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모텔-Risk Everything] 밖에서 보면 평온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번 대선을 보니 왠지 한판 도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무하기도 하구요. 입장 차이가 있겠지만, 글쎄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밑바닥 인생들이 앞으로 이 세상을 잘 견디어나갈 수 있을까요? 내년 봄까지 노숙자와 쪽방과 싸구려 여인숙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그들은 용케 견디어서 봄꽃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요? 날씨가 풀렸다는데 여전히 춥습니다. 두루 한 겨울 잘 견디어 내시길 바랍니다. [2012.12.20]
제목 : 변두리 모텔-전부를 걸다(Risk Everything)
기간 : 2009/10/15 ~ 11/08
장소 : 대학로 정보소극장
출연 : 박명신, 이경, 김태성, 오준범
작가 : 조지 워커 George F. Walker
연출 : 백로라
주최/주관 : 극단 창파
전에 살던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에 있는 동네에는 모텔이 많다. 그럴듯하게 외관을 꾸몄지만, 서양 혹은 아랍의 궁전 형태를 어설프고도 요상하게 치장한 모텔은 전보다 이질감이 더 강했다. 변두리 유흥가의 과잉 경쟁이 무모한 선택을 부른 셈인데, 한곳이 변하면 곧 다른 모텔도 외관을 바꿨으므로, 누구랄 것도 없이 장사는 늘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어스름한 오후 대부분 늘 한가한 건물을 보면 불이 대부분 꺼졌으나, 두어 곳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이 있기도 하였다. 변두리 모텔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가끔 모텔을 제 집 드나들듯, 그러니까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모텔에 살림을 차린 듯이 보이는 남루한 차림새의 남자가 종종 모텔 앞 놀이터에서 눈에 띄었다. 그를 직원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는 너저분한 옷차림과 소주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극작가 조지 워커의 ‘변두리 모텔-전부를 걸다(Risk Everything)’는 내가 지나가면서 스윽 봤던 모텔 현관문 안쪽을 타고 들어가 방안을 엿보는 작품이다. 앞서 말한 우리 동네와 다르게 캐나다의 어느 변두리 모텔 방에서는 한창 포르노 비디오를 찍고 있고, 옆방에는 섹스와 알콜 중독에 도박 사기꾼인 엄마가 전직 창녀출신 딸과 전과자 출신 사위와 함께 숨어 들어와 산다.
사기를 제대로 벌인 엄마 캐롤(박명신 분)이 믿는 건 오직 돈, 딸도 사위도 오랜 동료도 소용없다. 인생 마지막에 제대로 한 판을 벌였다. 그런 엄마를 둔 덕에 덩달아 쫓기는 몸이 된 딸 데니스(이경 분)는 기가 막힌다. 더욱이 TV만 끼고 사는 남편 레이놀즈(김태성 분)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팔랑귀의 소유자,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옆방 포르노 감독 마이클(오준범 분)까지 캐롤에게 합세를 해서 데니스의 신경을 온통 긁어 놓는다. 캐롤은,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팜므파탈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같은 여성이자 엄마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데니스에게는 통할 리가 없다.
해외 공연 사진
캐롤이 악당 제프리즈에게 6만8천달러를 사기 도박으로 가로챘지만, 사위 레이놀즈와 마이클이 산산조각이 날 지경이다. 제프리즈가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이 둘에게 시한폭탄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캐롤은 결국 돈을 다시 돌려주고 이야기는 끝난다. 작은 방 안에서는 극적인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지만 모텔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다. 이들 가족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까? 캐롤의 천연덕스런 말처럼, 자신은 “인생 후반부에 이르면 좀 더 가거나 조금 덜 가야 하는데, 자신은 더 가는 쪽을 택했을 뿐”이라는 변명처럼 그들은 여전히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배팅을 하고 있을까. 데니스는 사회복지기관에 맡긴 아이를 찾아왔을까? 모를 일이다. 모텔 밖 놀이터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느니 한 번 인생을 걸고 운을 시험해보는 게 좀 더 나은 선택일까.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
캐롤 역의 박명신을 비롯해 네 명 배우들은 유들유들한 연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낙오자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드라마로 혹은 연극으로 워낙 범람을 한 탓인가, "좇같은 거짓말쟁이"라는 식의 대사가 19금이긴 하지만 섹스중독자, TV중독자, 포르노 감독, 전직 창녀라는 캐릭터치과는 전체적으로는 얌전하고 무난하다. 다시 말해 그 지루하고 루즈하지만 치열한 삶의 밑바닥을 보여주기에는 다소 무리라고 봤다.
모텔에 걸린 시계에는 시침, 분침이 없다. 사소한 실수일까 싶었지만 어느 순간, 초침이 열심히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조명이 시계를 비추며 끝난다. 초침처럼 하루는커녕 다음 순간을 예감할 수 없는 삶,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