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줄리어스 시저] 2014년 침몰한 봄, 당신은 브루터스인가

구보씨 2014. 5. 21. 18:16



제목 : 줄리어스 시저

기간 : 2014/05/21 ~ 2014/06/15

장소 : 명동예술극장

출연 : 정태화, 손종학, 윤상화, 박호산, 강진휘, 김정환, 강학수, 문호진, 김송일, 박완규, 민상오, 유영욱, 정준호, 박세기, 정연준, 손석태

원작 : W.셰익스피어

연출 : 김광보

기획/제작 : 명동예술극장

 


셰익스피어 원작, 김광보 연출, 고연옥 윤색, 게다가 명동예술극장 기획 제작이라면, 작품을 보기에 앞서 조합 자체만으로도 연극팬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김광보, 고연옥 콤비의 만남은 익히 속도감을 높여서 핵심을 향해 곧장 찌르고 들어가는 작품을 낳았다. 관객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난 그 조합이 RPM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는 지금 사회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관객과 비평가 사이 어디쯤 있는 일간지 기자는 <지하생활자들>을 두고 “영화 ‘그을린 사랑’의 한국적 변주. 고연옥 김광보 콤비의 신화적 진화!”라고 한줄 평을 남기기도 했다.

 

안 그래도 김광보 연출은 어떤 희곡을 만나든 어쭙잖은 감정선 따위를 무시하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문어체의 딱딱한 대사, 흔적만 남은 혹은 거의 없다시피 한 무대, 무의미할 정도의 효과 활용 등으로 연극을 보고 나면 ‘아, 이런 얘기를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한다. 한국 연출가 그룹이 워낙 두텁지 못해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개중 확실히 개성을 갖춘 연출가이다. 아무려나 그 둘은 요즘 벌어지는 사건사고처럼 잘못된 줄을 알지만, 배배꼬아 본질을 흐리는 식의 은폐와 엄폐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콤비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연극 작품을 두고, 장르 자체가 매우 인간적인, 그래서 한계도 분명하고, 매회 아슬아슬하기도 한 연극을 볼 때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은 편이긴 하다. 그래도 <줄리어스 시저>는 좋은 제작진을 갖춘 데에 비하면 보고 나서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알게 모르게 기대 혹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김광보와 고연옥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우회하지 않는 직설에 있다고 보면, 윤색으로 참여한 고연옥 작가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생크림을 얹은 케이크처럼 비유로 넘치는 셰익스피어가 부담스러웠거나, 애초 의도가 그렇지 않았을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폭풍 대사를 몰아치는 셰익스피어 원작과 정권지르기처럼 장식을 없앤 김광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명확하게 확인한 자리였다고 본다.

 


공연과 연계해 명동예술극장 '명동시네마'에서 상영한 작품


아무려나 사랑 얘기도 아니고, 정치극이라서 그런대로 맞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봤고, 없지 않지만 잘 맞는 조합은 아니다. 김광보도 셰익스피어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돌아보면 인상 깊게 본 김광보 연출작들은 번역극보다는 주로 창작극이었다. 개인 감상이지만 창작극에서 희곡 자체를 그의 스타일을 온전히 뜯어고칠 수 있고, 고수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김광보 연출이 장막 희곡을 쓰는 김지훈 작가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2013/11/27 ~ 12/08)을 연출할 당시, 동의하지 않지만 ‘장광설로 가득 찬 긴 희곡을 2시간으로 자른 김광보 연출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형편없는 작품이었나 하면 물론 그렇지 않다. 무대는 셰익스피어가 알면 놀라 눈이 휘둥그레 커질 정도로 로마의 찬란한 문화예술 시대와 딱 반대편에 있을 만한, 무채색 철골 구조를 택했다. 박동우가 만든 무대는 딱 김광보스럽다. 다른 극장이라면 철망 펜스를 세우는 정도였을 텐데, 명동예술극장의 높은 천정구조를 한껏 살려 천정까지 건물 뼈대로 쓰는 H빔을 올렸다. 기둥 자체로 강렬한 권력 의지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콘크리트 보강을 하지 않아 거칠고 미완성인 듯 불안한 속성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철골 기둥 위에는 또 다른 세트가 올라가 있어 자칫 무너지지 않을까 긴장감을 전달해 주요 등장인물의 상황, 심리를 무대 자체로 잘 활용한다. 무대에 맞게 배우들이 코트자락을 휘날리면서 조직폭력배들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원작 대사를 거의 그대로 따왔다는 데에서, 윤색이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데, 배우들이 대사를 치면서 이질감이 들기 시작한다. 깡패들은 말로 하지 않는다. 말로 싸우는 이들은 등장인물들이 그렇듯이 정치인처럼 뭔가 잃을 것이 많은 부류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덜 떨어진 말부터 떼를 쓰는 말부터 옹알이까지 근엄하게 생긴 속물 정치인들이 코미디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치인은 환한 조명과 화려한 세트가 갖춰진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 놀지, 짓다만 건물 폐허나 뒷골목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속물 정치인의 속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조직폭력배와 그 속성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보면 이 작품은 애초 김광보 연출이 가식적인 특유의 속성을 한 꺼풀 벗어낸 체로 무대에 올린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사도 바꿔야 했다. 예를 들어 격투기 선수처럼 등장하는 안토니가 늘어놓는 감언이설은 몸으로 말하는 깡패나 UFC선수의 그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브루터스나 시저 역시 격투가가 아니라 장군이니, 몸이 아니라 말로 싸우는 부류이다. 그런 면에서 배가 나와 몸피가 정치인들과 비슷한 손종학 배우는 시저와 닮았고, 몸이 작은 윤상화 배우는 시저 옆에서 고뇌하는 브루터스 역에 적격이긴 하다.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의 다채로운 작품이 선보이는 올해, 명동예술극장의 선택은 <줄리어스 시저>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선보인 셰익스피어 작품이 <쭐리어스 씨사>(1925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어학부)이지만 이후 프로무대에서의 공연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번역서 및 연구도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미미하다. - 작품 소개 글 중에서

 

게다가 명동예술극장 공연이라는 명분이 주는 부담감도 있겠지만 눈높이를 관객에게 맞추면, 정치극이고 김광보 연출이 평소 그러했듯, 당면한 현실을 좀 더 고려하면 좀 더 유연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본다. 아무려나 장막극을 당시 상황을 빌어 현실을 이야기하자니 권력다툼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입으로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시민들을 현혹시키는데, 무대 위에서는 몸으로 뭔가를 보여줄 듯 빠르고 거친 연기가 이어진다. 그래봐야 원작이 액션물이 아니니, 찌르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하지만, 나름 그럴싸하게-보기에 따라서는 70년대 액션영화인양 키치로 표현해 생뚱맞게 표현해 연출이 말하는 소격효과일까 싶은-보이긴 하지만 성에 안차긴 매한가지다.



 

이른바, 고선웅이 이끄는 극단 ‘마방진’의 작품들이 겹쳐 보이는 듯, 그렇게 가도 재밌겠다 싶었지만, 결국 셰익스피어에게 많이 양보한 듯해서 타이틀전이 아닌 전초전 정도에 그쳤다. 브루터스의 고민이 밖으로만 공화정과 왕정 사이 기로를 두고 고민한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린 듯도 하다. 앞서 말했듯 느와르풍 연출에서는 공화정이니 왕정은 논외의 문제이고, 누가 보스 자리를 차지하는가, 만 부각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사 이후 브루터스가 보여준 몇 가지 선택, 안토니 연설 허락이나 시저에 대한 애증에 따른 환각이 잘 와 닿지 않는다.

 

이 작품은 드물긴 하지만 앞으로도 언제든 오를 작품이고, 셰익스피어 희곡으로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으며, 희곡이 아니어도 시저와 브루터스 일화는 로마사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김광보 연출이 굳이, 원작에 충실한 작품으로, 내가 본 바, 사실 가장 밋밋한 작품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공식 자리에서 요즘 세월호 사태 이후 정부의 무능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 현실을 두고, 민감한 작품이라는 말로 서두를 꺼내면서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 정도로만 해석을 자제한 듯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토요일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청계광장에서 1만 명 이상 시민들이 모여 강하게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청소년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에 이제는 주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집회꾼들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와서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요즘, 도리어 정부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 명동예술극장에서 제작 지원을 받아 연출하는 '을'의 입장이 쉬운 자리는 아니리라고 본다. 작품이 그렇다고 값어치를 못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그저 사회 현실의 사각 혹은 비극적 현실을 냉정하게 담아낸 이전 작품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주연급이라고 해도 좋을 대한민국 남자 연극배우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았으니 연기대결 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해낸다. 암전 없이 공연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 기네스 등재 급 빠른 전개를 견딜 수 있는 건 역시 배우들이 그 만한 내공들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시간에 촉박해 위까지 철망을 쳐서 멋지게 세운 세트를 1층에 한정하지 말고 2층 세트로 짜서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그랬다면 권력 의지도 그렇고 작품이 다채로울 수 있었다. 


케이지 안쪽 좁힌 무대에서 움직임을 짜려니 답답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한태숙의 <오이디푸스> 이후 명동예술극장에서 아슬아슬한 권력 의지를 향한 상승 기류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리라 기대했고, 재공연을 한다면 고려해서 올렸으면 한다.*

 



사진출처 - 명동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