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국보다 낯선] 이제 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구보씨 2009. 12. 24. 19:39

이제 낯선 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1984년)

짐 자무쉬 감독/흑백/90분/미국

 

제1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1985) 제19회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1985)

제37회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1984) 제1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KNF상(1983)



The New World

천장에서 물이 새기 전이었다. 해가 들지 않는 자취방이지만 누우면 마이애미의 하늘이 보였다. 격자무늬 카디건을 걸친 에디,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을 꿈꾸는 에바,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는 윌리. 어딘가로 떠나기 직전 잠시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세 사람을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수면(睡眠)의 경계에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바다, 난 따뜻한 수면(水面) 위에 있었던가. 눈꺼풀 위로 아른거리는 빛은 햇빛이었던가. 나는 잠에 곯아떨어지고 아침이면 형광등 불빛 아래서 잠에서 깼다.


<천국보다 낯선> 영화 포스터를 고정시킨 압정 여섯 개 중 한 두개는 분명 자는 사이 입 안이나 눈 위로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는데, 누워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도 아슬아슬함을 즐기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천장에서 물이 새서 물에 분 포스터를 떼어낼 때 녹이 슨 압정 두 개는 반쯤 헐렁하게 빠져 있었다.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내가 안다고 믿는 세상은 조금씩이지만 낯설고 위태롭게 변하고 있었다. 허나 변하고 있는 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이란 걸 안다. 그저 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

 

One Years Later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집에서 누런 먼지를 뒤집어 쓴 <천국보다 낯선>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친구는 나가고 없었고, 난 시간에 자유로웠으나 밤새 마신 숙취와 일상에 꿉꿉하게 낀 권태에 시달리면서 볼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굳이 볼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상상했던 대로 고정된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 길게 찍기,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 화면, 대사를 아끼는 배우들, 그나마도 배우가 입을 열 때마다 부서지며 날아다니는 건조한 대화. 그 지루하고 밋밋한 화면을 나는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기법상의 조잡한 허위가 일절 틈입할 수 없는 무채색의 화면은 TV리모컨 끄면 암회색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었다. 뉴욕의 빈민가는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구토를 해대는 프랑스 부빌(지저분하고 불결한 도시라는 의미)이었고, 내가 누워있는 서울 변두리 동네였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는 여분의 존재들이 살고 있는 영화와 책과 현실이 있는 그곳.

 

 

 

신세계The New World, 미국 뉴욕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에 사는 윌리(존 루리)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사촌 에바(에스터 벌린트)가 헝가리에서 찾아온다. 그녀는 클리블랜드의 롯데 숙모에게 가기 전에 잠시 머물 예정이다. 그러나 꿈과 희망이 넘치는 화려한 미국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TV를 보며 시간을 죽이는 일이다. “왜 쿼터백은 수비할 때 나오지 않지?” 무덤덤하게 묻고 답하는 에바와 월리의 모습은 서글프다. 빈민으로 전락한 제3세계 이방인이 미국 사회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란 게 고작 처음보는 미식축구 룰을 익히는 정도가 한계일 것이므로. “진공청소기는 문어체야. 악어목조르기라고 하지.” 미국 속어나 가르쳐주는 월리의 대답도.

 

마켓에서 천연덕스럽게 식료품을 훔쳐오는 에바의 모습을 보면, 영화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헝가리에서의 그녀의 삶이 고상하거나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녀의 능숙한 솜씨와 배려(?)로 윌리는 마음을 열지만, 이제 미국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천국의 삶에 적응을 막 끝낸 에바는 예정대로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1년 후 one Years Later, 윌리는 고만고만한 단짝 에디(리처드 에드슨)과 함께 사기 포커 게임으로 거금 600불을 따고, 에바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그곳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에바를 만나고,모처럼 해후한 세 사람은 쿵푸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지역의 명소인 에리 호수를 찾아가기도 한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낯선 동양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몸동작과 과장된 괴성이 즐겁지만은 않다. 괴상한 볼거리로 전락한 모습은 불이 켜지고 나면 바로 타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그리고 에리 호수는 성공한 미국인들에게는 고독을 즐기고 명상을 하는 명소일지 몰라도 이들의 눈에는 그들의 속내처럼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천국Paradise, 그곳에는 있는 걸까. 윌리는 헝가리인 에바의 새로운 삶에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핫도그가게(세 사람모두 맛이 최악이라는 데에 동의를 한) 점원으로 일하는 에바, 천국시민과는 거리가 먼 주유소 점원인 그녀의 남자친구, 헝가리어만 고집하는 숙모까지도, 하나같이 시시해 보이는 것뿐이다. 에바가 가진 전부랄 수 있는 직장과 애인과 집을 두고 미련 없이 윌리와 에디를 따라 떠나는 이유도 윌리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드라마와 TV광고에서 늘 천국으로 그려지는 따뜻한 마이애미 해변을 꿈꾸면서. 


“방안 풍경이 낯익은데?”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마이애미의 싸구려 모텔은 에바가 지나가듯 한 말처럼 뉴욕에 처음 도착해서 묵었던 윌리의 방과 비슷하다. 그 삶까지도 날씨 빼고는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경마장에 절대 에바를 데려가지 않는 윌리와 에디, 혼자 남은 에바의 지루한 일상은 또다시 반복된다. 윌리 패거리가 경마에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을 때 홀로 남은 에바는 플로리다 해변을 거닐다가 기념품으로 관광객이 주로 쓰는 모자로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인이라면 절대 살 리가 없는 모자를 쓰고 있던 덕에 우연히 범죄 조직의 거금을 손에 넣으면서 아메리칸 드림에 한 발짝 다가간다. 


이제 에바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한다. 월리는 다시 헝가리로 돌아간다는 에바의 쪽지를 보고 망설이지 않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에바는 결국 미국에 남았다. 부다페스트에도, 미국에도 그들의 자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좁고 지저분한 아파트,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렌터카, 답답한 고모네, 마이애미의 여관을 미루어 보건데 말이다.

 

 

<신세계>가 먼저 단편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1년 후>, <천국>를 후에 덧붙인 세 편의 에피소드는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순환 구조를 가진 걸작으로 재탄생한다. 이는 <천국>에서 미국에 남아 윌리의 아파트쯤을 차지한 에바에게 또 다시 부질없이 <신세계>를 찾아 또 다른 사촌이 헝가리에서 날아올 것이므로 그렇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계속 돌고 도는 무의미한 쳇바퀴 놀음을 보려주고 싶은 것이었을까. 삶이란 그렇게 무의미하기만 한 것일까.

 

Paradise

“좋아. 내가 임시침대에서 잘게. 너희를 사랑하니까.” 모텔에서 윌리와 에바가 서로 임시 침대를 쓰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이민자인 그들의 정착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에 자신의 침대를 양보하는 다정한 에디. 그는 뉴욕 정착민이나 빈민인 에디에게 미국은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절박한 윌리와 에바와는 다르게 에디는 가벼운 여행을 나선 듯 뉴욕의 집으로돌아가고 싶어 하고 뉴욕으로 돌아간다. 짐 자무쉬는 뉴요커 에디의 낙천적인 기질에서 실마리를 발견한 걸까. 아니면 천국은 딛고 선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에 있다는 걸 암시하는 걸까.

 


“나를 이기고 싶다면 기회를 주마.” 카드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인 윌리와 에디를 가볍게 이기는 롯데 속모의 놀라운 카드솜씨는 그녀가 헝가리 치가니(집시)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집시들은 애교 있는 도둑(에바)이거나 유쾌한 사기꾼(윌리)이자, 세상의 다른 이면을 보는 점쟁이이고 현실에서 상상을 보여주는 마술사였다. 집시는 유럽 전역을 떠도는 신세였으나 늘 여행을 떠나는 길에서 유쾌하게 살아온 민족이다.


만약 롯데 숙모가 집시라면 그녀가 애초에 영어를 쓰지 않고, 방안을 떠나지 않고 폐쇄된 삶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그녀가 미국이란 삭막한 천국이 있기 전부터 세상을 자유로이 떠돌며 행복했던 치가니들의 삶으로,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열쇠이다.


 

 

<천국보다 낯선>이 산업 사회의 황폐함을 다루면서도 줄곧 유쾌하게 읽히는 이유는 물질에 연연하지 않던 자유로운 여행자였던 집시의 감수성이 모든 문화의 집결지이 뉴욕의 포용력을 가진 뉴요커를 밑바탕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관광객 같지?” 플로리다에 도착한 세 사람. 윌리가 선글라스를 사서 에바와 에디에게 나누어주며 한 말이다. 


총천연색의 화려하고 그럴듯한 천국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천국 대신 끝을 모르는 욕망의 텅 빈 껍데기만 있는 미국을 현실을 영화가 흑백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서 보여주었듯, 이들도 비로소 참을 수 없도록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벗어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관광객, 즉 객관적인 시선을 되찾는 첫 과정으로 세상을 온통 검정으로 뒤덮는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이들은 ‘천국보다 낯선’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동등한 시선을 갖게 된다. ‘세상으로부터의 타자’가 아닌 ‘무의미한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눈 뜨는 과정에 나란히 동참하는 것이다. 두 종류의 영화 포스터에서 이들이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있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존 루리가 작곡한 단조로운 현악기 연주를 즐기는 동안 난 어느새 윌리와 에바와 에디 옆자리에서 같이 쿵푸영화를 보고 있었다. 천국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느릿한 시선 안에 담겨 있다. 낯설지 않은 천국은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