 배우 머릿수가 아니라는 걸, 작년 9월 같은 무대에서 명배우 장두이, 이봉규의 연극 <등대>를 본 이후에 새삼스레 다시 깨닫는다. 수컷내 진동했던 무대에 소나타가 울려 퍼지는 기분도 꽤 근사하다. 무리하지 않고 연극을 받쳐준 박경근, 이태린에게 다시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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