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場[장] : Private Collection _ 최찬숙&극단 몸꼴&엘리어스 코헨
일시 : 2010년 9월 13일 ~ 2010년 9월 15일
장르 : 미디어+신체극+설치미술
기획/비디오아트 : 최찬숙
연출 : 최찬숙, 윤종연(극단 몸꼴 대표)
안무 : 엘리어스 코헨
출연 : 엘리어스 코헨(퍼포머), 김정은(퍼포머), 민기(퍼포머), 정안선산(기타), 조여진(첼로)
장소 : 문래예술공장
주최 : 서울문화재단
제작 : 남산예술센터, 원더스페이스
페스티벌 場
가을이면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이나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공연 축제가 열리는 서울에서 NEW WAVE 공연예술축제 '페스티벌 場'은 주목을 받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1997년 4월, 대학로에서 다양한 무대 실험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개최하였다가 중단된 뒤로 2009년 9월(남산예술센터, 총 4편)에 다시 찾아왔고, 2010년 가을에는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규모(남산예술센터, 문래예술공장, 총 6편)를 늘리고 베니스 비엔날레로 주목 받은 양혜규,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 중인 현대무용가 전인정, 설치미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윤동구 교수 등이 참여하면서 다원예술축제로 자리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2011년 8월 31일 현재, 올해 『페스티벌 場』이 개최한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다시 부활한 페스티벌 場의 2009년에 이어 2010년 무대에 오른 팀은 극단 몸꼴이 유일하다. ‘몸’을 소재와 주제로 천착하는 그들은 몸 외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이상 '페스티벌 場'의 장르간의 융합 체제가 비로소 제대로 놀 수 있는 조건이다. 틀이 짜인 무대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건물 로비, 통로, 계단, 외벽과 거리와 버스 어디에서나 공연을 올리는 그들은 관객과 배우 사이 경계를 지우고 다가와 ‘공연’인 동시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작품을 만든다. 공연인 줄 모르고 거리 공연을 본다면 딱히 분장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제 정신이 아닌 듯이 보이는 난점이 있긴 하다.
몸꼴
현대 미술은 “즉물적이기보다 개념적이고 결과물보다 과정을 주시하며, 평면적인 전시 형태가 아닌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주류가 되었지만 이런 아방가르드 미술이 “오늘날 비엔날레를 메우는 이러한 작품들 대부분이 ‘매체’라는 역사적 맥락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휩쓸리고 있다”(미술평론가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한국은 해묵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엔날레 본령은 어디로… 판만 떠들썩… 문제 작가 발굴엔 미흡’/한겨레신문 2010.09.14) 3대 비엔날레를 비롯해 아시아권에서 가장 많은 비엔날레가 열리지만, 과시적 이벤트 중심이라는 문제 제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극단 몸꼴의 몸에 대한 천착이나 그간 성과물로 볼때 2010 '페스티벌 場'의 주제이자 현대 예술의 흐름인 ‘공연예술과 미디어’의 저번에 깔린 중요한 질료이자, 현대 미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매체의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지는 탈주로의 지평에 공연 예술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고, 미술과 공연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요즘”이지만, “재현적이거나 상징적 기호작용이 발생하기 전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즉물적인 육체들이 이루는 실재적인 모임(real gathering)” (연극학자 한스 -티에스 레만Hans-Thies Lehmann)으로 완성도 있는 작업을 같이 꾸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완성도의 문제이기 이전의 공연 철학에 대한 접점을 찾기 힘들 때가 많다. 협업은 기본적으로 일방적인 한쪽 구도로 쏠리지 않을 수 있고, 작가 사이의 공유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미술과 공연 협업에서 공연은 ‘보여주는 미술’을 위한 종속적인 작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당신이 추는 춤이 이 작품에서 무슨 의미인줄은 아는 거야?”라는 불평이 나올 만큼 겉도는 단순 합성물을 보면, 차라리 어설피 섞지 않았으면 단조롭더라도 채도라도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 입장에서 소통을 위한 복합예술이 아닌 덧붙이기 위한 작업은 회의와 회피로 이어지고 협업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구도로 변질되기 쉽다.
몸꼴 대표 윤종연이 공동 연출을 맡고, 극단 대표 배우인 김정은과 민기가 퍼포머로 참여하지만, 설치미술과 비디오아트를 사용하고 외국 안무가가 공동 참여하는 작업에서 몸꼴의 비중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도) 몸꼴의 역할을 (역시) 눈여겨보게 된다. 문래동에 일찌감치 자리 잡은 극단과 문래동 노인들의 얼굴을 담은 인터뷰와 결과물을 발표하는 문래예술공장에 이르기까지 시작, 실행, 장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문래동에서 벌어진다.
녹綠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비디오작가 최찬숙의 영상이 신체극으로 주목 받아온 극단 몸꼴, 칠레 출신 안무가 엘리어스 코헨(Elias Cohen)의 몸짓, 다양한 악기의 소리와 결합하는 <Private Collection>은 얼굴에서 인지하는 5개의 테마로 이루어지는 옴니버스 공연을 통해 얼굴에 대한 새로운 신체적 소통미학을 보여준다.’'
유리
초행길이라, 작은 이정표가 아니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불을 밝힌 극장이 보인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서 왠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밤늦게 홀로 영업을 하면서 일찌감치 쥐죽은 듯 조용히 불을 끈 다른 공장들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오는 길에 만났던 비릿한 녹내가 날 것 같은 늙은 창녀들과 다를 바 없이, 밤에 활기를 찾는 문화의 홍등가나 마찬가지일까.
얼굴에서 인지하는 5개의 테마로 이루어지는 옴니버스 공연 첫 번째 에피소드는 로비에서 벌어진다. 로비 양쪽에 무전기를 들고 서 있는 공연관계자들과 무료하게 로비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은 딱 경찰서나 관공서에서 호출을 기다리는 대기소 풍경을 연출한다. 로비에 앉은 나는 분명 표를 끊고 들어왔는데도 점점 초조해진다. 벽시계가 8시를 가리킬 즈음, 안내데스크 유리창 너머로 굳은 얼굴 중년 남자 대신 코헨이 보인다.
‘안내데스크’라고 달아놨지만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건물을 들어설 수가 없는 첫 번째 관문, 경비실이다. 경비원은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오로지 직감으로 외부인을 판단해야 한다. 저 사람이 예술가인가? 노숙자인가? 손님인가? 잡상인인가? 예술센터라 자유로운 차림새로 예술가랍시고 들어오는 이들과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 이 일도 만만치가 않다. 코헨은 유리창을 정성스럽게 닦는다. 유리창은 존재하지 않는 듯 서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외부인과 코헨을 확실하게 가르는 경계이다. 그 경계는 쉽게 지문이 묻어 뿌옇게 변하기도 하고, 깨지기 쉬워서 쉽게 상처가 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경계를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과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잘 관리를 해야 한다. 관리를 잘한다는 의미는 곧 경계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무
공연을 펼치는 극장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보면 외부 장식이 전체 외형이고, 안내데스크는 사람의 얼굴이다. 유리창은 (상투적인 해석이지만) 눈이고, 코헨은 그 뒤에 뇌를 차지하고 앉은 자아(自我)이다. 시선을 통해 확인을 하고는 엄밀히 안내데스크에서 그의 신분을 따져 묻고는 최종 판단을 한다. 경계를 열고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3자인 관객들을 배제하면 경비원은 한가롭다. 외부인이 없으니 TV를 보다가 졸다가 할 일이 없다. 실제로 골몰 안쪽에 들어선 극장 앞쪽은 쇠락한 공장가가 그렇듯이 인적이 드물다. 현관과 안내데스크 사이 각목을 두 줄로 이어 짠 설치 작품이 마주하고 있다. 대패질을 하지 않아 결이 거칠게 일어난 각목 조합은 벽을 이루지만 중간쯤 얼굴을 내밀어 들여다볼 수 있는 틈새가 있다. 공사 현장 자재로 만든 설치물을 공연 내용과 연계하면 날것 그대로의 주름이다. 거칠고 두꺼운 나무 벽과 얄팍한 유리창,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소통의 불능이다.
벽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배우 김정은이 로비에 나타났다. 그녀는 관객들을 보면서 설치물에 빠르게 뭔가를 적는다. 인상이나 느낌일까. 그녀는 낯선 이들과 시선을 맞추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경비원은 그녀의 존재가 불안하다. 유리창을 살짝 열고 영어로 “난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가달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김정은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로비를 여기저기 뒤지면서 뭔가를 열심히 찾는다. 문래동 공장터에 들어선 낯선 건물, 그 이전에 자신이 남긴 흔적, 개인소장품(Private Collection)이라도 찾는 것일까. 그러자 경비원은 대놓고 소리를 친다. “난 널 몰라!” 외국인이 지키는 안내데스크는 역으로 배타적인 한국인들의 습성을 풍자하려는 의도일까. 말도 서로 안 통하는 이런 상황은 (백인을 제외한) 외국인을 상대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빈자리를 차지한 문래동 공장가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보다 상업지구가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문래동 변화와 적응하지 못하는 주민들 사이 갈등이 먼저 떠오른다.
김정은은 경비원의 만류에도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그녀의 동선을 따라 관객들도 계단을 통해 2층 박스시어터로 이동한다. 앞서 올라가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멈출 듯 느리다. 좁은 계단을 눕듯이 내려오면서 배우 민기가 관객의 이동을 방해한다. 8시 이후, 극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공연의 한 부분이라는 암시이자, 얼굴을 익히고 건물 안 즉,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소통 과정이 항상 예사롭지 않다는 과정을 보여준다. 2층 비상구로 들어가기 전, 2층과 3층 사이 김정은이 벽에 대고 강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왜 너는 날 모른다고 했지?” 이 둘의 행동은 이 둘을 배타적으로 치부하면 외면하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정의를 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난 이미 작품 속으로 빨려 들고 말았다. 이들의 낯선 행동을 단순히 즉흥적인 퍼포먼스로만 보기 힘들다. 앞서 얘기했듯 문래동예술공장은 그들의 집이다. 그렇다면 가식과 허위를 걷어낸 솔직한 행동일까. 내 경우에 빗대보면 그렇다.
쇠
1,000여 개의 철공소들이 밀집한 문래동에 공장 이전 정책과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슬럼이 되가는 공장 지역에 170여 명 예술가들이 문래예술창작촌에 자리를 잡았다. 철강촌의 예술촌으로의 교체는 단단한 성질을 가진 철이 갖는 규격, 성장, 수직, 발전 등 근대적 가치의 해체 및 경제 가치에 대한 미학 가치의 전복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정주민과 이주민의 가파른 세대교체가 보여주는 문래동의 재편 구도는 언론이 다루듯이 ‘급속한 문명발전을 이룬 철기시대의 종언’ 따위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80년대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상계동과 난곡동에 달동네를 이루었듯이 예술가들이 작업실로 문래동으로 몰리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낮은 보증금과 싼 임대료 때문이다. 그 안에서 뭔가 만들고 팔아야 하는 이들에게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이란 성가신 존재들이다. 문래동이 냉전시대의 상징, 무기 공장에서 예술거리로 탈바꿈한 중국 북경 ‘798예술구(大山子798)’처럼 안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역세권을 끼고 바로 몇 년 사이 개발붐을 타고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백화점, 대형마트, 주상복합 건물들은 이들과의 동거를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을 태세다. 문래동이 ‘철강 메카’로 빳빳하게 호황을 누렸던 때에 비해 구부러진 녹슨 못 처지가 된 현재를 생각하면, 예술 거리로 그 유효성에도 큰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이들마저도 정주민은 아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처음 발을 디디는 영등포역 주변에 노숙자촌, 쪽방촌, 홍등가, 공장, 철공소, 재래시장, 지하공동구가 들어섰다. 임노동자가 늘 들락날락 거리는 영등포역 부근에서 정주민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 문래동은 이주민들이 떠돌아다니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곳이다. 그중 몇몇은 돈을 벌었지만 훨씬 많은 숫자의 노동자들이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주름진 얼굴을 하고 낙향하거나, 근처를 맴돌다가 영등포 노숙자 쉼터로 들어온다. 국가 경제의 밑받침이라는 구호에 맞춰 살았다고 하나 칼날처럼 날선 강판이나 철근에 긁힌 상처는 부주의함을 드러내는 흉터일 뿐 삶의 훈장이 되지 못했다.
종이
계단을 올라오자 로비에서 박스시어터 입구까지 커다랗고 누런 갱지로 만든 종이봉투가 군데군데 바닥에 놓여 있다. 불투명한 봉투 너머로 불빛이 새나온다. 따로 객석이 없는 박스형 극장 안에도 같은 크기의 봉투가 객석으로 설정한 맨 바닥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있다. 민기, 김정은, 코헨은 방석을 깔고 앉은 관객들을 이끌고 봉투 안을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구겨진 봉투를 스크린 삼아 노인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비춘다. 최찬숙은 전공인 회화 대신 카메라를 택한 이유로 예술의 사회성을 들었다. 버려진 봉투 속에 담긴 흐릿한 얼굴은 문래동 노인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봉투 영상은 흐릿하고 인터뷰 내용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묻힌다. <Private Collection>이 고발 성격을 띠거나, 문래동에 대한 경제적 물결에 따른 재편을 두고 정치적 해석이나 고발을 하는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흐릿한 영상과 명확하지 않은 소음 속에 묻히는 말처럼 이들의 삶이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간격만큼은 정확하게 포착했다.
무대 앞쪽 막에 비균질한 연속무늬를 영상과 맞물린 쇳소리는 쇠와 쇠가 부딪히고 깎이는 철공소 일상에 빗대 문래동 노인들의 질곡을 표현했나 싶지만 감각으로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단정 내릴 수 없다. 날선 감각에만 의지하자면 쇳가루는 곧 비이고 눈이고 바람으로 문래동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과잉 이미지이다. 이윽고 종이봉투에 봤던 노인들의 얼굴이 사람 서넛 합친 크기의 거대한 비닐봉투 위에 투사된다. 작품에서 직접 문래동과의 연관을 지칭하는 경우가 없지만 문래예술공장을 공연장으로 택하고, 구조물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데에는 도구로 극장 기능을 넘어서서 기운으로 문래동과 직접적인 관계망을 관객에게 이으려는 시도이다.
전형적으로 해석하면 일제강점과 6.25동란과 가파른 근대화를 겪은 한국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그 자체로 삶의 굴곡이자 지문으로 애잔하게 다가온다. <Private Collection>는 거시적 사회 문제로 다루는 노인 소외를 넘어서 산업기지 역할로 내몰렸던 문래동 자체가 국가에 의해 자본에 의해 개인소장품처럼 취급당하는 현실, 이른바 박제 혹은 내부의 상황과 별도로 외부의 영향에 급격하게 변하는 현실에 미친다. 그렇다면 극장을 오기 위해 문래동을 걸어서 오가는 사이, 연출가와 몸꼴이 내가 걸어왔을 길 위에서 작품을 만들고 참여했듯, 내가 영등포역에서부터 문래예술공장까지 걸어오면서 겪은 일들이 작품 속에서 지향하는 사회적 함의를 품고 다가온다. 이런 해석은 자의적이고 광의적일 수 있다. 하디만 극장 로비에서 박스시어터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약식으로 맞닥뜨린 상황은 공교롭게도, 영등포역에서 극장까지 걸어오는 동선에서 겪은 문래동이 주는 이질감 혹은 생경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닐
객석에서 관객과 함께 종이봉투 인터뷰를 옆에 서서 보거나 앉아서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던 민기, 김정은, 코헨의 얼굴이 대형 비닐봉투 위에 비친다. 종이봉투를 들고 털고 구기다가 뒤집어쓰고 사라졌던 그들은 봉투 아래에서 기어 나온다. 각자 얼굴 앞에 서서 보여주는 몸짓은 격렬하지만 뒤에서 쏘아 비닐봉투에 비추는 영상은 배우들의 행동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봉투 속으로 들어가거나, 뭉개거나, 심지어 찢기도 한다. 봉투가 너덜너덜해지거나 우그러들수록 비치는 이미지도 자연히 변하고 바뀐다. 다원예술로 미디어 작업이 허상과 실재 사이 환각을 다루는 수준에서 멈추는 수준인 경우가 많지만 최찬숙의 의도는 기록 도구로 카메라가 가진 진정성에 초점을 맞춘다. 한때의 기록이 모든 삶을 대변할 수도 없고 대변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바람이 들어찬 비닐봉투는 찢어질 듯이 아슬아슬하다. 그 뒤에서 일관되게 얼굴을 보여주는 비닐봉투 이미지를 우스꽝스럽거나 기괴스러운 이미지로 바뀌는 행위는 기계적 작업이 아닌 실제 주인공들의 물리적 현실 변화에 따른 심리적 파장과 유사하다. 실제 삶이라는 연속선상에서 로비에서부터 관객의 동선과 함께 올라와 종이봉투를 보고 쓰고 사라졌던 이들의 일련의 행위들은 관객들과 통일성을 확보한 뒤에 문래동 노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 사이 공통점을 확보한다. 이제 작품에 참여한 노인과 작품을 만든 예술가와 보러 온 관객이 서로 동등한 자격, 즉 동질감과 현재성을 확보한다. 관객과 작품 사이 겹치는 교감이 교차하는 찰라나 선을 넘어서려는 의도는 이제 하나의 상징으로 문래동 안에 포개진 문래예술공장 자체에 녹아든다.
문래동
저녁 7시가 좀 지난 시각, 1호선 영등포역에서 문래예술공장까지 걸어가는 인도는 어둡고 싸늘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길 위에서 잠시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 역사에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문을 닫은 철공소들과 고물상 사이, 오토바이 한대가 양껏 철을 싣고 달리면 벽으로 바짝 붙어야 하는 골목길 안쪽에서 촉수 낮은 전등불빛이 새어 나온다. 불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할머니 한 분이 왠지 긴장한 듯 서성거린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걸어오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나를 향해 낮게 뭐라고 소곤거린다. 취객이 다니기에는 이른 시각, 하지만 툭 치면 녹슨 못처럼 툭 끊어질 것 같은 이들은 취객들을 피해 숨지는 않을 것이다. 부채를 들고 호객꾼으로 나선 늙은 창녀는 부끄러울 게 없다. 6차선 도로 건너 불을 밝힌 대형 백화점 간판 불빛에 나와 그녀는 잠시 눈을 마주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이미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극장까지 10분 남짓 걸어오는 사이, 6차선 도로가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르는 아주 뚜렷한 경계 역할을 한다. 평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길 건너 화려한 다국적 커피숍 간판을 보고는 길을 건널까 잠시 망설였다. 혼자 길을 홀로 걷는 남자라 길 위에 드문드문 서 있는 늙은 호객꾼들의 기대감 서린 시선이 부담스럽다. 인도 위 나앉은 할머니와 걷는 나 사이에도 경계가 지어졌다. 할머니는 최대한 골목 안쪽 경계에, 나는 최대한 도로 쪽 경계에 붙어 걷는다.
저녁 9시 20분 쯤 극장에서 나와서 다시 영등포역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큰길 대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극장 앞 작은 중국집 불빛이 환하다. 얼굴이 불콰해진 중년 사내들이 보인다. 공연보다 소주 한 잔에 위안을 찾는 게 익숙할 테다. 불을 밝힌 철공소가 있고 그 앞에 자전거에 기댄 아저씨가 빗자루를 들고 공장 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흘깃 보니, 공장이 텅 비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아주머니 한 분이 뭔가 아쉬운 듯 공장 여기저기 남은 잡동사니를 뒤적거린다. 속이 텅 빈 철공소는 방금 보고 나온 안에서 불을 밝힌 종이봉투, 그리고 뒤에서 영상을 투사한 비닐봉투를 보면서 느낀 먹먹함의 한 가지 이유이다.
좀 더 걷다가 결국 큰길 쪽으로 꺾어 나오고 말았다. 가로등도 없는 어둠에 잠긴 골목길 저 만치에 창녀 서넛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쩌면 창녀가 아닐지도 모르나 왠지 그 앞으로 지나가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길로 나오는 골목 안 담배를 파는 간이 구멍가게 쪽문 안으로 화투 패를 돌리는 아저씨들이 보인다. 큰 길로 나오자, 오는 길에 보지 못했던 길 건너 홍등가 불빛이 환하다. 당당히 얼굴과 몸매를 드러낸 그녀들과 방금 어둠 속에 있던 그녀들을 가르는 건 6차선 도로만이 아닐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그새 호객꾼 할머니들이 늘었다. 하지만 나를 더 이상 유심히 보지 않는다. 역에서 나오는 이들과 역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목적을 피부로 알고 있다. 마주 걸어오던 허름한 차림새 40대 후반쯤 남자가 오라는 말도 간다는 말도 없이 앞장 선 호객꾼 아주머니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간다. 아주머니는 허리 아래에서 손가락을 세 개 혹은 네 개를 펴 보인다. 역시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갑자기 코믹한 연기가 일품이었던 코헨과 민기 사이 상황이 떠오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쿵하고 짝하고 맞았던 그들처럼 이들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밤거리에서 그들과 나 사이 경계는 도로도 건물도 불빛도 아닌 내 시선이었는지 모르겠다.
개인소장품
최찬숙은 비디오아트를 미디어아트와 구분하면서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과도하게 왜곡된 영상물의 폭력성”에 대해 아직 많은 고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사이 3D 영화 붐에서 보듯 과잉을 넘어선 정교하게 왜곡된 이미지가 문화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왜곡과 편집을 가하지 않은 영상물 작업을 하는 그녀가 가진 진정성이 관객과 만나 동의와 확장으로 발휘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Private Collection>과 우연히 본 문래동 밤 풍경을 두고 동질성 운운하는 건, 작품에서 문래동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이상 상상의 나래이고 해석에 오류가 생길 여지가 있다.
최찬숙이 말하는 예술의 사회성 확보도 비디오가 기록 매체로 선택적으로 구성된 상황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벌어진 일을 재생산하는 대응이라는 점에서 과연 현실에서 진의를 획득할 수 있을까 싶은 의혹이 든다. 종이봉투, 비닐봉투라 일회용품을 사용한 데에는 자본 논리에 사상, 이념, 감정 등 빠르게 소비되는 즉물적인 세상에 대한 대응으로 기록의 가치에 대한 천착을 엿볼 수는 있다.
역사가 가까워지자 24시간 문을 연다는 해장국집 앞에서도 호객꾼이 나와 있다. 그 앞 공중전화 박스에는 짐을 잔뜩 챙긴 가진 외국인 노동자가 한 칸을 차지하고, 나와 차림새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가 나머지 한 칸을 차지하고서 전화기 버튼 대신 유리창 너머로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본다. <Private Collection>에서 배우 코헨은 건물주(정주민)가 아닌 고용된 경비원(이주민)이면서도 마치 자신의 집인양 배우 김정은(과거 정주민 = 이주민)을 경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외부의 접근을 무시한 채 전화박스를 차지한 남자에게 반 평도 안 되는 그 공간을 둘러싼 유리창은 보호막이 되어줄 것인가. 토사물 흔적이 바닥에 있고 유리창에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은 현실은 냉정하고 잔인하다. 난 잠시 흘끗 보다가 떨쳐내려는 듯이 바삐 역사 안으로 사라진다.* (ver 3)
사진출처 - 페스티벌 장, 극단 몸꼴
New Wave 공연예술축제 Festival 場[장]
장소 |
작품명 |
일정 |
공연단체 |
장르 | |
남산 |
죽음에 이르는 병 |
9.11~12 8PM |
사무소 |
문학+연극+설치미술 | |
The Wall |
Remixed Conventions |
9.16~17 8PM |
Nebular Factory |
미디어+ | |
Blended Eyes 2 |
9.18 6PM | ||||
찰나가 부르는 시간 |
9.23~24 8PM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
설치미술+음악+미디어+무용 | ||
원더 |
원 <一, one> |
9.9~10 8PM |
블루엘리펀트 |
영상+무용+동해안별신굿 | |
LOVE ver.2010 |
9.17 8PM |
키라리☆후지미 극장& |
연극+사운드+영상 | ||
문래 |
Private Collection |
9.13~15 8PM |
최찬숙, 극단 몸꼴, 엘리어스 코헨 |
미디어+신체극+설치미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