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곤의 선물Gift of the Gorgon] 고곤의 향연

구보씨 2008. 11. 18. 11:31

 

너의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곧 말이 되기 때문이다.

너의 말을 조심하라.

말이 곧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너의 행동을 조심하라.

행동이 곧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너의 습관을 조심하라.

습관이 곧 성격이 되기 때문이다.

너의 성격을 조심하라.

성격이 곧 너의 운명이 되기 때문이다.


-詩 ‘조심하라’ 전문, 작자 미상-


지성을 갖췄으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하는 에드워드.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헬렌을 만나면서 비로소 능력을 꽃 피우면서 비로소 천재 극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허나 주체하지 못하는 끓어 넘치는 욕망과 광기는 결계 역할을 했던 헬렌 마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만드는 지경에 이른다. 에드워드는 자살을 하고, 에드워드의 사생아 필립이 평전을 쓰기 위해 헬렌을 찾아오면서 <고곤의 선물>은 그 과정을 역순으로 보여준다. 

 

연극 안에서 말하는 과거, 메두사의 머리


고곤(Gorg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르키스와 누이인 케토 사이에서 태어난 뱀 머리 괴물인 세 자매를 부르는 말이다. 셋 중에서 여신 아데나의 도움을 받은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막내 메두사가 가장 유명하다. <고곤의 선물>의 두 주인공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과 아내 헬렌 담슨의 페르소나로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페르세우스와 아데나, 그리고 이 둘을 잇는 매개체이자 갈등이 메두사다. 그리고 메두사는 연극을 지배하는 핵심이다. 


보는 족족 돌로 만드는 메두사는 강렬한 소유욕의 상징이다. 한때 신과 사랑을 나눌 정도로 미모를 자랑했던 소녀는 추하게 변한 외모 때문에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설령 콩깍지를 쓴 연인이 나타났다 쳐도 고곤의 머리에 돋은 뱀은 달콤한 잠에 취한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게 석상 수집이다. 


피그말리온의 사랑도 ‘한 개’가 아닌 ‘한 명’을 향할 때는 비극이 된다. 피그말리온은 완전한 미에 대한 탐욕에 미친 편집증 환자인데, 과연 석상이 사람이 되는 순간을 지나 늙고 추한 꼬부랑할망구, 즉 보기만 해도 눈이 멀고 말 메두사化가 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완전미를 갖춘 미소녀가 된 그녀가 과연 피그말리온 같은 석공 정도로 만족할까. 맥락으로 볼 때 피그말리온에서 메두사까지는 하나의 이야기다. 


한 때 완전미를 갖춘 석상이었으나 인간이 되었다가 괴물이 되어 석상을 수집하는. 늙을수록 젊음과 명예, 재산에 집착하는 인간의 삶과 맞아 떨어진다. 석상에서 인간이 되는 과정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창세기 신화로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선악과’를 베어 물면서 늙음과 죽음의 한계에 부딪힌 순간 피어난 불꽃이 바로 탐욕이다.

 

극 안에서 말하는 현재, 쓰이지 않은 평전

그리하여 <고곤의 선물>이라는 제목부터 극 배경도 그리스인 데다 극중극으로 그리스 신화가 등장하지만 신화에 익숙지 않아도 내재된 인간의 속성을 다루는 만큼 이해에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에드워드가 자신의 성(姓)이 담슨(Damson)이 ‘저주받은 아들’(dammed son), 즉 죽음이라는 원죄를 지고 태어난 아담의 후손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인간이 짊어 맨 원초적 운명을  자각한 그에게 정의니, 평화니, 정의니 하는 타협은 허울이고 가식이다. 


헬렌을 만나기 전에 애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걸 속인 셈이지만 별 거 아니라는 식이다. 어차피 괴물(메두샤=노인)로 죽을 사형 선고를 타고난 인간의 운명, 낳아봐야 부모를 저주만 할뿐이니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이다. 자신과 헬렌 사이의 아이를 기생충이라고 우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인 엄마 뱃속에서 나오기 전, 선악과를 씹어서 ‘인간’이 되기 전, 자각이 없는 기생충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식이다. 


허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삶이란 ‘인간, 그 자체로 충실한’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예의니 정의니 평화니 용서니 하는 것들은 운명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난이자 아편이다, 라는 식이다. 인간의 아버지, 신들이 하는 장난에 대항하는 방법은 한 가지, 할 수 있는 한  ‘복수’를 하고서 흥겹게 춤을 추는 것이다.

 

허나 극에서 에드워드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자식의 시대이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비정한 아버지, 그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생아인 연극평론가 필립 교수는 천재 극작가인 아버지 상만 쫒아 찾아 왔다. 천재 극작가의 아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존재 의미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헬렌을 찾은 이유도 가상으로 세운 뼈대에 살을 붙여서 위대함을 칭송하는 평전을 쓰고 그 명성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허나 아버지의 파괴적인 기행과 광기를 현실로 알게 되자 평전을 쓰길 거부한다. 사실대로 평전을 쓰는 순간, 말 그대로 버림받고 ‘저주받은 아들’로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필립의 태도는 죽음의 운명을 지운 채 세상으로 떠밀어낸 무뚝뚝하고 냉정한 신, 세상에 던져 버린 채 돌보지도 않고, 심지어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신을 향한 인간의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에드워드가 보기에, 필립은 신에게 모멸과 치욕을 뒤집어썼음을 알면서도 애써 후광이 비추는 부분만 골라서 그 안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불쌍한 제사장일 뿐이다.



 

극 밖에서 한 말, 2008년 11월 한국

“인간에게 내재한 숱한 욕망과 본성, 나아가 신을 향한 인간의 의문과 회의를 근본적으로 파헤친 문제의식”이라는 평가는 <고곤의 선물>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에쿠우스> <아마데우스> 등 피터 세퍼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헌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평이 아닌가? 완성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평가를 받는 작품은 구르는 돌처럼 숱하게 많이 나왔다.


 

2008년 11월, 한국에서 <고곤의 선물>의 의미

정의와 평화 사상을 가르치는 자상한 교수 아버지 슬하에서 배우고 자란 “똑똑한 아가씨”인 헬렌이 결국 에드워드의 광기에 저주를 퍼부으며 떠나려는 순간, 에드워드는 헬렌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복수심을, 다시 말해 인간이 가진 운명에 저항할 방법을 심어준다. 정결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하면서 헬렌에게 칼날을 몰래 박은 비누를 손에 들려서 자신의 몸을 씻도록 하는 것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로 만든 비누에 박힌 칼날은 하려는 얘기를 대놓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뻔’한 비유이긴 하지만, 그 비누가 바로 ‘고곤의 선물’이자 현실로 돌아가는 관객에게 작가가 환기시키는 선물이기도 하다.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았다고 전제를 하지만 칼날 박은 비누로 칠을 할 정도로 무딜 수 있을까. 피 냄새는 그렇고 무리한 설정이지 싶지만, 아무튼 애정을 담아 온몸을 샅샅이 칠을 하면 할수록 더욱 난도질을 해대는 셈인, 더 할 나위 없이 잔인한 상황이 된다. 헬렌이 에드워드가 속인 현실을 깨닫는 순간 지워지지 않을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 밖으로 나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는, 바로 칼날 박은 비누의 설정이 전혀 무리한 설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프리카 기아 사진을 신문에 실은 이유가 뭘까. 사진은 마음에서 자비와 동정 등등을 솟구치도록 하여 모금 전화 버튼을 누르게 하는 대신 뿌듯함을 준다. 그러나 “동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했다”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순간, 아프리카 기아의 가장 큰 원인인 거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눈을 돌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기아 사진을 실은 언론 역시 그 시스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만다. 그렇게 착취와 파괴의 고리는 계속 돌고 돈다.


칼날이 박힌 비누. 호의를 갖고 한 일이 정말 옳은 일인가, 호의는 정말 호의인가, 그 안에 옳지 않은 무언가가 숨어 있지는 않은가, 혹은 더 큰 불의와 부정을 속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호의가 아닌가를 두 눈 부릅뜨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2008년 11월, 에드워드 담슨은 내게 말했다. 그럼 이제 그 사실을 알았다면 필립처럼 진실을 숨긴 채로 감내하면서 살 것인지, 헬렌처럼 용서와 복수 사이에서 갈등만 할 것인지, 에드워드처럼 극단으로 열린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셋 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선택마저 거부한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식이다, <고곤의 선물>은.*



 

추신  : 극중에서 유독 그리스어로만 대사를 하는 하녀 역이 등장하는데, 단순히 그리스 산토리니라는 배경을 강조하자는 의미인지, 신들의 나라에 와있다는 의미인지, 세상은 여전히 소통 불능이라는 의미인지 불분명하다. 또 에드워드 역의 정동환이 베란다에서 바다로 뛰어내릴 때 굳이 누드였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빨간 피터, 故 추송웅처럼 고곤 정동환으로 거듭날 정도로 열연을 펼쳤다.) 가운을 입은 채로 피를 한 바닥을 쏟고서는 가운을 벗은 뒷모습이 애기 속살처럼 상처 하나 없다는 건 좀 그렇다. ‘가식과 허울을 벗고 신에게 저항하는 인간’의 형상화라는 건 알겠으나 헬렌과 필립이 문제의식을 품게 된 매개체이며, 관객에게 가장 큰 선물이기도 한 ‘칼날 박은 비누’가 허사가 된다는 점에서 좀 아쉽다.*




사진출처 = 극단 실험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