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스페인연극> 스페인이건 불가리아건 대한민국이건

구보씨 2009. 12. 2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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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가끔, 별 것도 아닌데, 남이 한 얘기에 입은 작은 생채기가 10년이 지나도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얘기를 되새김질하는 자신이 참 좀스럽다는 자책을 하지만, 한편으로 괜히 떠올리는 바람에 덜 여문 딱지를 뗀 것 같아 열이 받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당장 생채기를 낸 당사자에게 화가 슬슬 끌어 오른단 말이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고, 그까짓 거 해보지만 그게 또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일상을 지배하는 건 사실 사회구조적인 문제보다는 요런 개인적, 심리적인 문제들이다. 20년 지기인 40대 세 친구의 미묘한 갈등과 해소를 다룬 연극 <아트>는 개인이 일상에서 턱턱 치받치는 문제들을 세밀하게 펼친 연극이다.


3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에서 공연 중인 <아트>는 명품 배우 이대현, 권해효, 조희봉 셋의 호흡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제 <아트>의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보다 농익은 작품 <스페인 연극>이 작년에 이어 다시 선을 보였다. <아트>가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 주목을 했다면, <스페인 연극>은 가족 사이 갈등이 주를 이룬다.


경쟁주의의 극을 달리는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옆으로 나란히 선 친구 관계를 제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친구로 지내다가 <아트>의 기계과 교수 김규태와 피부과 의사 최수현처럼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다, 연극의 결말과 다르게 아예 원수로 돌아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바, 어쩌면 <아트>의 희망적인 해결은 더 이상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친한 친구사이 마저도 열처리를 과하게 한 쇠처럼 뚝뚝 끊어지는 소통의 단절은 이제 일상이다.

 

 

스페인 연극

그렇다면 혈연으로 끈끈하게 묶인 가족은 어떨까? 친구 사이야 안 보면 그만이지만 안 볼 수도 없는 상황이면 아예 ‘지옥’이다. <스페인 연극>에서 가족 사이 갈등은 극중극으로 전개된다. 그러니까 가족의 갈등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극 속에서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작품이 <스페인 연극>인 셈이다. 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족 갈등에서 한발을 더 뒤로 빼고 보라고, 관객에게 요구하는 셈이다. 말 그대로 길 건너도 아닌 강 건너 불구경이랄까.


중간 중간 배우들이 방백 형식으로 극중극 <스페인 연극>의 연출자, 작가, 의상 담당자, 그리고 관객들과 터놓고 자신의 구구절절한 얘기를 늘어놓거나 불만을 토로한다. 이는 관객에게 극중극으로서의 <스페인 연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고, 냉정하게 상황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낸다. 하지만 극중극의 배우들의 자각은 단순히 서사극 이론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극은 <스페인 연극>을 연습하는 배우들의 삶을, 극중극은 <스페인 연극>을, 극중극의 극은 <스페인 연극>에서 큰딸이 연습하는 <불가리아 연극>이다. 세 층위로 나뉘어 있지만 한 가지, 연극이라는 공통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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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의 스페인 연극

극에서 배우들은 사소한 의상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고, 작가(스페인 젊은 작가 올로 파네로라고 전제한다.)에게 연습에 오지 말라고 윽박을 지른다. 연극과 관련된 제작과 무대 이면을 관객에게 일깨운다. 여기에서도 여유를 보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연출에게 잘 보이려는 배우가 있고, 시니컬한 배우가 있고 제각각이다.

 

극중극인 <스페인 연극>은 이혼녀 필라르가 연하의 페르낭을 만나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려고 첫 가족모임을 가졌지만, 배우인 두 딸의 다툼에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 큰딸 오렐리아보다 늦게 배우의 길로 들어선 둘째딸 누리아는 잘나가는 여배우가 되어 연말 시상식에 나갈 드레스를 고지만, 큰딸은 여전히 변두리 소극장에서 지루한 <불가리아 연극>나 올리는 처지다.


둘째딸은 언니에게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고, 안 그래도 열등감을 느끼는 큰딸은 거의 우울증의 극치를 넘어 쇼크 상태에 이른다. 알코올중독자인 큰 사위는 술독에 빠져 아내를 위로하기는커녕 “인간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이고, 자기만 아는 존재”이며 자기는 특히 “누굴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토로한다.


배우로 산다는 게 실제로 명과 암이 갈리고, 연극이 좋아서 하는 예술이라지만 그 안에는 평범한 누구나 마찬가지이듯 성공에 대한 열망,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성공한 둘째 딸이라고 고민이 없을 수는 없는 터이다. 세상살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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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연극 속의 불가리아 연극

<스페인 연극> 속에서 오렐리아가 연기하는 <불가리아 연극> 주인공 뷔르츠는 왜 자신이 피아노 실력이 형편없는 당신을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털어놓는다. 유부남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극의, 삼중극의 마지막, 오렐리아는 뷔르츠(극중 극중극)를 연기하면서 이별을 이야기한다.


이 역시 툭툭 끊어지는 쇠가락일 뿐일까. 이 작품은 말했듯이 연극배우들의 삶이 중심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으로 연극배우의 삶은 어쩌면 천형일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없는 삶이라고 토로하는 마리아노 역(극중극)을 맡은 배우(극)의 토로처럼.


“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이상해요. 난 그 사람이 배우라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요. 연출은 당신 자신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요, 라고 말하죠. 그런데 나 자신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죠? 배우라는 나 자신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죠? 그게 존재하기라도 하나요?”


연극이란 게, 단절을 이야기한다 해도, 결국 관객과 소통을 해야 ‘단절’이 가능하다. 이 연극이 단절을 말하려는 게 아니기도 하거나 관객이 부러 작품을 외면하려고 어둠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이 얘기하려는 건 고통스런 과정의 공유를 통한 치유 혹은 위안이다.


오렐리아의 이별은, 번역자에 따르면 “슬픔은 기쁨의 서곡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연극이 정신질환 치료의 한 방식으로 쓰이는 경우를 본다. 삼층의 구조에서 연극배우들의 외로움과 자아 상실이 드러난다. 그게 곧 세상살이이겠으나, 연출 백은아의 말처럼 “어느덧 연극의 의미는 바래지고, 이제 연극이 곧 삶이 된” 그들이고 보면 <스페인연극>에서 포커스를 어디에 두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연극무대를 떠날 수 없는 건, 역시나 연극이라는 방식이 삶에서 가장 열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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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밖의 연극, 그러니까 인생

관객이 좁은 공간에서 배우들의 몰입에 동참해서 휘말리는 1시간 30분 내내,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물론, 그 단서가 새로운 나를 찾는 길로 바로 인도한다나 하는 식의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연극이든 책이든 각자 알아서 단서를 하나씩 하나씩 줍다보면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뭐, 희망사항이다. 무대 뒤에 걸린 그림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극에 좀 더 몰두하지 못한 내 스스로가 좀 아쉽다. 나처럼 무지한 관객을 위해 팸플릿에라도 소개를 했으면 좋겠다.


5명의 배우들 모두 멋진 연기를 펼치지만 역할에서는 오렐리아가 백미였고, 배우 중에서는 어머니 필라르 역을 맡은 원미원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처럼 나이 지긋할 때까지 연극 무대를 빛낼 수 있으려면 분명 연극에 대한 애정은 물론, 자신에 대한 노력, 삶에 대한 통찰이 있고서야 가능했을 것이다. 원로 배우 중 여성 배우가 드문 현실에서는 그녀의 소극장 열연이 특히 감회가 새롭다.*

 

사진출처 - 극단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