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The Story of My Life
기간 : 2010.07.13(화) ~ 2010.09.19(일)
장소 :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출연 : 류정한, 신성록- 토마스 위버 / 이석준, 이창용 - 앨빈 켈비
대본 : 브라이언 힐
작사·작곡 : 닐 바트램
연출 : 신춘수
토마스 : 죽으면 좋은 얘기만 해주네.
앨 빈 : 그게 송덕문이라는 거야. 야! 네가 내 꺼 써줄래? 나도 네 꺼 써줄게!
토마스 : 그게 가능해?
앨 빈 : 어, 그러네. 아! 남은 사람이 하기! 약속?
토마스 : 약속하면 가도 돼?
앨 빈 : 어.
토마스 : 좋아. 약속.
시지프스의 형벌
무대 위에서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보면 시지프스가 처한 영겁(永劫)의 형벌이 떠오른다. 매일 같은 시간, 좁든 넓든 감옥 같은 무대에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해 어제했던 행동과 말을 그대로 해야 한다니.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시지프스가 바위산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져 제 자리로 돌아간 바위를 보면서 숨을 고르고 힘을 모으듯이, 배우들이 무대 위 2시간 남짓을 제외한 시간 역시 다음날 무대를 위해 힘을 고르고 조율을 하는 시간이다.
지루한 반복은 방심을 낳기 마련이지만 밀어 올리는 바위에 깔리지 않으려면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시지프스를 감시하기 위해 바위산 주위를 선회하는 제우스의 독수리처럼 싸늘한 관객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연극이 끝난 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처럼 변한 관객들의 혹평이 달린 댓글에 술로 간을 달래다가 정말 쪼그라들지도 모를 일이다.
신을 속인 시지프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인간 가운데 가장 교활한 인물로 소개된다. 그리고 시지프스의 신을 속이는 그 교활함이란 두 시간 남짓,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야 하는 배우들의 첫 번째 덕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진짜 삶도 아닌 가짜 인생을 연기하지 못했다고 욕을 먹는 삶이라니! 부조리(문자적인 의미에서)한 일로 바보 취급을 당한 다음 날, 무대를 바라보면서 드는 마음이란 다시 바위가 덩그러니 놓인 바위산 초입을 바라보는 시지프스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나 카뮈가 부조리(철학적 개념으로)를 피하지 않고 맞서는 인물로 시지프스를 재해석해서 찬양하듯이, 빈 무대를 매일 채우고 허무는 일을 반복하는 연극인들이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보여주는 첨병이자 선지자이다. 카뮈의 입을 빌어 시지프스의 부조리를 들여다보기처럼, 배우들의 연기를 빌어 관객들은 (부조리극 논리에 가깝지만) 부조리한 세상을 본다.
시지프스들의 무대
무대극이 황홀한 이유는, 너무 감상적인 비유이지만, 필름으로 녹음을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주지 못하는 찰라의 감응에 있다. 다시 말해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과정을 담아서 스크린이 쏜다고 한들, 형벌도 아니고, 부조리에 맞서는 건 더더욱 아닌 상황과 동일하다. 시지프스의 바위에 긁힌 상처에서 피가 멎고 아물어서 흉터로 남는 과정을 지켜보듯이 가상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들의 펄떡펄떡 뛰는 잔치이다.
역으로 시지프스에게 카뮈가 필요했듯이 연극인들에게는 관객들이 필요하다. 객석에 텅 빈 무대 위 배우들의 노력은 부질없는 행위로 돌아가고 만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가짜 인생이라니 얼마나 끔찍할까, 시지프스의 고통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시지프스가 책 한권으로 교활한 죄인에서 이제 실존주의의 상징으로 되살아났듯이 배우들은 꽉 찬 객석을 통해 비루한 가짜 인생을 모방하는 광대가 아닌 비의(秘儀)를 행하는 주술사로 거듭난다.
어두운 무대 조명 너머로 비에 촉촉하게 젖은 관객, 혹은 허겁지겁 달려와 팸플릿으로 부채질을 하는 관객의 제각각 인생은 세상과 단절된 동굴 같은 무대 위로 현실의 기운을 밀어 올린다. 관객들의 눈빛이 배우들에게 지루한 일상이 아닌 새로운 사건을 만든다.
관객이 없는 무대라니,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두 주인공, 앨빈과 토마스가 어린 시절 몰래 숨어든 한밤중의 아무도 없는 장례식처럼 무시무시하지 않는가. 다행히도 앨빈과 토마스가 평생에 남을 약속, 송덕문을 쓰기로 약속을 하는 그 중요한 순간, 그 앞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고독한 시지프스
앨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향으로 앨빈과의 어린 시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토마스는 앨빈에 대한 송덕문을 쓰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앨빈과 얽힌 추억을 되살리는 회고담을 쓰는 과정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라는 간결한 제목처럼 토마스가 자신의 삶을 복기하고 되짚어보는 긴 여정이다. 앨빈과 토마스 역의 배우가 각각 등장하는 2인극이지만 극중 현실에서 토마스의 상상으로만 가능한 앨빈은 토마스가 재편집한 앨빈, 결국 토마스의 거울보기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2인극의 형식을 띤 1인극이고, 독백극이자 고백극이고 2시간을 홀로 무대에서 견디어 내야 하는 고독한 시지프스이다. 그래서 장하는 말이 아니고,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토마스가 무대로 불러낸 앨빈은 진짜 앨빈일까, 아니 앨빈은 과연 있기나 했던 존재인가. 그러니까 시지프스가 올렸다고 말하는,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바위는 실제로 있었던 걸까. 극중 유령, 혹은 앨빈이 좋아하는 영화 ‘멋진 인생’의 주인공 천사 클라렌스처럼 천사인 앨빈이 토마스가 짜깁기하는 엉뚱한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나 사실 죽은 게 아냐. 이렇게 살아 있어”라고 부활극을 펼치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다.
아무려나 토마스가 회상하고 상상하는 과정인 ‘나의 삶 이야기’의 주체가 토마스라는 건 확실하다. 송덕문의 주체가 앨빈이긴 하지만 토마스가 같이 공유한 경험이니, 곧 토마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타자를 참아내는 능력이라도 길러야 한다.’ 평생 인간 해설서인 소설을 써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작가 괴테마저도 한 고백이다. 섣불리 이해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잊지 말라는 조언이다. 친구 사이가 다 그렇지만 토마스와 앨빈 사이도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앨빈이 죽기 얼마 전, 최근에 갈등이 가장 심했을 것이다. 토마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도시로 떠난 뒤, 고향에서 가업을 물려받아 서점을 운영했던 앨빈과 뉴욕에서 성공한 소설가로 성장한 자신 사이 그 먼 거리만큼이나 다른 관습과 방식에 따라 세상을 살아온 이상, 그의 기억 속 30대 후반의 앨빈은 부담스럽고 생경하다. 그러니 송덕문을 쓰는 과정이 쉽지 않다. 극 초반 무대 위에는 흐릿한 앨빈이 구겨버린 파지가 되어 자꾸만 나뒹군다.
근래 토마스의 인간관계를 보면 가장 친한 앨빈마저도 도망치고 싶은 애인이나 독촉전화를 걸어대는 편집자나 불편한 질문을 해대는 기자와 다르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서로 이해만 강요하는 세상에서는 이해보다 단절이 손쉬운 해결책이다. 작가들이 다 그런 성격인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작가 범주에 속하는 토마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으로 보건대, ‘타자를 참아내는’ 능력을 키우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니 토마스는 관에 누워 있는 최근의 앨빈이 아닌 기억 속 어린 시절 앨빈을 부른다. 자살한 친구의 장례식에 와서 그 원인과 결과를 두고 고민하거나 괴로워하는 대신 과거로 떠나는 선택은 이채로운 대목이다.
오해가 오해를 부르는 피상적인 사회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던 그 때로, 어린 시절 둘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낡은 책장과 먼지 쌓인 책으로 표현한 기억 속 앨빈 가문의 헌책방처럼 보이는 배경은 곧 토마스의 복잡한 머릿속, 즉 무의식의 깊은 층위이기도 하다. 서점이라고 하기에는 어수선하고 서재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앨빈이 찾아내는 토마스의 얘기들은 책으로 제본된 형태가 아닌 구석마다 쌓인 정리 안 된 종이더미 형태를 하고 있다.
불가능한 약속의 실현
토마스가 불러낸 앨빈, 즉 토마스의 긍정적인 측면인 동시에 앨빈은 ‘그’는 토마스의 슬픔, 치욕, 망상, 분노 등 무의식 가운데 숨기고 싶은 기억들이 어지러이 쌓인 공간에서 족집게처럼 행복한 추억만 골라 찾아낸다. 아이러니하지만 토마스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앨빈은, 현실의 앨빈이 죽어서 부재한 상태, 즉 현실과 상상의 괴리감이 사라진 앨빈의 죽음 뒤에서야 100%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앨빈의 송덕문을 쓰기 위해 장례식에 와서 문제를 직시하는 대신, 과거로의 퇴행은 앨빈의 자살에서부터 도피하려는 이기적인 형태의 추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허나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상, 누구라도 해당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봐야 한다. 토마스가 현실의 앨빈을 간과하는 회피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도피라고 표현했지만 퇴행 과정은 “야! 네가 내 꺼 써줄래? 나도 네 꺼 써줄게!”라는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자 예언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이다. 이 연극에서 송덕문이란 관계의 생성, 유지 그리고 작품의 주제이기도 한 관계 회복을 위한 키워드이다. 어렸을 적, 장례식장에서 약속을 한 그 순간이 토마스의 꼬이고 꼬인 타자와의 관계를 초기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셈이다.
앨빈이 죽으면서 비로소 토마스 안에서 100% 어린 시절로 이끄는 기억 속 인물로 되살아난 앨빈이 토마스를 데리고 그때 그 장례식장으로 돌아간 순간 ‘내 인생의 이야기’의 주체는 개별자로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우리’라는 관계망 자체가 주체로 나선다. 작은 수첩 몇 장을 채우지 못해 골치를 싸매는 토마스는 사라지고, 무대와 객석으로 장편소설을 써도 됨직한 둘 만의 이야기가 수백 장의 원고지로 휘날리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휘날리는 종이는 시각적 장치로 앨빈의 어린 시절 추억과 자살 당시의 행적처럼 천사가 되고 싶었던 앨빈이 토마스 안에서 천사처럼 역할을 담당하면서 천사 클라렌스의 깃털처럼 보인다. 은유적 장치로는 연극을 올리는 주체(배우 외)와 연극을 보는 객체(관객) 사이의, 즉 토마스와 앨빈 사이 관계 회복처럼 낯선 공간 낯선 만남의 경계를 흩트리면서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바뀌는 연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배우와 관객, 멀고도 가까운
이런 식의 마무리는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한 신춘수 오디뮤지컬컴퍼니 대표의 “관객에게 인생의 쉼표 같은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연출로서의 바람이 더 큽니다”라는 당부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리뷰란 막이 꺼진 뒤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당시 연극에 대한 송덕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극 밖에서 토마스 역할을 이어받는 셈이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앨빈과 토마스의 관계를 관객과 배우 사이의 관계를 담은 메타 연극이라고 해석한다면, 두 친구 사이의 우정을 다룬 소소하고 다소 심심해 보이는 이야기가 다층 구조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은유를 담은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이런 재해석은 관객의 시선에서 앨빈과 토마스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극 내내 토마스의 상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앨빈, 즉 토마스의 진술로 듣고 보는 앨빈이 과연 자살했다는 그 앨빈인지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그냥 토마스의 착각에 동참해서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게 아닌가?
추억담을 통해 우정을 확인하는 어렵지 않은 해피엔딩 극이지만, 보고나면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앨빈은 왜 자살을 했는가?”이다. 죽는 장면을 보여주지도 않고, 유서를 남기지 않은 이상 이유를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토마스의 입을 통해 들은 원인에 가까운 진술이라면, 앨빈이 죽기 얼마 전, 평생을 고향 작은 서점에서만 살아온 앨빈을 도시로 불러놓고는 직전에 거절했던 일이다.
토마스가 앨빈한테 한 행동은 친구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인생에 대한 좌절로 얼마든지 자살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토마스는 뻔뻔스럽게도 그 일을 두고, 당시 애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둥, 앨빈을 책임져야 하는 자체가 부담스러웠다는 둥 변명을 늘어놓는다. 사과를 한다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 없이 면죄부를 쥐어줄, 그리고 어쩌면 새 소설 감이 될 만한 송덕문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무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배우를 두고 시지프스의 형벌이라고 했듯이, 앨빈은 고향집 작은 책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손님마다 각각 맞는 책이 있다’는 믿음으로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견뎠는데, 이 진술을 연극과 관객의 관계로 보면 ‘좋은 연극을 올리면 관객이 든다’는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극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앨빈을 죽음으로 내몬 건, 극장을 텅 빈 무대로 이끈 관객들의 외면과 무관심이다. 찍은 후에 평가를 받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배우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빈 객석은 배우들이 매일매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천형, 시지프스의 바위이다.
토마스는 누구인가?
2인극을 빗댄 1인극을 펼치는 토마스의 행태는 심리학 관점에서 흥미로운 주제이다. 토마스가 자살한 친구를 두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객체가 없이 자가 분열하여 화해를 하는 과정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와 흡사하다. 이 둘은 같은 뿌리를 둔 다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완벽한 다중인격을 다룬 정신분열극이다. (물론 둘 사이 경계를 두자면 노먼이 훨씬 중증이다. 토마스가 앨빈의 시체를 그대로 둔 채로 상상에서 벌이는 대신, 노먼은 어머니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자가 분열을 넘어선 지독한 감정이입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몇 가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지만,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스릴러가 아니고, 비극도 아닌 결말인 이유가 뭘까. 다시 말해, 어린 시절 앨빈을 세세하게 끄집어내면서도 며칠 전 앨빈에 대해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토마스의 이해하지 못할 몇몇 행동을 두고, 이렇다 할 메스를 들이대지 않고 판단 유보로 시치미를 떼고 해피엔딩으로 몰고 가는 이유가 뭘까.
메타 연극 관점에서 앨빈을 연극 자체로 토마스를 관객으로 해석하면 배우에게 관객이란 연극을 같이 완성하는, 즉 송덕문을 같이 쓰는 친구지만 관객이란 같은 극장 안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무엇 하나 단정 지을 수 없는 다형성(多形性)을 보이는 이해불가한 존재(들)이다. 작품을 철저히 무시할 수도, 토마스처럼 다시 복기할 수도, 노먼처럼 미친 듯이 집착할 수도 있다. 토마스의 태도를 두고 죽은 앨빈이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듯이, 제작자 입장에서 관객의 반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그저 앨빈이 열심히 살았듯이, 열심히 만드는 길 뿐이다.
연극이 보여주는 거대한 무늬
그렇다고 이 작품의 해피엔딩이 관객에게 아양을 떤다거나 막연한 희망 사항을 드러냈다고 보지는 않는다. 연극 형식이 고대 그리스 연극의 형태를 유지해온 역사에서 보듯이, 메타 연극으로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관객의 반응이라는 통제 불가의 다형성이 결국 긍정적인 프랙털(fractal)을 형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대와 객석 사이 팽팽한 긴장과 교류가 짜낸 무늬를 보며 순간의 예술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간의 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연극이 다른 누구의 삶을 나의 삶인 듯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건 확실하다.
앨빈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친구 토마스가 직접 쓴 송덕문이 아닌 “서점 주인에게 분이 넘치는” 유명 시인의 작품을 인용했을 때 보여준 실망 역시, 좁게는 작품을 같이 완성시켜야 할 관객들이 고민 없이 몇몇 평론가의 말에 휘둘려서 선입견을 갖는 태도에 대한 실망이자, 넓게는 헌사 한 마디 해줄 내용 없이 남의 얘기를 차용하듯이 남의 뒤만 좆는 인생에 대한 실망일 것이다.
그 외 몇 가지 단상들
솔직히 메타 연극으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친구의 주검을 두고 자신의 고민에만 빠져 있는 토마스가 좀 낯설다. 친구의 죽음이란, 더욱이 자살 혹은 비슷한 이유로 세상을 등진 친구의 죽음을 앞에 둔 심정이란 그저 도저히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어서 장례식을 진행하는 내내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말이다. 송덕문이라,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이 우리와 캐나다 작가 사이 정서의 차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한편으로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파고들수록 생경해지는 작품이다.
그래서 아일랜드 시골마을 레이트림이 배경인 코너 맥퍼슨의 <둑 The weir>을 강원도 강릉 어디쯤으로 옮겨서 강원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등 한국식 정서로 소화한 극단 차이무의 <거기>처럼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한국식으로 풀어내면 어떨까. 우리 정서에 친구 사이에서 송덕문(頌德文)은 아무래도 낯설고, 익숙지 않은 절차이다. 원작과 전혀 다른 형태의 작업이 될지 모르지만, 뭔가 짠한 작품으로 태어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더블 캐스팅인 이 작품을 토마스와 앨빈 역을 달리해서 두 번 봤다. 이창용 앨빈이 토마스가 트라우마를 애써 피해하기 위해 보다 천진난만하게 상상한 앨빈이라면, 이석준 앨빈은 이창용보다는 현실에 좀 더 가까운 앨빈이다. 토마스가 앨빈의 죽음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기, 즉 극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잘 어울리는 앨빈이다. 두 배우 사이 외모에서 드러나는 나이 차 때문은 아니고, 이석준의 연기에서는 인생의 여문 부분이 묻어난다.
이 작품이 토마스의 1인극인 만큼, 모델 출신의 키 크고 잘생긴 신성록은 토마스로의 상상에서 세상이 바라봐주길 원하는 모습에 가까운 배우이다. 동시에 자신의 소설이 보다 고뇌를 담은 수준 높은 작품임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라는 면에서는 지식인다운 면모를 드러내는 류정한이 어울린다.
메타 연극 운운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토마스는 역시 친구의 부재가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우리가 들여다본 토마스의 머릿속은 토마스가 외로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애처로움이다. 어쩌면 그는 앨빈의 부재로 고뇌하는 내내,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토마스가 굴리는 바위가 언제 멈출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너무 토마스를 정신병자로만 몰아붙인 듯하다. 소년들의 약속, 앨빈 입장에서 자신을 위한 송덕문은 토마스가 앨빈과의 추억을 바탕으로 삼은 소설을 통해 이미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앨빈이라 지칭하지 않더라도 1인칭 화자로 혹은 3인칭의 등장인물 중 누군가로 내내 등장했을 것이다. 서점을 지키면서 토마스가 쓴 송덕문을 독자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읽으면서 어쩌면 지루했을 일상, 어린 시절의 상상력이 풍부한 앨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을 견디었던 게 아닐까.
40줄 가까운 나이에 어린 시절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살을 한다는 건, 사회 속념으로 어이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토마스의 소설을 읽을수록 어린 시절의 꿈과 점점 괴리감에 빠진(혹은 빠졌을지도 모를) 모습으로 변하는 자신을 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렇게 베스트셀러가 된 토마스의 소설처럼 살다가 떠난 앨빈은 세상 누구 못지않게 널리 알려진 송덕문으로 남았다.*
사진출처 - 오픈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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