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선땅 집시로소이다] 조선집시단, 엉뚱발랄 예술로 독립운동

구보씨 2009. 10. 3. 16:14

아쉽게도 이제는 공연을 올리지 않는 극단 예휘의 작품입니다. 대학로의 '숨은 진주'라고 늘 말하고 다녔는데요. 게으르고 굼떠서, 바쁘다는 핑계로 마지막 작품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학로에서 꼽을 정도로 작은 극장이지만, 자체 극장을 운영하면서, 초대권을 발행하지 않는 등 나름 공연 철학을 가지고 독특한 세계를 보여준 극단이었습니다. 


지원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연극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객석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불평이나 늘어놓는 저에는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어디에 계시든 극단 예휘의 이름으로 멋진 작품을 올리셨다는 걸 자랑으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뒤늦었지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했습니다. 언제고 돌아오시길 기대합니다. [2012.09.07]

 

제목 : 조선땅 집시로소이다

기간 : 10월 3일(토)~ 10월 11일(일)

장소 : 동숭무대소극장

출연 : 송윤석, 하하나, 최대훈, 배태원

극작/연출 : 송윤석

제작/기획 : 극단 예휘


  

<장루이 바로, 소녀의 이야기>(이하 장소이). 단 한 편 만났을 뿐이지만, 공연의 진폭이 워낙 크게 다가온지라, 극단 예휘의 공연에 늘 기대가 됩니다. 이른바, <조선 집시>는 대학로의 말랑말랑한 연극들 사이에서 나름 고집을 가지고, 늘 새로운 소재와 내용과 형식으로 나타나는 예휘의 독창성이 역시 발현된 작품이지요.

 

<장소이>에서 장 루이 바로가 그러했듯이 외로운(예술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볼 때) 거리의 예술가 고월이 등장을 하고, 이에 반해 늘 활달하고 거침없는 소녀가 큰 모습이지 싶은 하련이 등장합니다. 수줍은 듯 올곧게 자기 길을 걷는 고월과 늘 하늘을 날듯 자유로운 하련은 두 작품에서 하나의 패턴을 보이는 듯합니다. (각각 역할을 담당한 송윤석 님과 하하나 님의 페르소나가 아닌지 싶습니다.) 이제 보니 집시의 정서는 두 작품에서 공통으로 깔린 듯합니다. 그들은 늘 가난하고, 집도 없고, 배고프지만, 낙천적이고 자유롭지요. 무엇보다 '집시'라는 아이콘은 여전히 꽉 막힌 세상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하나의 로망이기도 하구요.

 

<장소이>의 여관 주인 내외 등도 그렇지만, 솜씨로 보아 열정이 재능보다 넘치는 글쟁이 혹은 그림쟁이 장휘도 이들과 별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호객도 제대로 못하는 순수청년인 그는 소월처럼 '훈민정음'과 '일본말 스모'를 앞, 뒤 페이지로 붙여 다닐 만큼 뻔뻔하거나 노련하지도 못하고, 하련처럼 강단 있게 나서지도 못하지요. 어쩌면 극과 극, 대립각을 엿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매 혹은 친구처럼 보이는 소월과 하련을 통해 장휘가 점점 어른이 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저항이랄까요, 일제에 대항하는 방식은 사실 일본군이 보든, 독립군이 보든 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릴 게 뻔하니 말이지요.

 

하련이 잡혀가는 근거는, 당시 시대로 보면 꽤 급진적인 소월과 하련의 행위예술이 아닙니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장휘가 일필휘지(?)로 그린 상상 속의 태극기이겠지요. 이제 비로소 시의 검열을 피해서 그림을 그리려던 장휘는 그림을 통해 제대로 저항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실력을 떠나 예술가의 정신이 뭔지 배웠겠지요. 집시들의 특징이랄까요. 조선집시단으로 태어난 그들은 워낙 가진 게 없는 만큼, 행동이나 이동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돈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 저항하는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짐을 덜어놓고, 온몸으로 오체투지를 하는 것! 개의 가죽과 내면을 찾는 과정(?)을 통해 알게 모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를 이야기하면서, 예술 자체가 저항이 된다는 것! 예술의 속성이랄 수도 있고,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일 수도 있는 새로운 관점 제시, 낯섦, 생경함, 맥락의 전환 등을 조선집시단이 시대와의 의도하지 않은 불화를 통해서 말해줍니다.

 

무대는 <장소이>에서 그랬듯이, 소극장를 꼼꼼하게 정성스레 가득 채웠고, 배우들의 소품 역시 소홀함이 없습니다. 당시 집시의 모습을 알 수가 없으니 비로소 한국 최초의 집시인지도 모르겠군요(와우!!!).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민 무대는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의 일러스트를 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모모>가 아이들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듯이 예휘의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자칫 소홀할 수 있는 소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부분 역시 예휘가 다른 극단들과 분명 다른 부분입니다.

 

다만 노래와 극이 좀 더 유기적이었으면 합니다. 극장 무대이고, 그리고 일제가 배경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다이내믹한 부분이 부족하지 싶습니다. 장소이도 같은 무대에 올랐지만 그때는 뭔가 활기차고 다이내믹한 무대였거든요. 대 양쪽의 상회나 양장점 건물에서 뭔가 좀 더 다른 역할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요. 등퇴장을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무대를 좁히는 바람에 뭔가 좀 더 동선을 과감하게 가져가기가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뮤지컬로 새롭게 태어난다면 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을 하고, 또 무대도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련의 캐릭터가 약간 불분명하다고 할까요. 태극기 문양의 깃발을 꽂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또 뭔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끈끈한 연이 있는 듯한데, 극에서는 그 부분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련이 주체적으로 극을 끌어가는 인물인 만큼 하련의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기생 수업을 받았다가 나왔다는 삽화가 등장하지만, 그 정도로는 왠지 부족한 듯합니다. 아무려나 예휘의 노력과 정성이 잘 드러난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송윤석 대표님의 목소리가 꽤 괜찮아서 호~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도 그렇고요. 남은 공연 기간 동안 좋은 뮤지컬로 좀 더 활기차게 혹은 좀 더 애절하게 바뀔 조선집시 기대합니다.* 

 

사진출처 - 극단 예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