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기동 체육관
일시 : 2009.10.09(금) ~ 2009.12.26(토)
장소 : 소극장 모시는사람들
작, 연출 : 손효원
출연 : 김정호(관장 이기동 역), 차명욱(코치 마인해 역), 강지원(딸 이연희 역), 강혜연(관원 탁지선 역), 조정환(관원 서봉수 역), 문상희(관원 정애숙 역), 신문성(관원 강근당 역)
제작 : 극단 모시는사람들
한때 살 빼는데, 복싱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한때 체육관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파나마의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이 은퇴한 뒤, 엄청나게 살이 찐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바로 접어 버렸다. 평생 할 운동도 아닌데, 괜히 후폭풍이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이 후덕한 아저씨로 돌아온 모습이라니! 게다가 살이 피둥피둥 오른 모습이 링 밖의 모습, 실체라고 생각했다. 이래저래 두란에게도 복싱에도 실망을 했다.
그때 체육관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돌아보면 내 인생의 링에서 난 여태 삼 라운드짜리 한계인 맛보기용 선수쯤이지 싶다. 뭔가, 치고 나가야할 때마다 멈춘 듯한 느낌, 삼 라운드 이상은 아예 꿈도 못 꾸고 멈춘 인생. 뭐, 나만 하는 생각은 아니고, 술 한 잔씩 들어가면 주위에서 엇비슷하게 하는 얘기다.
‘복싱은 마음가짐만잇으면 전부다 다니실수잇습니다.’
인터넷 본 동네 복싱체육관 질의응답이다. 맞춤법, 띄어쓰기 무엇하나 제대로가 아니지만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는 글이 이것저것 묻든 사람들의 질문을 한 방 카운터펀치로 대답했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이기동체육관>의 관장, 펀치드렁크로 고생하는 이기동 관장님(김정호 분)이 쓴 대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마음가짐만 있으면 가능할까. 다닐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는? 마음가짐만으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어려서 친구 따라갔던 피라미드 교육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을 때도 실소를 피식피식 던졌는데, 중늙은이가 된 지금은 더욱이 소 닭 보듯, 닭 울음 듣듯 하고 만다.
땀에 절기로는 연극무대가 링 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복싱도장으로 꾸민 소극장 모시는사람들은 이대로 체육관으로 사용해도 좋겠다 싶게, 복싱도장을 꾸며 놨다. 낡고 허름하지만 손때 묻은 링 앞에 객석에서 실제 복싱 경기보다 더욱 진한 복싱선수, 아니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기동 체육관>의 장점은 역시 마음 따뜻한 그들의 캐릭터가 잘 살아 있어서 운동 열기보다 인간미가 극장을 훈훈하게 데운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의 삶이라는 게 세상살이에서 늘 얻어맞거나 주눅을 든 채로 사는 샌드백 인생이지만 말이다.
술을 입에 달고 사는 마인하(차명욱 분) 코치는 복서로는 한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는 인생인데다, 관원도 몇 안 되는 동네 변두리 복싱체육관이 아니면 갈 곳도 없는 대책 없는 인물이다. 30대 어수룩한 노총각 강근담(신문성 분)은 담배 피우는 10대 애들을 피해서 길을 멀리 돌아가는 소심남에다 로봇 장난감이나 가지고 노는 인물이다. 로봇은 강해지고 싶은 강근담의 열망을 대신한다. 하지만 장난감이란 게 원래 대리만족이 아닌가, 복싱체육관을 다닌다고 해도 운동 삼아 나오는 인물이다.
정애숙(문상희 분)도 마찬가지, 재봉틀을 돌리다보니 어느새 결혼도 못하고 살이 쪄서 열등감에 사로잡힌 과거를 이야기한다. 복싱으로 살을 뺐지만 여전히 인생은 고단하다. 영업사원 서봉수(조정환 분)의 얼음주먹은 늘 냉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늘 샌드백을 부장 삼아 두들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인물이다. 일진에게 얻어터진 복수를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은 열혈 소녀 탁지선(강혜연 분)은 당찬 모습을 보여주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은 듯한 소녀의 미래가, 등수로 신분이 갈리는 사회에서 관원들의 인생과 그리 다른 인생길일까 싶긴 하다. 이기동 관장의 딸 이연희(강지원 분) 만이 복싱에 대한 자세가 남다른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장도 그만두고는 복싱에 매진하는 그녀 역시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장인물 중 누구 한 명 화려한 챔피언 인생 따위는 없다. 그저 근근이 살아가면서 대책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 몸이나 상할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매일 같이 성실하게 땀을 흘린다. 이기동 관장의 팬이자 신입관원 이기동(김서원 분)의 등장은 꿈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흐른 물이 다시 비가 되어 내리듯 순환을 보여준다.
이기동 관장의 현실은 초라하다. 닐 암스트롱 다음으로 달에 내린 버즈 올드린의 이름을 잘 모르듯, 세계챔피언 도전자에서 멈춘 이기동은 그저 죽은 아들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복싱도장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다방에서 하루하루를 죽이는 루저이다. 하지만 어린 이기동이 반한 모습은, 챔피언의 화려함보다는 그의 '미친 탱크'같은 불사르는 태도였다. (내가 두란에게 본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저 화려한 전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이기동이 간직한 낡은 글러브, 세계 챔피언 도전 당시, 꼈던 혼이 담긴 글러브는 이기동 관장에게 제 2라운드의 공처럼 울린다. 복싱은 철저하게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운동이지만, 그 뒤에는 트레이너, 동료, 가족 그리고 응원하는 팬들이 있다. 이기동 체육관에서는 전적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장이면 족하다.
인터넷에 '중학생인데요. 체육관에 다니는 사람들 다 깡패들인가요?' 라고 질문을 할 만큼 여린 질문이 보인다. 극중 지선이와는 분위기가 다르지만 뭔가 치이고 억울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때도 대답은 하나다.
‘복싱은 마음가짐만잇으면 전부다 다니실수잇습니다.’
링에서 선수가 죽기도 한다. 그래서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운동이라고 하지만 이기동 관장의 외침처럼 반칙을 하지 않는 운동, 쓰러지지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운동, 허리 아래는 가격하지 않은 운동이 복싱이다. 세상이 워낙 수상하고 반칙이 난무하다보니, 이제는 복싱이 너무 정직해 보여서 인기가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인기를 끄는 이종격투기에 비하면 좀 얌전해 보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실제로 오랜 기간 트레이닝을 거쳐서 펼치는 복싱 관련 자세나 동작은 일품이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쏟는 땀은 실제 복싱 체육관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 하나가 되어 보여주는 줄넘기 장면은 실제 경기를 보듯이 땀을 쥐게 한다. 그래서 보통 공연이 주말에는 두 번씩 올라가기 마련인 <이기동 체육관>은 오로지 하루에 한 경기만 뛴다. 미친 탱크 이기동의 복싱 스타일처럼 한 회 공연에 모든 걸 쏟아 붓는다. 대충하지 않는 공연, 그러니까 생생한 연극의 현장감에 충실한 공연이다.
멋진 경기를 펼치는 배우들과 극단 모시는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연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공연장 땀 냄새가 더 진해졌을 텐데, 이 공연만큼 가면 갈수록 실력이 느는 공연이 있을까 싶다. 어쩌면 배우들 중 몇몇을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프로권투 신인왕전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정직한 공연이다.*
사진출처 - 극단 모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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