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The Seafarer] 술냄새 풍기는 크리스마스 동화
제목 : 뱃사람 The Seafarer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10월 8일 ~ 2009년 10월 18일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시간 : 평일 8시, 토요일 4시, 일요일 3시 (월 쉼)
출연 : 이호재, 정동환, 이남희, 이대연, 이명호
주최 : 아르코예술극장, 극단 컬티즌
부두
<뱃사람 The Seafarer>은 연극 <거기(원제 The Weir)>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일랜드 작가 코너 맥퍼슨 작품이다. 그의 2006년 작품으로 <거기>처럼 아일랜드 바닷가 특유의 우울과 황량함을 배경으로 삼았다. <거기>의 별 볼일 없는 노총각들의 20년 후를 옮겨 놓은 듯 50대 별 볼일 없는 루저들의 이야기다. (<거기>에 이어 <뱃사람>의 번역도 성수정이 맡았다. 플러스 요인이다.)
2009년 아르코예술극장 기획공연 선정작(arko choice) <뱃사람>에 기대가 한껏 올라간 이유는 역시 배우다. 더도 덜도 아닌 딱 5명 출연진이 이호재, 정동환, 이남희, 이대연, 이명호 라니! ‘어쩔 수 없이 배우 예술’이라는 연극을 두고 이만큼 꽉 찬 무대를 본 적이 있나 싶다. 이들 중 한둘이 함께 하는 무대를 간혹 본 적이 있으나 딱 다섯 명이 함께 모인 무대는 처음이다. 이를 비교하면, 뭐랄까, 아이돌 걸 그룹의 인기 멤버들이 모인 프로젝트 그룹 ‘4Tomorrow’ 등장에 비견될만한 일이다!
“내가 연극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배우들에게 배운 것이다.” 배우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 작가 코너 맥퍼슨이 보았더라면 박수를 치고 기뻐했을 일이다. 번역 성수정도 “대본을 접할 때마다 배우들이 그 역할로 분해 나타나지만 그 확률은 포커가 뜰 확률”이지만 “뱃사람은 그런 기적이 일어난 공연”이라고 흥겨워한다.
하지만 산에 한 마리가 있을 때야 호랑이가 왕 노릇을 하는 법. 호랑이가 떼로 모인 곳이라고 해봐야 동물원 우리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성열 연출은 옳은 판단으로 보인다. 올 4월, 이강백 원작에, 오현경이 <봄날> 초연 이후 25년 만에 다시 아버지 역으로 돌아온 서울연극제 30주년 기념작 <봄날>에서 진가를 확인했다. 어쩌면 오현경의 마지막 연극 무대가 될지도 모를 <봄날>을 두고, 이성열은 원작과 배우의 무게를 부드럽게 싸안으면서 안정감 있게 무대에 올려놓았다.
승선
비바람 몰아치는 아일랜드 더블린 북쪽 바닷가 언덕 위에 낡은 집이 한 채, 어지러운 거실이 보인다. 구석에 세운 크리스마스트리는 명절의 즐거움보다는 춥고 황량한 겨울을 암시하는 듯하다. 윗벽 한쪽은 허물어져 있고, 벽난로 굴뚝 역시 위쪽은 시커멓게 탔다. 허물어진 벽 너머로 잎 한 장 달리지 않은 앙상한 나무 가지가 보인다. 무엇 하나 남지 않은 황량함이 드러난다.
마주 보이는 벽 중앙에 조타장치가 장식으로 걸려 있는데, 배로 따지자면 낡아서 반파된 셈이다. 키를 조절하는 조타실 격인 거실에는 술병과 빈 맥주 캔이 나뒹군다. 책장에는 낡고 너저분한 잡동사니들만 가득하다. 술 냄새 사이로 바다 비린내와 늙은 수컷들의 노린내가 훅 끼치는 듯하다. (무너진 벽 뒤로 달이 솟고, 해가 뜨는 게 보인다.)
출항
공연 시작 전, 그러나 그들의 지난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연극이 시작되면 어둠 속에서 뱃고동 대신 텔레비전이 지지직거리면서 한 점 빛을 밝힌다. 통신이 두절된 배 위, 역시나 쉽지 않은 항해 여정일 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밤새 퍼마시고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술주정뱅이 형 리차드 하킨(이호재 분)을 동생 제임스 샤키 하킨(이남희 분)이 깨운다. 샤키는 눈이 먼 형을 돌보기 위해 와있다지만, 트럭운전사로 일하다가 사장의 마누라와 바람을 피워 잘린 처지라 오갈 데 없다. 그러니 형이 자신을 돌본다는 둥의 어이없는 심술이나 투정에도 꾹 참을 수밖에 없다.
샤키를 가장 괴롭히는 일은 집 어디나 술 천지라는 것이다. 마을 최고의 술고래인 동시에 술주정꾼인 샤키는 3일째 금주 중이다. 아내와는 헤어진 지 오래, 떠돌이로 살다가 회사에서는 쫓겨나고 중년 나이에 집으로 돌아와 장님 뒷바라지나 하는 암초에 좌초된 인생, 이유라면 딱 한 가지, 술이다. 이제 정신을 차린다고 앞으로 잔잔한 바다길이 열릴까, 샤키는 형이 놀리고 구박할 때마다 큰소리를 치지만, 막연하게나마 형처럼 별 볼일 인생으로 마감하리라는 걸 모르지 않다.
리차드의 술친구인 아이반 커리(이대연 분) 역시 깜박 잠이 들어 집에도 못간 상태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외박을 한 데다 아끼는 안경마저 어딘가 두고 못 찾고 있으니 아내의 불같은 구박이 이어질 터, 아이반은 아예 이브를 이 집에서 보내기로 한다. 일어나자마자 샤키 몰래 술을 홀짝거리는 리차드와 아이반은 전형적인 알코올중독자, 루저의 삶에 충실하다. 중늙은이들이 한다는 짓이라는 게 동생, 친구, 마누라 흉이나 보면서 낄낄거리는 게 전부다. 술은 눈앞도 보이지 않는 삶, 마누라와 자식이 버겁기만 한 삶에서 유일한 탈출구를 향한 하루치 연료다.
격랑
리차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자고 샤키를 조른다. 매일이 다르지 않지만 술을 마시기에 딱 좋은 핑계거리다. 오지랖 넓은 형은 파티를 한답시고 샤키의 헤어진 아내와 동거하는 약삭빠른 니키 가블린(이명호 분)까지 초대해서 안 그래도 편치 않은 샤키의 심기를 건드린다. 샤키에게는 누구 한 명 마음에 들지 않는 최악의 크리스마스가 될 판이다. 저녁이 되고 술에 거나하게 취한 니키가 술로 만난 인연으로 Mr. 록하르트(정동환 분)를 데리고 등장하면서 정말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가 시작된다.
술은 사람을 사자처럼 난폭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양처럼 부드럽게도 바꾸는 법이다. 리차드는 술 마실 입만 있으면 누구라도 환영이다. 그 알량한 인연이라는 게 술이 깨면 머쓱하고 자칫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지만 말이다. 록하르트는 취하지도 않은 데다 행동이나 몸가짐도 단정한 점잖은 신사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들리는 크리스마스캐럴에 귀를 막고 인상을 쓰며, 끄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드러낸다. 다섯 명의 사내 중에서 유일하게 사내구실을 할까 싶었던 록하르트, 그의 정체는 샤키의 영혼을 가지러 온 악마다.
“그분마저도 질려버린 거야. 그분마저도 버러지 같고 똥파리 같은 널 잊어버린 거지, 그래서 네가 내 차지가 된 거야.” 20여 년 전 감옥에서 한 약속을 상기시키는 록하르트, 환류를 타고 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쓰레기가 모이듯이, 샤키가 술을 먹고 저지른 수많은 사고와 사건이 돌고 돌아 그의 인생에 해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악마가 가장 싫어하는 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샤키가 독하디 독한 밀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쓰레기 같은 인생, 이제 샤키는 록하르트의 정체를 모르는 일행을 사이에 두고 영혼을 건 마지막 포커 판을 벌인다. 악마를 피할 수도 없겠지만 사방이 컴컴한 바다로 둘러싸인 배위에 서 있듯 도망을 쳐봐야 달라질 게 없는 인생이라는 걸 직시했기 때문이다.
뱃사람
이호재, 정동환, 이남희, 이대연, 이명호… 누구 한 명 버리기 힘든 풀 하우스 패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내심 기대했던 아일랜드의 폭풍처럼 화끈하고 지랄 맞은 뱃놈들의 호기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막이 오를 때부터 내릴 때가지 누구 한 명 술에 취하지 않은 역할이 없었으나 얌전했다고 할까, 솔직히 평소 봐왔던 그들의 연기와 변별점을 찾지 못했다. (극단 차이무가 <거기(원제 The Weir)>의 배경을 강원도 바닷가로 옮겼을 때의 고심을 알 듯 했다.)
실망을 했다는 건 아니다. 극단 컬티즌의 뱃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격랑이 몰아치는 한국의 40~50대 소시민의 추레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이성열 연출이 그리고 싶은 풍경은 지금, 서울 풍경이라고 연출노트에서 밝힌다. 분명히 비슷한 연배인 역할에다 술꾼들일 이들이 연극이 끝난 뒤 모인 대학로 인근 선술집 풍경이 연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도치는 배라도 탔는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하며, 연극인과 뱃사람은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빈 공연장에서 연기를 하거나 혹은 빈 배로 돌아오거나, 제작에서 엎어지거나, 혹은 좌초를 당하는 일이 일상인 삶.
만선
어수룩한 아이반과 심술궂지만 그래도 정이 많은 리차드의 덕분에 샤키는 영혼을 뺏기지 않는다. 실소가 나오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1년에 딱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365일 내내 술에 취해서 사는 이들에게도 하루쯤은 재수가 좋아도 눈감아줄 아량이 생긴다. 비루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시고, 과거를 떠올리는 초라한 자신을 지우기 위해 또 술을 마시던 샤키에게 전율이 넘치는 통쾌한 모험담이 하나쯤 생겼다. 그래서 더 시끄러운 술주정뱅이가 될 성싶지만 말이다.
악마 록하르트도 쓸쓸하게 돌아가고, 안경을 찾아 신난 아이반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고, 약삭빠른 니키도 잔소리를 듣겠지만 유들유들 잘 넘어갈 테다. 다들 떠나고 형제만 남은 이른 아침, 교회 종이 울리고 무너진 담 너머로 햇살이 비춘다. 담이 무너졌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으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온다는 게 맞을 것이다. 산산이 깨진 술병 같은 인생이지만 바닥에 널린 사금파리 때문에 걸어온 길이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는 법이다.
하루쯤 선물을 주고받고, 교회를 찾는 중년들의 뒷모습은 동화 속에서 교훈을 깨닫고 집으로 뛰어가는 악동의 설렘과 다르지 않다. 동화책이 술에 완전 절어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리고 이날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객석은 펄떡펄떡 뛰는 생선처럼 박수를 쳐대는 관객으로 가득 찼다. 만선이다.*
사진출처 - 극단 컬티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