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한국이 폴란드와 다르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날씨도 습하고, 음식도 잘 맞지 않고, 그러나 거리를 걷다가 이질감이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 상점 간판을 보는 순간이지요. 세계화는 허구가 아니었습니다. (…) EU에 가입하고 국가 간 경계가 사라지면서 폴란드 연극 고유의 특성 또한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허구가 아니었던 것이죠.
- <보이체크> 연출가 타데우시 브라데츠키(56) 인터뷰, 씬플레이빌 9월호 ‘늙음은 낡음이 아니다.’ 발췌
국립극단 연극 <보이체크>(2011/08/21~09/10, 대학로예술극장대극장)는 무대 위쪽 액자 틀에 영어와 일본어 자막을 올린다. 국립극단이 독일 희곡에 폴란드 연출가와 무대미술가 야그나 야니츠카를 초청해 한국 배우들의 몸을 빌어 빚은 작품은 연출가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자면 범세계화(Global)를 이룬 작품이다. 회색빛 금속으로 둘러싼 건물벽 배경과 등장하는 공장 노동자, 의사, 고적대, 광대를 봐서는 시대와 배경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다. 20세기 중후반 중공업이 발달한 도시 외곽 어디쯤, 게오르그 뷔히너가 당시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희곡으로 쓸 1836년 독일과 물론 다른 공간이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인간 소외를 다룬 이후, 보이체크들은 여전히 그대로이되 뒤에서 불도저로 밀어내듯 무대 대부분을 차지한 무표정한 성과물을 웅장하게 무대로 불러왔다.
<보이체크>와 비슷한 시기 무대로 올라간 독일 30대 연출가 다비트 뵈슈가 연출하고 팔코 헤롤드가 디자인한 <우어 파우스트>(2011/09/03~10/03, 명동예술극장) 무대도 바닥부터 배경까지 빈 극장을 새까맣게 칠한 무채색 배경이다. <보이체크>보다 60년 앞선 독일을 배경으로 <우어 파우스트> 무대를 한 작품에서 싸늘한 회색을 넘어서 명도를 낮춰 검정으로 상정한 건, 산업화의 기계노동자들의 사회적 비극으로 다루기 이전, 이미 개인 내면에는 악마가 도사린다는 표현일까. 두 이방인 연출가 일주일 쯤 시간을 두고 올린 두 작품사이 재밌는 우연이라고 봤다. 글쎄 무대를 두고 역으로 해석하자면 원작마다 60년 간격을 두고 온통 흰색으로 꾸민 무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19세기 말 독일은 그러니까 흰색으로.
흰색 배경이라, 연희단거리패와 영국 20대 연출가 알렉산더 젤딘이 올린 셰익스피어 원작 <맥베스>(2011/02/08~03/06, 대학로 게릴라극장)가 떠오른다. 의상/무대 디자이너 사말 블랙이 꾸민 하얀 방, 흰색 가운, 하얀 속옷은 튀거나 옷에 묻은 붉은 피얼룩과 도드라지는 대비 효과를 이뤘다. 거미 고치처럼 공중에 달린 맥베스 부부의 침실은 피를 묻힌 손을 씻고 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는 공간으로, 부부의 탐욕을 순결로 은폐한 버티칼 뒤에서 은밀하게 해소하는 공간이었다.
앞선 두 작품에 <맥베스>를 더해 붙이니 그럴듯하지만 올해 세 편의 외국인 연출가 협업작을 두고 흰색부터 검정색까지 무대 채도로 엮은 연결 고리는 별 의미가 없다. 9월 공연, 중극장, 공공기관 초청, 유명배우 섭외, 독일 작가의 젊은(혹은 젊은 시절) 작품 등으로 <보이체크>와 <우어파우스트>를 묶어 비교 소개한 언론들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애초 국립극장과 명동예술극장 사이 경쟁 정도가 호사가들 입담으로 오르는 정도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 와중에 지인은 미니멀한 무채색 무대가 유럽 미술 및 연극의 추세라고 했다. 식견이 없어 모르겠으나, 내가 볼 때는 유럽식 취향보다는 그들이 평소 사용하는 익숙한 상징에 대한 낯선 관객들의 몰이해를 염려한 실용적 선택이라고 봤다. 더하느니 빼는 식이다. 한국어 특유의 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달력을 검증하지 못하는 그들의 염려가 무대로 강하게 드러나는 건 당연하다. 앞서 말한 실용적 선택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풀면 제작을 맡은 단체가 요구하는 일정 수준 이상 평가를 의미하고, 연극 미학에서 다가가면 왜소한 인간 군상을 드러내는 대비효과로 기능한다.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선입견을 배제하는 무채색 공간에서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과정 혹은 그 숨은 속성이 드러나는 과정은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처럼 보인다. <맥베스>에서 물어뜯고 뜯기는 이미지가 낭자한 피로 물들이면서 소극장 무대를 접사로 피사체의 속성을 확대해 낱낱이 드러낸다. 소극장 무대 한쪽 TV에서는 직설로 맹수들이 사냥하는 다큐가 나온다. 이에 반해 중극장 무대에 올라간 <보이체크>와 <우어파우스트>는 원거리에서 왜소화시킨다. 걷는 내 발아래 깔려죽는 ‘곤충의 세계’이다.
거대 공장 단지를 둥글게 성벽처럼 둘러 싼 <보이체크> 무대는 카프카의 소설 <성城,>처럼 관객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앞에서 벌이는 탐욕, 색욕, 비하, 살의는 개미들 놀이쯤으로 보인다. 보이체크가 인간 이하의 삶에서 단 하나의 희망인 아내 마리를 죽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뷔히너에게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부조리의 극치였다. 하지만 2011년 공장이 돌아가는 순환시스템 앞에 선 보이체크는 빠진 나사일 뿐이고, 의사나 소장이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아래 특정 소수 외에 대부분 서민들이 정도와 시간 차이만 있다는 건 언론에서 종일 다루는 기사다.
광대들이 등장해 극을 이끌고 소개하면서 보이체크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상을 조롱하지만,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는 공장작업용 지게차다. 무대 위 의상, 소품, 배경은 무엇 하나 배우들을 위해 마련된 용도가 아니다. 빌려쓰다가 돌려주거나 되돌려주어야 할 '낙인' 찍인 것들이다. 소속 없이 쇼핑카트에 아이를 싣고 다니는 마리가 견디지 못하고 바람을 피웠던 이유는 자유가 아니라 역으로 소속감이라 불리는 체제 안으로 들어가려는 욕망이다. 2011년 버전이다.
<보이체크>가 볼록하게 엎어놓은 컵 주변을 빙빙 도는 개미 군상을 보여준다면 <우어파우스트>는 오목하게 파 들어간 개미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개미들이 등장한다. 세 작품을 거리 기준에서 보면 접사와 망원 사이 어디쯤에 있다. 까맣게 칠한 무대는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원근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객석 바로 앞까지 접근한 에이프런 무대에 선 메피스토펠리스와 깊숙이 들어간 무대 안쪽 이층에 선 파우스트 구도에서 아득한 깊이가 느껴진다. 이층 무대는 무대 바닥에서는 계단 없이 둥글게 말려 올라간다. 악마를 피해 도망가는 학생이나 그레트헨은 도망쳐 오르려다 굴러 떨어지면서 체념하고 만다.
강렬한 록과 붉은 핏빛 영상이 객석 바로 앞까지 흘러 넘쳐 개미귀신이자 악마 메피스토펠리스의 광기를 보강한다. 하지만 연출의도에 호응해 이남희 충만한 연기로 펼치는 강간, 추행, 폭행에도 무대가 이미 지옥을 상정하는 바, 짜인 수순을 재확인하는 정도로 보인다. 원작 설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6명으로 줄인 등장인물 중 가족과 애인에게 버림받는, 유일한 희생양 그레트헨의 비극이 비극처럼 다가오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과잉 대비한 무대에서 구도 상 그녀의 순결함을 더하기 위해 원작보다 비중을 늘렸지만, 극의 격한 흐름을 거스르는 유일한 배역이라 캐릭터가 극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연출이 그레트헨을 두고 “가장 공을 들인 배역”이라는 말한 일환으로 그레트헨 오빠 발렌틴 비중을 키워 가족 구도를 보강한다. 발렌틴이 극 시작부터 보여주는 일련의 야구 동작이나 늘 들고 다니는 야구공 역시 우묵한 무대 구조상 어디로 멀리 날리든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보면 그녀를 비롯해 무대가 초반부터 너무 쉽게 풀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소개한 세 작품은 라이선스 뮤지컬 작업처럼 배우만 교체하는 식이 아닌, 모든 걸 새롭게 창작한 케이스이다. 연출가마다 무대디자이너와 짝을 이뤄 찾아온 이유가 충분히 있다. 무대디자인 비중이 연극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한국 연극이 어디에 주목하고 육성해야 할지 실마리를 보여준다.
나이, 언어, 국적이 제각각이나 EU로 묶인 이방인 연출가들이 한국에서 올린 무대는 고상한 문학적 상징이나 과거 재현에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가장 다급하게 위기로 느낀 건 잠시 머물다간 그들이 아니었을까. 유로화를 공통으로 써서 그럴까, 그들이 왜 그런 식으로 작품을 올렸는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이다.*
사진출처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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