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성북동비둘기, 사슬을 끊고 나서야 하는

구보씨 2015. 5. 6. 17:07

제목 :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기간 : 2015/05/06 ~ 2015/05/14

장소 : 예술공간 서울

출연 : 이진성, 김미옥, 김명섭, 신현진, 김성혁, 이송희

원작 : 아이스킬로스

연출 : 황동우

제작 : 극단 성북동비둘기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미니홈피 대문에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성북동 비둘기’라고 내걸었다. 얼핏 좌우, 진보보수 사이 대립각을 떠올릴 수 있으나 작품에 남발하는 이념, 빈부, 계급의 날선 언어들을 쓰지 않는다. 적어도 표피로 드러난 사회 문제를 겉핥기식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손에 꼽는 고전 문학 혹은 희곡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고, 근래 작품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원작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얻은 과도한 의미 부여에 대한 비웃음일 수도 있는, 손을 깊이 넣어 내장을 비틀어 꺼내는 식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낸다. (내가 받은 느낌은 그랬다.)

 

어쩌면 연극계가 권위에 대한 도발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잘은 몰라도 한동안 다른 극단에 비해 지원을 덜(못) 받거나, 인정을 못 받기도 하였다. (일례로 연극 정책 관련 강의를 들을 때 강사가 전혀 엉뚱한 말도 안 되게 튀는 연극의 예로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극단 성북동비둘기를 비롯해 대다수 작은 극단이 처한 현실을 보면 극장, 무대, 소품, 조명 등 한계가 명확한 바, 작은 지원에 목매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야생을 택하는 게 낫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좋은 희곡과 이를 구현한 배우에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선택한다면 열악한 제작 여건 때문에 그럴듯한 재현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해석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몇 안 되는 선택지일 수 있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를 오롯이 이끈 김현탁 연출과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다른 작품에 비해 배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 만큼 혹사(?)를 당한 배우들이 그간 걸어온 길을 보면 참으로 험난하다. 그러나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성북동 비둘기’라는 소개는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사태 파악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아예 거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들의 작업은 대학로 엇비슷한 연극 가운데 특징이 뚜렷한 작품으로 차별화가 분명했고, 요사이 평단이나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한, 이제야 비로소 비둘기의 날개를 펴볼만한 시기이다. (적어도 레퍼토리 외에도 신작을 끊임없이 올리고 있다.)

 

나에게 극단 성북동비둘기 작품은 원작, 배우와 상관없이 언제 봐도 좋은 편인데, 그 동안 김현탁이 줄곤 연출을 맡아온 데에 대한 신뢰라고 볼 수 있다. (이진성, 김미옥 등 주연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나무 같은 배우들을 향한 존경 혹은 동경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올리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줬다. 김현탁이 아닌 극단 조연출을 맡던 황동우가 연출로 나선 게다.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BABUREN, Dirck van(b. ca. 1590, Utrecht, d. 1624, Utrecht) 

(Prometheus Being Chained by Vulcan) / 1623 / Oil on canvas, 202 x 184 cm / Rijksmuseum, Amsterdam 

 

극단이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인재 발굴은 당연하다. 작품에 앞서 신인 연출가의 데뷔는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열악한 상황과는 별도로 1~2년 사이 가장 활발한 작품을 올린 극단이기도 하니 분업이 필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품은 어떠한가. 60분이 조금 넘는 짧은 작품 한 편으로 연출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도 색이 워낙 강한 작품을 올린 극단 연혁에서 김현탁 연출과 다른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황동우 연출은 극단 색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작품 완성도를 선택했다고 본다. 연출을 몰랐다면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도 김현탁 연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하다.

 

앞서 올라간 극단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 혹은 요약본이라고 할지 구성, 연출, 해석에서 기존 극단 작품을 본 관객 입장에서 익숙하다. 열심히 필기한 우등생 작품일 수도 있는데, 극단이 이른바 떠받드는 원작(권위)에 대한 답습을 허무는 작업물을 치열하게 올린만큼, 이를테면 시대를 냉정하게 읽고 분석하는 실험 극단으로 자리매김한 극단 방식에 대한 재해석 혹은 다른 연출 방식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김현탁 연출이 세인이 평가가 어쨌건, 자신 만의 길을 걷는 와중에 굳은살이 박인 부분이 있을 텐데, 자칫 극단 차원에서 권위나 독단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지 않은지 경계를 해야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몇 년 사이 드디어 인정을 받고,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 응원을 보내지만, 한편으로 그의 스타일이 자체로 도식화될 우려가 없는지 조마조마한 심정이기도 하다. (권위가 없는 신작이나 창작물을 올리는 작업은, 재해석이 아닌 작업은 요원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한 참이다.)

 

한 극단에서 조연출을 도맡던 후배가 선배의 연출 방식을 닮는 게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기 색깔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나름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을 텐데, 구분점을 찾기 힘든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초창기 작품 중 <김현탁의 햄릿>을 보면 옹알이를 하는 듯 예닐곱살 꼬마들이 나와 연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 참으로 놀랄만한 시도였는데, 내가 본 김현탁 작품 중에 그에 버금가는 작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작품이 일종의 첫 라운드 탐색전이라면 두 번째 작품은 본격적인 황동우의 행보를 보여주길 원한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날개 아래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이빨을 드러내야 한다. 비둘기를 잡아먹는 무엇, 그 무엇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