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두산아트랩_연극_엘리스를 찾아서
일시 : 2016/02/25 ~ 2016/02/27
장소 : 스페이스111
출연 : 김지원, 윤광희, 문병주, 김용운, 나하연, 강보름, 한상훈
작/연출 : 황이선
드라마터그 : 이주영
음악 : RAINBOW99 신지용
제작 : 두산아트센터
엘리스 증후군(Alice syndrome)이란 심리병리학적인 현상으로 공간, 시간, 그리고 몸의 이미지를 왜곡해서 본다. 환자는 몸 전체 혹은 부분의 크기나 모양이 환각과 맞물려 변형해 인지하는 현상이다. 사회학적으로 앨리스 증후군으로 해석하면 아파트 1층 주차장으로 유유히 들어선 자가용에서 엄마와 아이가 내리고, 아빠가 트렁크를 열면 대형마트 로고가 박힌 큼지막한 봉투가 서너 개가 보이며, 가족이 단란하게 나눠들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길 건너 철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발생할 것이다.
바라보는 자아는 아파트 문 밖, 놀이터 여기저기를 서성이는 비둘기처럼 작고 초라해 보일 것이다.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가 끝난 대한민국 어디쯤, <엘리스를 찾아서>에서 딸 미령을 잃고 폐허를 뒤지는 용수, 철거 당시에 성폭행을 당한 채로 마을에 붙박인 여고생 나나, 집이 허물어진 뒤 길을 헤매다 차에 치인 미령의 시선으로 본 아파트 주민의 단란한 일상은 동화에서나 상상할 뿐 가능하지 세상이다.
현실감이 없으되 허상이 아닌 이상한 나라는 현실이다. 아파트주민의 시선으로 본 철거현장은 곧 재개발이 되어 안락한 주거 환경으로 바뀌기 위한 절차이므로-먹기 위해서는 똥을 눠야 하고, 음식이 곧 똥이기도 하며, 심지어 음식의 형태를 일부 구성하고 있음에도, 음식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해 곧 변기 물을 내리고 언제 내 몸에 있었냐는 듯 현실감을 지우듯-실재하는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동화이다. 지난 작품이긴 하나 <언니들>(2009),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2010) 등 극단 뚱딴지에서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을 떠올려 보면 비이성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우화를 활용하거나 논리나 이성에 얽매이지 않는 연출에 능했다.
황이선 작가이자 연출이 뚱딴지의 차세대를 이끌 연출이라고 보면 철거민 문제를 다루는 데에 단순히 현상만을 두고 선동극을 택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또 영리한 선택이다. 쫓겨나는 세입자나 철거민을 비롯해 치솟는 전세값 등 '집'에 대한 상식이나 통념이 완전히 무너진 요즘 소박한 희망이자 꿈이라고 생각했던 내 집 마련,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 상상이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현실에서 철거가 폐허가 된 이후 이런저런 찬반논쟁과 다툼에도 결국 다 떠나고 공허만 남은 공간 안에 남은 것들로 어떻게든 가족을 조합하고 희망으로 연결고리를 이으려는 노력은 박수를 받을 무엇이다.
아트랩이라는 기조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으로 우리가 입다 버린 헌옷 500킬로그램으로 채운 무대, 쓰레기가 널린 공간은 집이 아닌 가상인 듯 실제 하는 철거현장과 흡사하다.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유행을 하기 시작한 이후 옷은 더 이상 기억이나 추억을 담지 못한다. 허물을 벗듯 일회용으로 유행에 뒤처지는 순간 값어치 없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 안에 온기가 있고 삶이 있다고 작품을 통해 말 한다. 허나 배우들이 극중 주워 입는 옷이 크고 작아 제각각인 데다, 대비 공간으로 구성한 아파트주민들의 옷도 그들의 것이 아닌 듯 어색하게만 보인다.
최치언의 시 ‘가난한 날들의 밥상’에서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앉은뱅이 밥상과 아파트 주민의 다리가 하나 없는 좌식 테이블은 이미지가 겹치지는 않는다. 다리가 부러진 밥상이라는 오브제 자체로 이미지가 강렬하게 떠오르지만 무대 위에서 그것은 좀처럼 의도 파악이 쉽지 않다. 소극장 위에 공간을 구별하지 않아 철거현장과 아파트의 상반된 이미지 역시 겹치면서 뭉개진다.
작가로서 똑똑하고 생각이 많으며 한편으로 노련하기도 하지만, 의욕이 과해 덜어내지 못하고 무대 위에 구현한 게 아닌가 싶다. 후일담 형식으로 지문낭독자의 개입은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다소 모호한 채로 거리낌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렇듯, 60분 안에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연출로 이를 가라앉히고 정돈시키기는 역할을 적절하게 해냈다.
한편 작품 전체에 걸쳐 버러지 못하고 가져가려는 의욕이 과한 부분이 실험, 시도로 랩과 잘 어울린다면 지문낭독자의 개입 다소 편한 선택이라고도 봤다. 허나 낭독자 개입으로 극중극이 되면서 무대에 자리잡아 라이브 연주자 배치가 어색하지 않게 보였다. 연주 자체로 뛰어나고 다소 비현실적인 극과 잘 어울려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완성작이라고 보지 않지만 이후 고민과 토론을 거쳐 성숙한 채로 나올 작품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라이브두산아트랩이 젊은 예술가들을 소개하려는 의도는 성공을 한 셈이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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