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피나 바우쉬 부퍼탈 탄츠테아터 <카페 뮐러> & <봄의 제전>
일시 : 2010년 3월18(목)~21(일)
장소 : LG아트센터
안무 : 피나 바우쉬(Pina Bausch)
출연 : 피나 바우쉬 부퍼탈 탄츠테아터(Pina Bausch Wuppertal Tanztheater)
2005년 6월
피나 바우쉬(1940~2009)가 세계의 도시를 다니면서 받은 영감에서 태어난 도시 연작의 13번째 작품 <러프 컷Rough Cut>. 피나 바우쉬와 부퍼탈 탄츠테아터 무용수들이 2004년 LG아트센터에서 10억 원을 지원받아 두 주 동안 한국을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러프컷>은 지원을 해서 만든 작품인데 대한민국을 제대로 드러냈는가, 를 두고 논란을 불렀으나, 동시에 피나 바우쉬는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예술 명예홍보대사’로 위촉을 받기도 했다.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이기에 우리 눈에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가령, 등목 장면을 성차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 여성 무용수가 남성의 몸을 씻겨주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의 오랜 피서법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장선희 세종대 무용 교수의 <러프컷> 지적은 타당하다. <러프컷>이 다른 도시 연작에 비해 뛰어났으면, 혹은 한국 관객들의 취향에 잘 맞았으면 하는 바람 역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다소간의 실망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 극과 극의 두 가지 양태는 아무려나 그녀를 우리 안에 재단하려는 혐의가 보인다. <러프컷>은 그 제목처럼 가편집이라 그런지, 거의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홍보대사 위촉이 좀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피나 바우쉬와 한국의 특별한 인연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새라면 여러분은 나를 독일 새라고 부르시겠어요?” 피나 바우쉬는 자신을 독일 작가로 규정짓고 해석하는 자국의 평론가들에게도 자신은 독일 예술가가 아니라 세계의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등목을 한국의 성차별적인 상황을 무대에서 탄츠테아터 방식으로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 연출 방식으로 이해했거나, 더 나아가 관습으로 굳은 피서법이 성차별적인 데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뭐, 등목에 대한 그녀의 시선을 세계적인 해석이라 확정짓거나 이해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듯 낯선 <러프컷>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형식에서 기존의 무용을 이해하는 방식과 달리해야 하고, 내용에서도 눈으로 보이는 모습 이면의 좀 더 깊숙한 지점을 보도록 요구한다는 점이다. <러프컷>이 좀 더 부연을 해주었을 뿐, 피나 바우쉬의 삶을 보면 익히 그 근거가 분명하다.
그녀는 고전 발레의 권위와 테크닉에 반발하여 현대무용(Tanz)과 실험극(Theater)을 혼합한 새로운 무용 형식으로 춤,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탈장르 양식인 탄츠테아터(Tanztheater)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3년 부퍼탈 시립 무용단 예술 감독을 맡은 33살의 피나 바우쉬는 고전 발레에 익숙한 관객들의 비난, 오케스트라 단원과 무용수들의 반기에도 소신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지금, 독일의 작은 소도시에 세계 각국 무용수들이 참여하고, 세계의 현대무용을 주도하는 ‘부퍼탈 탄츠테아터’가 탄생했다.
작품을 보기에 앞서 한 가지 더 염두에 둘 점은 그녀가 ‘제 1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정치적 위기의식, 사회적인 모순, 불안감과 같은 강박관념으로부터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짖었으며, 자본주의, 물질주의, 기계문명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 폭발적인 사조’인 독일 표현주의에 기반을 둔 매우 뛰어난 계승자라다는 점이다.
<러프컷>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진 몇 가지 해프닝은 예술적 가치 위에 경제적인 가치가, 그리고 그 위에 정치적 가치가 지배하는 현실을 밖으로 드러난 사례로 작품이 나름 미학적인 가치를 넘어서 또 다른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6월
“시골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버릇처럼 하신 말씀, '죽으면 다 썩어 없어질 몸, 아껴서 무엇 하나'였습니다. 각자 자기 앞에 주어진 삶 속에서 완전 연소하시기를 바랍니다. 완전 연소하지 못한 자동차에서 시커먼 매연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식당종업원, 생선가게, 보석가게, 신문팔이, 술집 지배인, 목수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몸으로 대한민국을 살아낸 노동자 시인 유용주가 몇 년 전에 인터뷰로 남긴 당부는 피나 바우쉬의 삶을 예언한 듯하다. 완전연소. 피나 바우쉬는 작년 6월 30일, 암 진단을 받은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68세의 그녀는 2주 전까지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 무대 위에 섰었고, LG아트센터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올해 3월에 <카페 뮐러> 무대에 직접 설 예정이었다.
유용주 시인은 피나 바우쉬의 자취가 아직 짙게 남은 <카페 뮐러>, <봄의 제전>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얼굴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느냐에 더 관심이 간다.” 그녀의 삶을 응축한 이 문장에, 내가 알기로는 유용주가 가장 적합하다.
유용주 시인이 풀어내는 글 매무새는 갈이를 막 마친 밭처럼 서정적이고 유하고 부드럽다. 소통 불능의 시대의 소통 방식으로 거칠고 고단한 삶 위에 연꽃처럼 피어난 시는 ‘2차 세계 대전의 전쟁의 상처를 먹고 피어난 꽃, 자신의 상처, 고통, 아픔을 오히려 사랑으로, 인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상에 돌려준 무용가’라는 평가를 받는 피나 바우쉬의 공연과 하나의 맥을 형성한 듯 보인다.
2010년 3월
그녀가 서기로 했던 <카페 뭘러>(1978년 초연)와 <봄의 제전)(1975년 초연)을 그녀 없이 봤다. 그녀가 떠난 지 1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애도의 의미가 짙게 깔려 있어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한 달 즈음이 지난 지금, 그녀가 완전연소를 했던 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그녀가 영면한 이후 그녀의 충실한 삶이 에너지를 유지한 채로 이어지는 무대를 나 역시 내 삶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평생 동안 자기 앙상블의 공연을 놓친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25년이 지난 뒤에도 무엇 때문에 매번 공연 때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지는 그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이 부적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 작품, 앙상블, 나, 이것들은 모두 다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거기 있을 수밖에요. 다른 사람들은 무대 위에 있지요.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그렇듯 바라보지요. 왠지는 몰라도 나는 그것이 내가 공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요헨 슈미트의 책 ‘피나 바우쉬 (두려움에 맞선 춤사위)’ 중에서
무대 뒤나 어두운 객석 어디쯤 혹은 내 눈에 닿지 않은 곳에서 이번 공연 역시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날레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배우들의 시선은 관객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했다. 그들이 보는 어딘가에 피나 바우쉬가 있지 않았다면 그런 슬픈 표정을 지었을 리가 없다.
아마도 1950년 즈음
<카페 뮐러>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무용수에게 투명한 벽이, 질서정연하게 놓인 테이블과 의자가, 돌아가는 회전문까지도 지독한 장해물이다. 카페를 배경으로 차용한 평범한 오브제는 내가 지금 있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가 제약으로 가득 찬 감옥 같은 공간일 수 있다는 낯선 세계와의 조우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부모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성향의 작품이라고 한다.
적어도 그녀에게 뮐러 식당은 추억이 아니다. 무대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상이라기엔 추상적이고 복잡하다. 그리고 그녀가 일흔을 앞두고 직접 섰을지 모를 역할은 지금, 여기, 이 순간, 그녀 자신을 주체로 삼는다. 그녀가 맡기로 한 역할이 나이든 노파 역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존을 뒤덮은 현실과의 대결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늙고 힘없는 노인에게 끝임 없이 부딪힘을 강요하는, 눈이 먼 게 아니라 눈을 감도록 강요당한 현실은 그녀가 어렸을 때 겪은 현실과 일치하고 이 싸움은 그녀의 평생을 통해 끝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40년생인 그녀는 패전 이후 혼란으로 가득 찬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카페는 혼란이 갖은 양상으로 변형되고 튀어나오는 공간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전쟁이 가져온 암울하고 비극적인 현실은, 더욱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지울 수 없는 굴레를 쓴 독일 민족에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회한은, 어린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엄연한 존재했던 현실이다.
굴러가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기만과 오욕과 왜곡의 시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반성은 당시 피나 바우쉬를 비롯한 당시 독일 아이들의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카페 뮐러>가 패전 이후 독일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다. 흔한 표현을 들자면 알을 깨고 나올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적어도 깨닫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명제를 <카페 뮐러>에서 제기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만족하면서 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렇다면 실체가 아닐 지도 모를 혐의를 가진 현실을 외면하는 선택이 과연 주체에 따른 자신일까. 마치 머리를 땅에 처박고 숨는 타조처럼?
1979년 2월
고대 러시아 이교도 부족의 산 제물로 처녀를 태양신에게 바치는 제의를 표현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피나 바우쉬 버전(1913년, 나진스키 버전 이후 다양한 안무가들의 수백 개가 넘는 버전이 있다)은 1979년 2월에 이어 31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선보이는 작품이다. 제물로 선택 받은 여성 무용수가 한쪽 가슴을 드러내는 장면을 두고, 당시 한국 관객들이 보인 반응은 보수적인 발레 미학에 익숙한 부퍼탈 관객들이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10.26사태로 오롯이 기억에 남은 1979년, 박정희 독재 정권 말기였던 당시 상황은<카페 뮐러>의 배경과 높은 싱크로율을 엿보인다. 1979년에 아이들은 그해 개봉한 <간첩 잡는 똘이 장군>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갔다. 그렇다면 나 역시 <카페 뮐러>의 아이들이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그린 괴수, 늑대, 여우로 그린 반공 포스터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폭력이었는가, 교훈으로 삼고 있다.
2010년 <봄의 제전>을 보면서 1979년에 ‘가슴을 드러내는 연출로 보수적인 한국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한 문장의 평가 너머가 떠오른다. 동시대 히피족의 성적 해방을 들지 않더라도 성에 대한 통제는 사회 권력 유지하기 위한 손쉬운 선택이다. 허나 그 은밀한 욕망이 엿보인다. 보수적으로 봤거나, 보수적으로 본 양 강요하는 사회였다는 또 하나의 고리를 찾은 셈이다. 가슴 노출을 무덤덤하게 보는 게 보수, 진보를 나누는 기준일 수는 없다. 다만 ‘무참히 희생되는 피조물의 무방비성의 극대화’ 혹은 ‘여성의 가혹한 운명에 대해 관객이 일종의 죄책감’을 드러낸다는 원론적으로 붙는 해설마저 외면하고 단순히 노출 에 따른 평가라는 면에서 그렇다.
음악, 소품, 조명, 무대의 절제. 그리로 피나 바우쉬의 의지에 충실한 듯한, 인간의 몸을 통한 재현에 충실한 2010년 <봄의 제전>은 배우들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내내 얇은 옷 위로 혹은 사이로 가리지 않은 가슴이 드러낸다. 허나 성적 호기심이나 미추로 구별 지을 수 없는 에너지가 충만하다. 동양, 동남아,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다국적 배우들이 식물이 썩어서 묵은 대지인 검붉은 토탄을 깔고 그 위에서 펼치는 연기는 지구와 인류의 관계를 상징하듯이 보이기도 한다.
뛰고 달리고 뒹구는 내내 땀으로 젖은 몸뚱이와 옷은 점점 검붉게 변한다. 대지와의 호흡 혹은 순환에 대한 순응이나 생명에 대한 찬양이 아닌 저항하는 몸부림이다. 착각일 수도 있으나 붉은 드레스의 그녀가 드러낸 가슴은 순환을 상징하는 모성애를 불러오기보다는 반작용으로 단련한 단단한 가슴처럼,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실존에 대한 확증은 저항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은, 그리고 가슴을 드러내는 장면은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시대 반발로 읽혀야 한다.
2010년 5월
1979년은 과거, 2010년 3월 <봄의 제전>에서 표현하는 시시포스의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가. 시대를 두고도 입방아를 찧으려면 찧겠으나, 객석에 점잖게 앉아 있는 듯해도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은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만성적인 무기력에 시달리는 나부터 돌아보게 한다. 난 극이 끝난 뒤에도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반라의 배우들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작용과 반작용처럼 내 가슴이 더불어 부풀어 올랐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카페 뮐러>에서 피나 바우쉬와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따라 같은 무대에서 같이 혹은 따로 거울처럼 마주보며 작업을 해왔을 비슷한 연배의 무용수가 무대에서 생생하게 표현하는 ‘피나 바우쉬’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예술혼이라도 해도 좋을 텐데, 적어도 두려워한다고 피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면 죽음을 생애를 통틀어 무기력한 핑계로 내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지금 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짙은 혐의를 던지도록 요구한다.
혐의는 반작용을 위한 시동 걸기이다. 자의적인 해석에 이유를 붙이자면,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후인 작년 7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오페라 '7대 죄악'을 모스크바의 체호프 국제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 이론, 낯설게 하기(Verfremdung) 역시 감정 이입에 따른 몰입이 아닌 관객의 이성적 결단을 끌어내 현실을 직시하는 연극을 추구하는 작가로 피나 바우쉬의 조우하는 지점이다.*
죽음은 더 이상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내게 형언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을 안겨준다. 피나는 그토록 강한 영감을 지닌, 마치 등대와도 같은 존재여서 우리는 모두 그녀의 어린 아이들과 같았다. 이제 갑자기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 스스로 현실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는 뒤에 남은 우리 모두에게는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피나 바우쉬는 경이로운 작품과 무한한 영감, 그리고 인간의 갈등, 감정, 삶을 반영하는 무용적 상상력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 우리의 기억, 우리의 몸과 움직임 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춤 출 것이다.
-‘아웃 오브 콘텍스트 - 피나 바우쉬를 위하여Out of Context for Pina( 4월 2일~3일, 구로아트벨리 예술극장)’를 올린 벨기에 세드라베(Les Ballets C de la B) 무용단의 안무가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
사진 출처 - LG아트센터(http://www.lgart.com/), 부퍼탈 탄츠테아터(www.pina-bausch.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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