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김현탁의 햄릿] 불완전 연소의 우울한 기억

구보씨 2009. 4. 9. 14:17

원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재구성, 연출 : 김현탁 
출연 : 이진성, 박선주, 전정관, 김주희, 황정식, 남유현, 김동규, 한승우 
기간 : 2009년 4월 9일 ~ 4월 26일 
일시 : 평일 오후 8:00 / 토 오후 4:00, 7:00 / 일 오후 4:00 / 월쉼
장소 :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주관 : 성북동비둘기 02-766-1774,  019-262-6786 / club.cyworld.com/bee2gee

  

 

가해자가 세상을 떠났든 아직 살아 있든 어린아이를 고문했던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아직도 파괴적인 힘을 그대로 갖고 있는 가해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옛 피해자가 기억과 의식 그리고 무의식에 담고 있는 그이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 가해이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엄청난 힘을 갖는 망령인 것이다.
- 가브리엘 뤼뱅 <증오의 기술> 15p

 

Intro

공연이 끝나자 몇 안 되었던 관객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견딜 만큼 견디었다는 투다. 나가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아주머니 셋은 아역 배우 셋의 식구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다. 10살 남짓한 아이들의 덜 다듬어진 연기도 견디기 힘들지만, 그중 어린 햄릿을 맡은 대여섯 된 아이의 대사가 전혀 들리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1시간 반 동안 옹알이를 듣고 나온 셈이다. 어스름한 객석에서도 관객들의 굳은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공연장에서 나온 뒤에도 연극 말미에 삽입한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의 여운이 꽤 오랫동안 감돌았다. “천국이 참, 천국이 참…” 알 수 없는 얘기가 입에서 나왔다. 그만큼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햄릿의 관자노리에 총을 겨눈 중년의 햄릿의 절규가 절절했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참담함이 내내 무기력한 인생으로 이어졌다면, 그렇게 사는 내내 지옥 같았다면 죽어서 어디를 간들 천국이다.

 


 

01. I'm a Rock - Simon & Garfunkel

I am a rock, I am an island. and a rock feels no pain; And an island never cries.
난 바위, 섬 같은 존재입니다. 바위는 고통을 모르고 섬은 결코 울지 않아요.

 

테이프로 지하 소극장 사각의 경계를 친 무대 한가운데, 탑 조명 아래 하얀 러닝셔츠와 팬티를 입은 배우 한 명이 무대 한 가운데 누워 있다. 잡지로 얼굴을 가리고는 흘러나오는 ‘I'm a Rock’을 흥얼거린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 10 분 남짓 남았다. 객석이 닫히기 전까지, 연극이 시작하기 전까지 배우는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가락에 몸을 실었다.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한 이상 연극은 이미 시작한 셈이다. 정해진 공연 시간은, 그러니까 연극이란, 아니 <김현탁의 햄릿>이란 특정 사건을 보여주는 작업이 아니라, 삶을 내내 지배하는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속내로 보인다. 어쨌거나 연극 관람이란 삶의 일부분인 체험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각인 효과는  유효하다. 분명 똑같이 무대 앞에 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공연장 밖으로 나가자마자 휘발하는 작품이 있고, 끈덕지게 남는 작품이 있다.

 

배우의 잡지(헬스 잡지처럼 보였는데, 의도한 바인지 모르지만 강해지려는 욕망을 내보이는 소품처럼 보였다)로 덮은 얼굴 옆으로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비로소 자리를 고쳐 앉고, 음률에 맞춰서 흔드는 다리의 가냘픔으로부터 거슬러서 몸 전체를 보고서야 속옷 차림으로 드러누운 배우가 어른이 아닌 아이라는 걸 알았다.

 

사각틀 안은 경계의 밖을 배회하는 현실의 늙은 햄릿의 박제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차곡차곡 쌓인 서랍이다. 그리고 이제 갓 들어온 관객들을 위하 서랍을 열어서 어린 시절 입은 쓰라린 상처의 기억이 시작된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배우는 차가운 바닥 위에 왜 누워 있었을까. 공연 시작하기 10분 전? 20분 전? 짐작컨대, 늙은 햄릿의 50년 전의 상황이다. 침울한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기다리는 순간이 5분 전이건 50년 전이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 기억이 태어나서 처음 뜨거운 불에 손을 데었을 때처럼 트라우마로 각인이 된 바에야.

 

이제 올드 팝송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던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햄릿은 어린 레어테즈와 어린 폴로니어스가 등장하는 순간, 어린 시절 고통이 각인된 지옥이 다시 되풀이되기 시작한다.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되풀이 될 고통, 인생의 절정인 젊음이 거세된 채로 어린이의 미숙함과 노인의 초라함이 뒤섞인 햄릿은 도망쳐서 사각의 틀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허둥지둥 조명이 퍼지면서 어스름하게 보였던 사각의 경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묵묵히 고통을 견디어 온 늙은 햄릿과 이제 막 고통을 겪어야할 어린 햄릿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다. 늙은 햄릿은 사각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울상을 짓고 배회한다.

 


 

02.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 Santa Esmeralda

But I'm just a soul whose intentions are good. Oh Lord, please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나도 알고 보면 마음은 선량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오해하지 말아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보면 어린 시절은 서술되지 않고, 중년의 햄릿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극적 서사와 장렬한 죽음이 빠진 햄릿이 무대 위에 펼쳐지는 셈이다. 죽느냐 사는냐, 라는 갈림길에서 사는 길을 택한 혹은 죽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햄릿 중 한 명이 김현탁의 햄릿이다.

 

원작에서 햄릿이 내내 시달리는 아버지의 망령이 실제 혼령이든 과거 트라우마에 의한 내면에서 북받친 환상이든 중요하지 않다. 김현탁의 햄릿은 세익스피어의 문어체 대사와 몇몇 상황을 끌어다 쓰지만, 부러 배제한듯 빈약한 서사를 공연장에서 억지로 쫒는 건 무의미하다. (몇몇 관객들은 어두운 객석에서 프로그램 뒤에 실린 대본을 진행에 따라 열심히 찾아 읽었다.) 모스 부호처럼 드문드문 사이를 두고 단절과 연결을 반복하는 진행에서 그 고통과 몸부림의 가중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무섭게 부각되었다.

 

검은 무대 위에 테이프로 붙여 구분한 사각형의 틀, 그리고 장난감 상자와 사탕 바구니뿐인 간소한 무대는 어린 배우의 부정확한 발음에 더해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시작한다. 연극이 시작되면 사정이 달리지지만 말이다.

 

어린 햄릿의 손에 의해 장난감은 각각 광대, 배우 등 등장인물이 되고 사탕은 꽃으로 차용되고, 선과 악이 내면에 공존하는 캐릭터인 배트맨 복장의 클로디어스는 충실한 친구와 어머니 거트루드를 차지한 숙부로 함께 공존한다. 오필리어는 흰색, 커트루드는 검은색으로 각각 햄릿의 이미지가 투사된 이미지이지만 무대 의상인 란제리 차림은 어린 햄림이 입은 속옷의 연장선으로 봐야한다.  가장 편안한 복장이지만 사춘기를 지나 어느 시점이 되면 가장 야한 의미로 탈바꿈하는 차림새. 햄릿과 그녀들 사이 즉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들은 나이와 상황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접점이 생긱 어렵다.

 

추레한 양복차림의 늙은 햄릿과 오필리어를 꼬시는 뜨리고린이 옷을 그나마 갖춰 입었는데, 이는 그들의 처한 상황과 위치와 입장을 보여준다.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사각의 경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둘은 현실, 즉 어른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뜨리고린은 안톤 체홉의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니나를 꼬신 방탕한 통속작가이다.)

 

절제된 조명과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꽤 짜임새 높은 미장센을 선보인다. 햄릿의 주요 갈등인 오필리어와 거투루드가 등장할 때마다 늙은 햄릿의 반가우면서도 괴롭고 기쁘면서도 슬픈 감정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너는 나를 그리고 아버지를 매우 화나게 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햄릿! 너는 나를 몰라보느냐? 그렇다면 얘기가 통하는 자를 불러 너와 만나게 해야겠다.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큰소리로 불손하게 그런 못쓸 혀를 놀리는 거냐? 그만해라. 햄릿! 이제 그만! 제발 그만 좀 해! 미쳤어? 보고 있는 거냐? 듣고 있는 거야? 햄릿, 실성했니? 도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뭘 듣고 있는 거냐?” 거투루드는 어린 햄릿과 무대와 대칭점을 두고 빠르고 강하나 감정이 담기지 않은 톤으로 과장한 동작을 섞어서 세 번이나 쏟아 부친다. 햄릿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테이프처럼 들린다.

 


 

03. Knockin' on Heavens Door - Bob Dylan

It's gettin' dark, too dark for me to see, I feel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
점점 앞을 볼 수도 없어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엄마가 거투루드가 자신을 좀 두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일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했던 그때가, 격렬했던 섹스와 달콤한 속삭임이, 그게 죄는 아니잖은가. 다만, 어렸던 자신이 생물학적이건 심리학적이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던 나이었던 게 아쉬울 뿐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젊은 햄릿이 본 망령도 어쩌면 자신의 미래였을지도, 그러니까 늙은 햄릿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 아버지가 죽고 나자 재산과 명예와 여자와 자식을 차지한 게 하필 믿었던 삼촌이라니! 햄릿이 벌인 죽음으로 치닫는 파티는 그런 이유라면 설득력을 얻는다.

 

더욱이 내 주위를 떠도는 망령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하소연 할 곳조차 찾지 못해 방황하는 가장 나약하고 여린 자신일 때, 끔찍한 일이 있을까. 친구들의 순수한 악은 거리낌 없이 파리 날개를 뜯어내듯이 더욱 잔인하다. 김현탁이 그린 햄릿은 가족을 비롯해 타인과 겹치는 지점에서 바란 얼룩을 숨기지 않고 내보였다. 관객으로 하여금 꽉 붙인 겨드랑이처럼, 악 다문 이빨처럼, 힘을 줘서 벌벌 떨리는 맞닿은 허벅지에서 흥건하게 흘려 내려 얼룩이 지고만 흔적을 눈을 뜨고 지켜보도록 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과한 신경쇠약자로 해석한 감이 없지 않지만, 김현탁의 햄릿은 햄릿의 모노드라마를 관심을 가지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우리를 그 안에 농밀하게 끌어들인다. 역시도 가볍고 심각한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같은 신경증을 앓는 같은 병동의 환자일지도.

 

늙은 햄릿이 사각틀 안으로 들어간다. 눈물을 글썽이며 어린 햄릿이 들고 있던 총을 빼앗고는 자신의 머리를 가져가다가 어린 햄릿의 관자노리를 겨눈다. 그가 내내 메고 있던 검은색 넥타이는 자살을 꿈꾸는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한 상징이다. 그러나 어린 햄릿의 세계에서 늙은 햄릿이 손에 쥔 건 장난감 총이다. 지울 수 없는 과거, 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욕망이다.

 

소통의 부재와 그 시절을 외면하고 싶은 부분을 다루는 이 작품은 햄릿이라고 해도 그만, 구보씨라고 해도 그만인 누군가의 오염되고 불완전 연소된 기억이 뿜어 올리는 검뿌연 연기다.  이 연극이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은 이 지독한 고통이 편집 화면이 아닌 매일 같이 같은 시간, 같은 무대 위에서 같은 배우들이 고역스럽게 펼친다는 생생한 반복에 기인한다. 연극을 하는 이유와 보는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추신 : 작품 삽입곡을 소제목으로 차용하였다. 

사진 출처 - 극단 성북동비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