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논쟁La Dispute] 우리 역시 겪는 과정 / 세심하게 새긴 조각상처럼

구보씨 2010. 3. 16. 16:10

논쟁La Dispute / 마리보(P.Marivaux)





이러나 저러나 <논쟁>은 누드 논쟁에서 벗어나기 힘든 작품입니다. 작품의 완성도나 주제를 떠나 한국 사회에서 성에 대한 검열을 떠올려 보면 그렇습니다. 물론 벗는 게 꼭 필요한가, 아닌가를 두고 판단을 내린다지만, 그걸 누가 정답을 내릴 수 있겠어요. 이런 부담을 작품은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배우들이 누드로 연기를 펼치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이 작품이 지금처럼 많은 관객을 만나기가 힘들겠지요. 역으로, 누드에 대한 주목으로 인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관객 리뷰를 보면 작품이 하고자 하는 남녀 사이의 본질적 차이에 대한 '논쟁'보다는 누드에 대한 얘기에 주목합니다. 작품이 하고자 하는 남녀 사이의 원초적 문제보다, 지금 현실에서 누드로 보여준 그들의 몸에 대한 의미가 훨씬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안티 에이징, 다이어트에 한해 쏟아 붓는 사회적 비용과 관심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작품에서 누드가 관객에게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면, 오로지 배우들의 열연 때문입니다. 연극을 올리는 70분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익히 평소부터 몸을 만들고 긴장을 해야하는 과정에서 그럴 것입니다. 단순히 몸매를 가꾼다는 의미와는 당연히 다르겠지요.

극중 18세라니, 분장과 의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회와 격리된 채 사육사 외에는 본 적이 없으니 화장을 진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며, 몸은 젊음의 가장 좋은 한 때를 보여주어야 하니, 또 오랜 시간 준비했어야 할 것입니다.

 

'나'역의 윤채연 씨나 '너'역의 이은주 씨는 아무래도 18세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이에 따라 당연히 처지게 마련인 뱃살이나 가슴을 관리하는 일은 연극 이전부터 꾸준하게 준비를 했을 것이면서, 아울러 공연 전날 혹은 당일 무엇을 먹는가, 혹은 컨티션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늘 긴장하고 꼼꼼하고 세심하게 관리해야 했을 겁니다.

 

남자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 그럼에도 남자 배우들의 울퉁불퉁한 근육은, 특히 '우'역의 최규화 씨의 근육은 작품에서 말하는 사회와 완전히 격리하여 이른바 사육장에서 자란 18세의 몸이라기 보다는, 마치 약육강식 원시 사회의 근육처럼 보였습니다. '누' 역의 윤길 씨의 몸은 좀 더 부드러워서 작품에 보다 잘 맞았지요.

 

원작을 읽지 못해서 판단내리기 힘들지만 당시 이른 초혼 연령으로 보아, 그리고 남녀가 이성에 대해 눈뜨는 시기로 봐도,  극중 18세라는 설정보다 좀 더 어리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봅니다. 하지만 극중에서는 구체적 실험이라기 보다 부부의 사소한 논쟁에서 실험이 시작되었다는 설정이니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극장 밖 성인 인증과 서약서, 극장 안 카메라, 휴대폰에 민감한 스탭, 내적으로는 극중 '사회적' 성인을 기준으로 삼은 '18'세라는 설정은 사회적으로 무척 중요합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자칫 성년이 된 이들의 나이가 18세가 아니라면, 자칫 우스운 상황이 될 뻔했으니까 말이지요. (극중 배경을 현실로 옮긴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3월 16일 초연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긴장하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몰입을 못하고, 같이 부끄러워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멋지게 소화했습니다. 재공연이라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첫날이다 보니,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몸이 긴장한 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만, 알몸이다 보니 가릴래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럼에도 심지어 천역덕스러울 정도로 놀랍게 관객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어떤 무대, 의상, 효과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 승부를 걸었는데도 오히려 희번덕스러운 탐욕스런 관객들을 어르고 달래서 풀어주더란 말이지요. 정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 배우들 임에도 참으로 대단한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이들 만큼의 좋은 몸은 수없이 생산(?) 혹은 복제(?) 되고 있지만, 이들의 연기 만큼은 독보적으로 보입니다. 특히 가장 먼저 알몸으로 등장해서 어쩌면 비로소 무대를 여는 역할을 하면서도, '나, 너, 누, 우' 중 유일하게 더블캐스팅이 아닌 윤채연 씨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남자와 여자 중에서 누가 먼저 변심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이 시대에서는 부질없습니다. 지금의 사랑이란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정답을 내릴 수도 없고,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지요. 어쨌거나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란 게 인간에게 한정된 게 아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원초적 갈망이라고 보면, 애를 낳지 않으려는 2010년 대한민국 사회가 뭔가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극이 진행될수록, 여자는 숭배 대상이 되길 원하고, 남자는 숭배 대상을 찾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수많은 논쟁이 벌어질 수 있겠지만, 연극과 상관없이 끝없는 논쟁거리가 될 만한 얘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의를 하지만 예상가능한 보편적인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작에 따른 부분이겠지만요.) 사실 제 눈길을 잡은 쪽은 누드 연기를 펼치는 이들이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있는 베일에 쌓인 인물들입니다. 음악, 조명, 관찰을 맡은 그들은 통일한 검정 유니폼에 실제로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익명성 안에 있는 인물입니다.

 

아마 사회 관계에 대한 설정인 듯도 하면서도, 그들 역시 같은 과정을 반복해왔다는 암시를 비칩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가 단순히 논쟁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치루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담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면 이들에게 좀 더 주목해볼 참입니다.

 

연극 시작 전에 고요하게 들리는 음악은 극단 서울공장의 대표적 작품인 '두 메데아'에서 제의를 앞둔 상황에서 들은 음악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메데아' 역시 악녀로 알려진 메데아의 두 가지 내면을 심도 있게 파고 들어 조명한 멋진 작품이지요. <도시녀의 칠거지악>을 비롯하여, 근래 극단 서울공장의 대표작 세 편을 보면서, 기원전 5세기 그리스 - 18세기 프랑스 -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시대를 관통하면서 이어지는 큰 줄기를 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들의 행보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3월 16일 초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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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전에, 16일 <논쟁> 초연을 이미 봤습니다. 겨우 11일 만에 다시 찾은 이유라면 초연과는 다른 조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무엇보다 더블 캐스팅으로 새롭게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기 위해서 였어요. 새로운 알몸을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초연 당시 리뷰에서 썼지만 다른 몸, 그러니까 다른 연기를 보고 싶었습니다. '나'역의 윤채연 씨는 홀로 담당하는 무시무시한 내공의 배우이라는 걸 알았고, 나머지 너, 누, 우는 초연 당시와 다른 배우들이 출연하는 걸 캐스팅 일정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27일 공연에는 '누' 역 윤길 씨 대신 임영준 씨만 바뀌었을 뿐, '너'와 '우' 역은 초연 당시와 그대로였습니다. 그래도 분명 성과가 있었습니다. 작품을 단순히 누드를 넘어서서 확인했거든요.   

 

'그럼에도 남자 배우들의 울퉁불퉁한 근육은, 특히 '우'역의 최규화 씨의 근육은 작품에서 말하는 사회와 완전히 격리하여 이른바 사육장에서 자란 18세의 몸이라기 보다는, 마치 약육강식 원시 사회의 근육처럼 보였습니다. '누' 역의 윤길 씨의 몸은 좀 더 부드러워서 작품에 보다 잘 맞았지요.'

 

초연을 보고 쓴 후기에서 '우' 역의 최규화 씨 몸이 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이 '누'역의 새로운 임영준 씨를 보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 역의 이은주 씨가 윤채영 씨 가슴과 자신을 비교하는 대목도, 비교적 중성에 가까운 허스키한 목소리도 말입니다. '누' 역은 '우' 역에 비해 캐릭터 자체가 상대적으로 근육이 부드럽고 여성적인 곡선에 가깝습니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행동도 여성스럽습니다.

 

이은주 씨의 '너'가 윤채연 씨의 '나'와 가슴 크기를 비교하는 장면은 실제로 배우 몸에서 차이가 드러나야 하는데요. 이 역시 단순히 배우들 몸매의 차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은주 씨가 남성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연기를 합니다. 부러 목소리를 최대한 굵게 내뱉고, 보다 말괄량이처럼 괄괄한 연기를 펼치지요. 그제야 왜 가슴 크기를 비교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에 반해 윤채영 씨의 '나'는 질투심이 더욱 강합니다. 소유욕도 강하구요. (쓰고 보니 도식적인 구분이 되었지만요.)

 

이름을 두고 비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역시 원작 설정을 모르니), '누'와 '나'가 서로 이름을 부를 때, 근친상간을 떠올리는 게 되는 이유가 단순히 이름에 따른 게 아니라, 둘 다 여성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우'는 동물 울음소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내내 배우들이 서로 부를 때도 그렇게 들리구요.

 

그러니까 '나'가 '누'와 '우'를 둘 다 소유하려고 하는 이유를 따져 보면 단순히 아이들 욕심이 아니라 한 명은 남매와 같은 존재로, 한 명은 숫컷과 같은 존재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초식남과 짐승남이랄까요. 이런 구분이 정확할 지는 의문입니다. '너' 역이나 '우' 역의 다른 배우들이 실제로 이런 연기를 펼칠 지, 혹은 알몸이 바로 분장이자 의상이자 효과라는 면에서 그런 차이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초연 당시 주인공에만 집중을 하느라 놓쳤던 '이'나 '랑'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이들은 배경인 나이트클럽 사장 '놈'의 속셈을 대변하는 말 그대로 '놈이랑' 놀아나는 인물입니다. '나너우누'에게 '이'와 '랑'은 결코 처음 만난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훈육을 합니다만, 뒤 으슥한 곳에서 곧 이어 '놈'이 '랑'에게 돈을 주면서 엉덩이를 쓰다듬습니다. 결국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식의 실험을 본 '년' 훈육 대상이 된 이들만 '놈'에게 놀아난 꼴이지요. 적어도 연극에서 '년'이 알몸인 이들에게 환호를 보내기는 하지만 바람을 피우는 장면이 없다면, '놈'은 '년'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니까 말입니다.

 

가장 불행한 이들은 역시 실험 대상인 '나너누우'입니다. 이들은 다른 이성에게 끌리는 당연한 본성을 교육(?)을 통해 '우아하게' 통제를 하게 됩니다. 이유가 뭘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혼 제도를 통해 성을 통제하면서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성의 통제야말로 사회의 가장 억압기제인 셈입니다.

 

그리고 재공연을 보면서 새삼 알게된 사실인데,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극장에 낮게 깔리는 음악이 있습니다. 이들을 교육시키는 음악인데요. 극 시작 전부터 이미 이런 교육이 시작되고 있고, 그리고 극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교육은 극 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 만큼 겉으로는 성에 대해 보수적이면서도 성범죄나 성 관련 사업이 번성한 나라가 없다지요.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 작품이 주는 의미를 배우들의 '알몸'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 두 번째 저녁 공연이기도 했지만, 초연 당시보다 좀 지쳐보였습니다. 관객들의 시선도 그렇고, 평소 몸 관리도 그렇고, 쌀쌀한 날씨도 그렇고 여러모로 에너지가 소모되는 공연입니다. 그래서 더욱 관객들이 봐야하는 공연이기도 합니다.* (3월 27일 공연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