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동명 소설로 익히 알려진 작품입니다. 흠... 저는 팩션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이제껏 읽어본 적이 없는데요. 연극으로 옮기기에는 일정 부분 대중성을 가미하여 풀어낸 팩션은 희곡이나 영화를 위해 일종의 드라마터그를 거쳤다고 봐도 좋을 만합니다. 이 작품은 10월 9일 한글날 즈음에 주로 무대에 올라왔는데요. 올해는 이렇다할 소식이 없습니다. 훗! 잘못 알았습니다~! 요사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성의없는 멘트를 날렸네요. 국립박물관 용에서 <뿌리 깊은 나무>라는 원작 소설 제목 그대로 국립중앙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 10월 30일까지 열심히 공연을 올리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을에는 이런저런 공연예술축제가 성황을 이루는 시기인데요. 한글날이 공휴일은 아니지만-공휴일이라고 제대로 의미를 새겼는지는 반성이 됩니다만-스테디 공연이 한 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작품 꽤 재밌는데요. 두 번 봐도 좋을 작품이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09.07]
제목 :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
기간 : 2009년 09월 26일 ~ 2009년 10월 1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김완, 고동업, 신현종, 원영애, 리민, 김신용, 유상재, 이현걸, 허윤호, 황순미, 류대식, 유나령
원작 : 이정명 <뿌리 깊은 나무>
극작/연출 : 박승걸
제작 : 극단 독립극장
기획 : (주)플래너코리아
팩션(Faction) 작가 김탁환의 신작으로 고종독살 음모사건을 다룬 <노서아 가비>는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고 책 광고를 냈다. 그의 다른 소설 <불멸의 이순신>이 드라마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다. <노서아 가비>는 박진감 넘치는 빠른 전개에, 시나리오를 보듯이 단문으로 장면 전환이 휙휙 만화책인양 빠르고도 술술 넘어간다. 몇몇 독자들은 이 작품을 두고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개요 수준이지, 성의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팩션은 널리 알려진 소재를 다루는 만큼,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로 영상물로 작업을 염두에 두고 쓴다고 해도 무방하다. 김탁환 못지않게 베스트셀러 팩션 작가 이정명 역시 신윤복을 소재로 한 <바람의 화원>이 영화 <미인도>로 옮겨지면서 같은 대열에 동참했다.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7일 전, 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정명 <뿌리 깊은 나무>를 원작으로 삼은 연극이다. 이 연극이 관심을 끌었던 첫 번째 이유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보다는 묵직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가까운―비슷한 형식을 차용한(듯한)―작품을 영상이 아닌 무대로 어떻게 구현했을까,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극단 독립극장 창단 30주년 기념공연으로 한글날을 앞두고, 작년에 이어 다시 무대로 올라온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나>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뜻을 같이하는 집현전 학사들의 목숨을 건 개혁 프로젝트와 이를 방해하는 명나라와 경학을 중시하는 최만리 등의 거대한 음모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애초 궁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물을 한정된 무대 위에서 펼친다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애초 무리한 수를 두는 대신 다 걷어낸 자리에 다섯 개의 전통 창호문이 무대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집현전, 궁궐, 왕의 침소 등 다양하게 공간을 나누어 변주한다. 또한 창호문은 각기 방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그림판 역할에도 충실하다. 주인공 강채윤의 속마음이랄지, 따라다니는 요정이랄지, 등장하는 광대도 극의 해설을 돕는 역할에 충실하다.
창호문이 재빠르게 배열되는 전체 무대는 바닥에 9개의 정사각형을 합친 마방진으로 꾸며지는데, 각각 틀에 딱 맞게 조정한 조명으로 인해 각기 9개의 다른 공간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이를 비롯해 상징적인 간단한 소품을 사용, 조명과의 사용이 매우 뛰어나다. 영상의 빠른 카메라워크를 치밀하게 짠 조명과 뛰어난 배경 음악이 대신하는 셈이다.
대신, 농절기를 위해 고안해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 등을 관측한 천문 기구 ‘간의’는 꽤 공을 들여서 만들었다. 극의 진행과 상관없이 무대 뒤에서 집현전 학사가 등장하여 시시때때로 별을 관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훈민정음을 비롯해 세종의 통치철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휠체어 역시 ‘어린 백성’을 위한 장치겠으나, 실제로 당시 휠체어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1에서 n2까지의 정수를 n행 n열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나열하여 가로·세로·대각선의 합이 전부 같아지도록 배치한 ‘마방진’은 이 작품을 따라가고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치로, 연극 마지막에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이 이어졌으나(픽션), 훈민정음이 널리 반포(팩트)되는 상징을 무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방진’이었다는 식으로 뛰어나게 표현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아직 영상으로 옮겨지지 않았으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내용이 익히 예상되는 수순에 따르는 만큼, 연극 수준을 쉽사리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30주년 기념작답게 120분의 긴 공연 내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극단 독립극장 배우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 극단 독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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