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감도] 끝이지 않는 연극인들의 고뇌

구보씨 2010. 8. 20. 16:25

연극 <오감도>는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 <늙은 부부 이야기>, <락시티>, <염쟁이 유씨> 등 주로 대중적인 작품을 올린 연출가 위성신의 첫 번째 실험극입니다. 스테디셀러 공연 <염쟁이 유씨>로 요듬도 대학로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지요. 그의 연출 스타일을 평가하는 의미는 아니나, 작품 대부분 제 취향이 아닙니다. 그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은 <오감도>와 같은 새로운 시도 혹은 사회적 의미망을 찾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그가 이 작품을 '대극장에서 올리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는데요. 공연에 앞서 자신이 연출한 작품을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어찌 보면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약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솔직하게 말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실제 공연을 보면서도 극장이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이런 의도는 그가 이 작품을 두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결국 좀 더 큰 무대에 올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요. 언제고 다시 한 번 중극장에 올라갔으면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목 : 오감도

기간 : 2010/08/20 ~ 2010/09/26

장소 : 대학로 소극장 축제

출연 : 김수현, 김로사, 오주석, 민충석, 신기섭, 전영, 송숙희, 노윤정, 조연정, 진영은, 전형숙, 양현석, 김영임, 한윤서, 이병진, 김영전

작/연출 : 위성신

제작 : 극단 오늘


 

26세에 생을 마감한 식민독재시대 예술가 이상을 두고 친일이니, 혹은 반일이니 하는 말은 논외로 다뤄진다. 그의 삶이 워낙 짧기도 했거니와 그가 친일의 유혹을 받기에는 너무 곤궁했다. 그의 문학적 평가는 후대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모더니즘의 아이콘 대접을 받지만 여전히 그의 문학을 두고 제대로 된 해석이 드문 것을 보면 그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물며, 이른바 현대 문학이 들어오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에서라니, ‘오감도’에서 보여주는 숫자 나열과 수학적 기호들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이질적 혹은 절제 없는 서양시의 도입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대 몇몇 지식인을 제외한 대중과 철저하게 괴리를 선택한 그에게 일본이 선전 수단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란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의 초기작이 일본어로 쓰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로운 도피 혹은 파괴 등은 언어의 혼재, 단어의 혼재, 장르의 혼재 등 이른바 그의 겹겹이 쌓인 작품 속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시대와 자아와의 괴리는 천재 건축가이면서도 식민지 국민의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시의 세계로 고이게 마련이다. 시든 소설이든 이상의 작품은 알수록 난해한 반면 한편으로 절절하다. 유일한 아지트를 구축하는 그의 세계를 들어갈수록 그의 존재로서의 비극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일제와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역시 그의 작품 속 독특한 비애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동시대 예술가들의 동일한 파장을 조우하고 있다는, 혹은 있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상 탄생 100주년 행사로 사진전, 그림전 등 몇 가지 행사 단신이 기사로 올라온다. '李箱의 房'(이상의 방) 기념전을 통해 이상의 사진과 육필 원고를 전시하는 강인숙 관장은 "이상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맞다"며 "우리는 아직도 이상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아직도 이상의 시발점에서 답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상이 가진 문화적 파급력(그의 이름을 붙인 문학상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과 매력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조명이 역시 기대보다 덜하다는 생각이다. 연극에서는 극단 오늘이 ‘오감도’를 올렸지만 작년과 올해 안중근 장군을 다룬 뮤지컬, 연극, 출판 등을 활발한 재조명을 떠올리면, 정작 문화계 인물인 이상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좀 아쉽다.


아무려나, 반가운 마음으로 연극 ‘오감도’를 봤다. 2010년 현실로 불려온 이상은 여전히 시대와 조우하지 못하는데, 소설 ‘날개’를 큰 틀로 삼은 탓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연작시 ‘오감도’를 풀어낸다. 팸플릿에는 대본이 실렸다. 극 전반의 복잡한 전개나 귀에 익지 않은 오감도의 시 구절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작 극은 공개한 대본과 많은 부분 내용이 달라졌다. 마지막까지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날개’의 불안한 내면을 다루고 있다고 한만큼 현대로 옮긴 골목길 풍경, 거리풍경 등 조감하는 방식으로 몽타주로 풀어낸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익히 이상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캐릭터이다. 그 익숙함이 반갑기도 하고, 반복인 듯 아쉽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익숙한’ 이상, 즉 격리되고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내면으로 침작하는 그의 모습이 지금 시대와 여전히 이질적인 이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없이 막연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홍의 이상에 대한 집착도 그렇고, 이상의 고뇌와 소설에서 연극을 통해 현실과 만나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장을 마련했다기보다는 부자연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상이 아니더라도 소시민적인 지식인 혹은 좌절하는 예술가는 익히 문학과 영화와 연극을 통해 부지런히 반복되어, 이제는 좀 낡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가 선택한 현실의 몇몇 장면 선택과 그 현실에 반응하는 이상의 태도 역시 줄기로 잡힌다기보다는 나열된 듯하다.

 

위성신 연출은 스스로 밝혔듯이 2010년 대한민국에서 연극을 하는 예술인들의 상황을 도입했다고 했다. ‘백수이자 사회부적응자로서의 모습’이란 곧 연극을 하는 이들이 당면한 모습이라는 건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정작 그는 ‘대학로를 대표하는 최고의 흥행 연출가’라는 표현을 연극 소개에서 쓰고 있다. 그러나 연극을 한다는 선택 자체가 갖는 사회적 평가나 현실을 떠올리면 그의 이전 작품들이 현실의 고민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는 차치하기로 한다.




위성신 연출을 두고 뭐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소극장 중에서도 작은 축에 속하는 축제 소극장 무대 위에 16명의 배우를 세우는 등, 작품에서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좁은 무대를 최대한 분열하는 이상에 맞게 짜낸 실력도 눈에 들어온다. 그의 말처럼 “이번 작업이 일종의 인큐베이팅 작업이며 수정작업을 거쳐 중극장 또는 대극장 무대에 올려보고 싶다”는 말이 실현된다면 기꺼이 보러갈 생각이다. 100주년 기념작이라는 보다 어려운 짐을 짊어진 점만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상의 100주년 기념작이고, 연극 무대 위에 그 실험적인 인물을 올려놓은 만큼 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이상에 대한 기대 역시 충족시켜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연극을 하는 어려움을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 혹은 안톤 체홉의 사실주의 작품들 속 비루한 인생들에게 관객들이 호응하는 이유는 연극 이전에 동시대인들이 느끼는 상황이 암울하기 때문인데, 예술가의 고뇌와 교집합을 형성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해결점이 같을 수는 없다.

 

다만, 광의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름 하의 20대80으로 몰아가는 상황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현실의 예술가를 동격으로 놓거나 혹은 막연한 동질감 형성은 자칫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번 작품에서 위성신 연출이 이전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접근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보다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사진출처 - 극단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