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치원 해문이] 좌우지간 배우에 의한 배우를 위한 잔치

구보씨 2015. 8. 28. 12:37

제목 : 조치원 해문이

기간 : 2015/08/28 ~ 2015/09/13

장소 :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출연 : 이철희, 김정호, 최지연, 황미영, 이영석, 김문식, 이동영, 박상윤, 이필주, 곽동현, 정나진, 박경찬, 정양아, 김효영, 박하늘, 박근영, 최문석

희곡 : 이철희

연출 : 박상현

주최 : 그린피그, 국립극단, 벽산문화재단



고삐가 풀렸다는 말을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요즘 말이 얼마나 비싼데 고삐를 함부로 풀겠느냐만, 연극 <조치원 해문이>는 딱 고삐 풀린 배우들의 놀이판이라 할 만하다. 극단 그린피그가 달려온 길을 보면 극장 크기가 조금만 넓다 싶으면 배우들을 들이붓는 작품을 올리는 편이기는 하였으나, 작품이 참 묵직하고 때로 난해하기도 하여, 배우들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기는 하나 경주마처럼 작가의 글, 연출의 손짓에 고분고분 코스를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었다.


허나 이순재 원로배우도 [라이프 인 더 씨어터]에서 햄릿 역이 모든 배우들의 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연극인들의 영원한 고전 햄릿이 점차 해무릿 → 해무닛 → 해문이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 방식으로 바뀐 오마주 연극은 연기인가 실제인가 싶게 배우들이 자유롭기까지 하다. 코믹 풍자극인가 싶지만 권력보다 세종시 전환을 앞두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시골 마을의 욕망의 롤러코스터는 덜 삭인 말똥처럼 구린내가 휠씬 진하다.


헉! 그런데 공연 시간이 쉬는 시간 없이 130분이란다. 자신감이 있지 않은 바에야 뻔히 아는 얘기를 이리 길게 끌 이유가 없었을 것인데, 커튼콜까지 보고 공연장을 나와 시계를 보니 138분이라, 시간이 어찌 가는 줄도 모르고 하하호호흐흐쯧쯧 웃다가 혀를 차다가 웃다가 쓰게 웃다가 헛웃음을 짓다가 보면 연극이 끝나 있더란 말이다. 충청도 사투리인 듯 아닌 듯 말이 느린듯 빠른 듯 고개가 갸웃갸웃할 때도 있지만 배우들이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으니 관객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하다.



 

복잡한 내용 없이 아는 내용이라 인물들 역시 정해진 대로 전형적이라 할 수도 있고, 전개 역시 잠깐 졸더라도 막걸리 목 넘어가듯 여차저차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배경도 마침 충남이라 개그대마왕이라 불렸던 최양락의 80년대 전성기 코미디 [괜찮아유]의 햄릿 버전을 보는 듯도 한데 말이다.

 

구민회관에서‘햄릿’을 올릴 때가 단연 압권이다. 익히 아는 바, 극중 극으로 햄릿 왕자가 광대를 불러 삼촌 클로디오스의 암살 장면을 재현하는 장면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하이라이트이다. 극중 극의 극중 극을 보고 있는 삼촌 이만국도 마찬가지인데, 그 옆에서 천연덕스럽게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으면서 배우와 관객 사이 미묘한 실랑이가 벌어지는 폭풍 웃음 유발 에피소드는 긴장, 놀람과 버무려지면서 허탈하기까지 하여 이 작품이 소격효과까지 가미했구나! 싶다.


이 연극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게 말을 가장 잘 구사하는 직업이 소설가, 방송작가, 희곡작가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생각을 다시 해보니 늘 입에 대사를 달고 사는 배우들 특히 “그 긴 대사를 어떻게 외어? 배우들 참 대단혀.”극 중 대사에도 나오듯 늘 생중계인 연극배우들이 가장 말을 잘 하는 것이 맞는 이치더란 말이다.

 

원고지에 쓴 대사만으로는 당최 맛이 밍밍한데, 배우들 입에만 오르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잘 구은 함박스테이크처럼 변하는 신통방통한 도술을 종종 봐왔지만 애당초 배우가 작정하고 쓴, 익숙한 텍스트를 뼈대로 삼고 고향 사투리를 섞어서 고향 친구들을 불러들여서 살을 붙인 대본은 청요리집 건삼이 물을 만나 폭풍확장을 하듯 무대 위에서 입맛이 놀랍도록 춤을 춘다.



 

물론 직접 주연배우를 맡기도 한 이철희가 배우로 공연기획사의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다가 나온 희곡 <조치원 해문이>는 벽산문화재단과 국립극단과 극단 그린피그를 만나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간, 말로 관객을 혼을 쏙 빼놓기는 극단 마방진의 고선웅을 비롯해 <원전유서>를 쓴 작가이자 배우 김지훈이 떠오르긴 하지만, 의미망이 더 촘촘하다는 인상을 주긴 하나 배우들이 살짝 조심스럽게 보인다면 <조치원 해문이>에서는 배우들이 조증이 걸린 듯이 들 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뭔가 내면의 족쇄를 하나 더 풀어낸 듯한 모습이다. 배우들이 정신없기로는 극단 그린피크의 성정이기도 하지만 희곡의 힘이 더 크다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이 작품은 알이 먼저다 이거다. 이철희 배우가 배우로 내외공이 쌓이고 쌓여 오랫동안 묵고 묵어 대사들이 발효를 해서 묵은지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 갈 데까지 가고, 몰릴 때까지 몰렸을 때, 개인적으로 배우로 개성이 넘치는 그를 기억하기도 하고 좋아하지만, 해문이 역이면 몰라도 사회 통념상 햄릿 역을 맡을 외모나 성량은 아닌지라-화끈한 장작불과 좋은 돼지고기를 만나 쿰쿰한 음식쓰레기에서 환골탈태 소주도둑 묵은지김치찜이 탄생하듯이 이 작품이 뛰쳐나왔다고 판단한다.



 

코가 뻥뻥 뚫리듯 극중 배우들이 아닌 그냥 쌩배우들이 신나서 연기하는 모습이 보여서 속이 뚤린달까. 요 몇 년 극장을 나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관객 매너리즘에 빠진 지금 아주 좋은 자극이 된 작품이다. 여러모로 색다를 것이 없는 조합인데 전혀 색다른 풍미를 맛보았으니 대박이다.

 

그래서 뜨거운 음식을 먹고 난 뒤, 시원하다고 말하듯이 작품은 햄릿이 4대 비극이듯, 조치원에서 불어 닥친 돈바람으로 인해 아우가 형을 죽이고, 옛날 옛적 불장난을 했던 사이인 형수와 배꼽을 맞추고, 조카를 좆까!로 보는 상황이 세종시 유치를 바라마지 않는 주민단합대회 씨름판에서 막걸리에 탄 청산가리에 이리저리 죽어 나자빠지는 현실은 참 서글프고도 서글프다.

 

13세기 덴마크 왕가의 핏줄을 두고 벌이는 정권 쟁탈전은 멀고 먼 아시아 변방의 깡촌 시골집과 땅 몇 마지기를 두고 벌이는 개싸움으로 탈바꿈했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이 당연한 것이 ‘체감 청년실업률 22.5%… "일자리 태부족" 54만 명 취업 포기’ 9.10일자 기사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 해문이 어쩌자고 군대도 못 가고, 연극배우나 하겠다고 서울을 들락날락하나 집 간수도 못하고 시골집에 빚덩이나 안기는 별 볼일 없는 직장 생활을 한 번 해본 적도 백수이며,동네 후배들은 황금색 파프리카를 재배하며 노다지를 꿈꾸지만 빚만 잔뜩 지었는가. 욕망의 원천에는 퍽퍽한 세상살이가 있고, 요런조런 복잡다단한 사정이 있다지만 조치원면의 남사스러운 얼룩읜 세종시의 8차선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딱 다 지워져버렸다.

 

왁자지껄 소시민들이 사는 그냥 그런 조치원면은 뻔한 동네이지만 중풍을 맞았는지 반신불구인 여고생 세익(셰익스피어)이를 동네 사람들이 챙기고, 벙어리 향이가 술집여급으로 제법 돈을 만질 수 있는 동네였다. 동기동창 중에 유일하게 전문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출하였으나 별 볼일 없이 손호식도 고향이 그나마 기댈 곳이라는 미지근한 온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동네였으나, 아스팔트가 잡초와 약초와 나물을 구분하지 않고 깔아뭉개듯 싹 다 지워졌다. 더불어 억울하게 죽어 귀신으로 떠도는 해문이 아버지, 오피리 아버지가 염쟁이 유씨와 함께 어울리는 동네 풍경도 더 이상 없다.


 


극중 배경이 2012년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는지, 떠밀렸는지 아무튼 근래 배우들이 자살했거나 고독사를 했다는 소식 대신 무명 배우가 작가가 되어 돌아왔다는 낭보를 전한 이철희는 초인 같은 사나이이다. 배우로 여건이 좋다면 왜 골치 아프게 작가를 하겠는가 말이다. ‘나는 여전히 배우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작가입니다.’로 작가의 말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도 같지만 잘 견디어 냈다고 박수를 치고 싶다. 게다가 어느 작가도 구현하지 못할 정말 한국식 희곡 작가의 출현이니 관객으로 기쁘기도 하다.

 

극중 전개가 산만해지기는 해도 상관없이 배우들에 대한 애정을 대폭 쏟은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배우출신 것도 진짜 배우 출신이 아니면 하지 못할, 얌체 깍쟁이 같은 작가나 연출 따위가 하지 못할 마음씀씀이다. 황미영 배우 재발견 역시 이 작품에서 건진 성과이다. 이 작품을 올해의 연극으로 꼽겠다.* 



사진출처 - 극단 그린피그,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