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라, 사드] 극중극이 극을 뛰어 넘어 현실에서 마구 날뛰는 작품

구보씨 2009. 10. 8. 16:54

극단 풍경과 처음 만났고 홍원기, 남명렬 배우의 명연기에 빠졌던 <마라, 사드>입니다.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극중극이라, 관객들이 극중극 배우와 관망하는 배우들을 가운데 두고 외곽 사각 무대를 빙 둘러싼 형태였는데요. 좀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입구쪽 사각 모서리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흥미로웠던 점이 퇴장이 없으니 극중극을 하지 않는 배우들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답게 계속 연기를 해야했었습니다. 관객들이 무대 중심을 보고 있을 때, 전 외곽에 앉은 배우들을 보고 있었는데요. 집중력이 대단했습니다. 베테랑과 젊은 배우들이 함께 펼치는 무대는 작품이 주는 감상과 별개로 참 보기 좋습니다. [2012.11.27] 

 

제목 : 마라, 사드

기간 : 2009/10/08 ~ 2009/10/18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 페터 바이스

출연 : 홍원기, 남명렬, 임성미, 박윤정, 백익남, 강진휘, 김민상, 윤복인, 서봉원, 이기동, 김기법, 김태우, 한준성, 장성익, 강동수, 이중구, 임호경, 윤금선아, 임유나, 황정화

연출 : 박정희

제작 : 극단 풍경

주최 : 극단 풍경, 아르코예술극장

 


극장을 나와서도 그 파장이 길게 꼬리를 드리운 작품이 있다. 그럴 때면 우선 극장 안팍의 온도 차로 당장은 먹먹하다. <마라, 사드>를 막 보고 나온 참이다.

 

1793년 7월 13일,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급진적인 강경파 혁명가 마라, 프랑스 혁명에서 피를 부른 혁명을 이끈 그는 온건 혁명파인 시골처녀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한다. 세월이 흘러 1808년, 샤랑통 정신병원에 갇힌 사드 후작은 정신병원 환자들을 배우로 삼고 직접 극을 쓰고 연출을 맡아 ‘마라의 암살 사건’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 이후 1964년, 작가인 페터 바이스가 <사드 씨의 지도하에 샤랑통 병원의 연극반이 공연한 장 폴 박해와 암살>이란 제목의 희극을 써내어 불씨를 되살렸고, 이후 약칭 <마라/사드>는 전 세계의 극장에서 올라간다.

 

극단적인 혁명가 마라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사드의 격렬한 대립과 토론을 뼈대로 삼은 연극 <마라, 사드>는 마라 암살 사건 당시의 프랑스 혁명(1789~1794)과 그 이후 사드가 정신병원에 갇혀 공연을 올린 나폴레옹 1세 집권기에 대한 이해를, 간략하게라도 필요로 한다.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이념 아래 일어난 시민 혁명의 전형’이라 불리는 찬란한 프랑스 혁명 이후, 사드 자신부터 의학적으로 정신지체나 분열이 아님에도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나폴레옹 집권 시대이다. 사회가 타자他者로 구분해 한 곳에 몰아넣은 사회의 정신병자(깡패, 창녀, 동성애자, 다운증후군, 뇌성마비장애인)들과 벌이는 연극이라는 배경을 이해하는 게 우선 중요하다.

 


Jacques Louis David, The death of Marat(1793)

 

혁명이 끝난 지금, 과연 마라, 네가 말하는 찬란한 ‘혁명 이후’가 왔는가? “난 모든 희생을 경멸한다. 난 나 자신을 믿을 뿐”인 그의 개인의 혁명을 철저하게 이루고자했던 냉소가 극에 달한 개인주의자 사드에게는 마라의 거창한 주장과 그에 따른 어이없는 죽음은 정말 엄한 짓에 지나지 않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죽은 마라의 망령을 정신병자의 몸에 불어 넣어서 그를 힐난하고 따지고 덤비면서 이른바 논객 대결을 벌이는 중이다. 

 

그렇다면 굳이 글로 써도 그만인데, 연극 형식을 빌은 이유가 있을까. 연극은, ‘관객’이 있는 법, 사드가 벌이는 연극을 통제하고, 지켜보는 샤랑통 정신병원 원장 쿨미에가 있다. 쿨미에 원장은 사사건건 사드의 연극을 멈추고 불평을 하고 장면 삭제를 요구한다. 사드가 마라와 극을 이루는 인물이라는 점도, 그러니 왜 마라의 암살 사건을 올린 것인지도, 그 배경을 알지만, 마라 역을 맡은 배우의 입을 통해 다시 반복되는 혁명의 기치는 연극에 참여한 코러스, 관객 역할을 맡은 배우들, 그러니까 정신병자들을 다시 한 번 불같이 술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Pieta> 1499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하수도에 숨어 지내다가 지독한 피부병과 두통을 앓았던 마라가 쾌락의 극을 좇은 사드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미치광이’(극중극)이지만, 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그 대상인 통제, 분리, 감시, 규율의 상징 병원장 쿨미에(극 중 현실 1808년)를 겨냥해 올린 것이다. 그리고 마라와 쿨미에를 비롯해 사회적 혁명 따위를 떠들어대는 세상(관객, 2009년)에 대고 조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게 미치광이들의 우스꽝스런 한 판 광대극인양. 

 

극중극이 끝나면, 진행자가 나와 지금 우리에게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관객의 선택을 통해서 극의 마지막이 바뀐다고 하는데, 극장에 입장할 때 받은 카드는 검은색(사드)과 붉은색(마라)으로 앞뒤가 다르다. 8일 초연에서 관객들은 엇비슷하게 갈렸나 보였지만 다수결로 마라를 선택했다. 폭력의 불가피함을 주장한 한없이 투명한 순수를 요구하는 혁명 정신은 타협을 용인하지 못하기 마련인 법. 전쟁, 시위, 테러 현장을 담은 영상이 극장을 비춘다.

 


Paul Baudry, Charlotte Corday after the murder of Marat (1861)

 

사실 결말이 다소 엉뚱했는데, 내내 긴박하고 어떤 결과를 보일지 모를 전개에 비해, 관객의 선택 이후가 어느 정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올 초 올린 서울시극단의 박근형 연출 <마라, 사드>도 같은 고민을 했지 싶은데, 극단 풍경의 <마라, 사드>는 관객과의 눈높이 조율에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관객들과의 소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우리네 마당놀이처럼 열린 무대, 변형된 '아레나' 무대에서 마라 홍원기, 사드 남명렬을 비롯해 노련한 배우들과 젊고 패기 넘치는 배우들이 퇴장 한 번 없이 관객들과 내내 긴장을 하며 고스란히 상대를 한다. (무대 사각 지대 바로 옆에도 객석이다. 극의 진행과 상관없이 배우들은 내내 몰입을 해야만 했다. 놀랍고 대단하다!)

 

 

Edvard Munch, The death of Marat1 (1907)

 

아무려나 ‘형식면에서 스트린드베리히의 연극기법, 아르토의 잔혹극, 브레히트의 서사극 그리고 극동지방 연극의 모든 요소를 이용’을 고려해 썼다는 페터 바이스의 입장을 비롯해 관련 시대에 대한 호기심을 한껏 올려준 작품이다. 먹먹함까지 내 것으로 만들 욕심을 부려볼 만하다. <마라, 사드>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현실과 조우하는 시의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양극단이, 여전히 양 극으로 갈리는 현실이 그 안에 있다.*

 

 

 

사진출처 - 극단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