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성찰이 필요한 시기가 언제인지 우리는

구보씨 2017. 12. 7. 02:59

제목 :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일시 : 2017/11/23 ~ 2017/12/03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출연 : 우정원, 황은후, 신사랑, 노기용, 신지우원작 : 권여선각색/연출 : 박해성주관 : 서울문화재단, 상상만발극장제작 : 남산예술센터, 상상만발극장 

 

 

 

 

 

작품을 따로 떼어놓고 볼 것인지, 아니면 남산예술센터 기획 과정 안에서 이해할 것인지 살짝 고민이 들었다. 당연히 두 가지 상황을 고려해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남산예술센터 2017 시즌프로그램 마지막 작품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이하 당신) 관객과의 대화(12/2)에서 우연 극장장은 ‘올해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이 성소수자 이야기, 검열 이야기, 예술계 성폭력 이야기, 젊은 예술가들 삶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올해의 마지막 작품은 극진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여는 말로 밝혔다. 이런 의도는 현장에서 시즌을 구상한 김지우 기획제작PD의 소회(공연 소책자)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나 마지막 세 작품을 보면 <십년만 부탁합니다>에서 배우가 등장하지 않고, <파란나란>에서 100명의 시민배우가 등장한 반면,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오롯이 5명이 무대를 채우는 방식은 그 여정을 따라간 관객 입장에서도 꽤 흥미로웠다.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깊이 30m의 무대를 세운 지차트콥스키 버전 <벚꽃동산>에서 한바탕 떠들썩하게 라네프스카야 남매 일행이 떠난 뒤에 늙은 하인 피르스가 홀로 천천히 무대에 등장했을 때 감정과 엇비슷하다.‘세상을 향해 던졌던 질문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기에 차분히, 정성스럽게 지금을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는 소개서에 실린 김지우PD의 글에서도 작품 선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난 1년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기획으로 무던하고 납득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울이 12월부터 시작이듯 1월과 2월을 지나 4월 무렵에야 봄다운 봄이 찾아오듯 삶이란 달력대로 혹은 사회분위기처럼 딱 맞춰 정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만약 올해 5월 대선으로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2017년 12월은 사회 분위기를 비롯해 공연예술계는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각종 비리와 특혜와 검열로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냈어야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4월이든 12월이든, 극중 살인사건이 벌어진 2002년 6월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축제였을지 모르나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순간이 지옥의 시작일 수 있다. 우연인 듯 <당신>의 연출가 이름이 같은 이해성 연출이 올해 1월 4일에 세운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검열과 블랙리스트 작성을 비판하는 연극인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 세운 임시 공공극장인 ‘블랙텐트’가 아직도 해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정이지만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관객과의 대화에서 혹은 소개서에서 어수선한 한해를 마무리 하고 내면을 돌아보자는 얘기를 쉽게 할 수 있을까. 작년 하반기에 올해 기획을 세웠을 것이므로 5월 대선을 고려했을 리가 없다고 본다면 예산 책정과 정산을 기준으로 한해 소회를 잡는 식의 공공극장 기획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성찰이 가능한 시기가 따로 있지도 않고, 또 올해 남산이 기획해서 올린 작품들이 던진 화두 혹은 소개 가운데 무엇 하나 사회적으로 갈등이 봉합되었거나 해소된 주제가 있는지 궁금하다. 연극은 사회의 창이지 해결책을 제시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성찰로 이어졌다는 도식적인 발언은, 물론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만, 달갑지만은 않다. 누구가에게는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겠으나 그렇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들, 예를 들면 극중 인물들에게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시즌이 지옥으로 되새김질 되듯, 겨울은 사실 삼라만상이 견디기 힘든 처절한 계절이다.    

 그리고 작품을 봤을 대 <당신>이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인지에 대한 고민이 든다. 살인사건에서 시작해 법적으로 종결된 미제사건을 두고 주변인물들이 겪은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 소설은 누가 살인자인가, 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추리소설의 구조에 따라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과정이 중편을 읽는 동력이 되는 이상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무시할 수 없다. 하여 소설을 연극으로 옮기면서 소설 문장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도 결정적 흔적을 지워 은유라고 표현하는 모호함으로 인해 ‘원작과 다른 점도 있다. 소설이 진범의 몽타주를 세밀하게 묘사한다면, 공연은 단지 실루엣만 보여준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다른 진범을 품고 극장을 나선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할 때 당‘신’은? (한겨레) :2017-11-26 김일송 칼럼니스트]는 평가를 들을 여지가 있다. 하여 연극은 살인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소설이 묘사하지 않았거니와 보여줄 수 없는 주인공 ‘다언’(신사랑)의 4분 정도의 막춤을 통해 해방감, 혹은 언니의 죽음이라는 굴레 혹은 번데기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사는 인물로 바뀌는 과정으로 연극을 마무리한다. 이는 28살 골육종으로 세상을 마감할 때가지 내내 소외되고 비루하며 억울하게 살았던 ‘만우’의 춤(소설 속 세탁공장에서 다림질을 능숙하게 다루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난쟁이인 어머니를 두고 난쟁이는 아니지만 작은 키로 세상 낮은 곳에서 살다가 짧은 다리마저 한쪽이 잘리고 세상 부조리를 몸을 감당한 마치 신을 아버지로 두지 못한 인간 예수와 같은 그의 춤은 원작이 없었다면 개인적으로 찡한 무엇이 있는 장면이었다. 

소설에서는 만우가 어떤 인물인지 살짝 더 도드라지는데, 아버지가 다른 이복여동생을 두었다는 설정으로 신과 인간을 아버지로 둔 예수를 충분히 예상가능 하도록 그리고 있다. 하여 나름 이 제목과 연계해 풀어보자면 민우 당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 당신을 저주하고 미워했던 다언이 당신을 통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세상을 떠난 민우, 당신이 알지 못한다, 고 풀이할 수 있다.하지만 살인자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서 냉정하게 원작과 전혀 다른 결말을 냈지만, 관객 입장에서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공연을 보고난 뒤 원작인 소설을 부러 읽어야 할 이유, 혹은 동기를 준다. 작년 출간 소설로 관객과의 대화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17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2016)에서 우수작품상 수상작으로 읽어볼 수 있다. 소설에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혹은 방관자로 바라보는 제3의 인물로 ‘상희’가 과한 몰입을 막기 위한 장치로 필요했다면 냉정하게 연극에서는 그 효과가 미비하다. 소설에서는 관찰자로 ‘다언’의 고교시절, 복수 전, 복수 후 변하는 외모 혹은 삶을 진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였지만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다만 극단 떼아뜨르 봄날 이수인 연출 특유의 독특하고 특색 있는 역할이 아닌 평범한 역할로 황은후 배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소설에서는 살인자가 명확하다. 그래서 다언과 엄마와 아마도 만우의 여동생 선우까지 가담해서 살인자와 그 공범이 낳은 자식을 납치해 죽은 언니가 갓 태어났을 적 이름인 ‘해은’, 불행의 원인을 지우듯 아버지가 발음을 제대로 못해 아예 ‘해언’으로 출생신고를 하기 전 이름으로 부르며 키우는 대목이 등장한다. 연극에서는 등장하지도 않고 짐작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헌데 소설마저도 이 대목을 모호하게 표현하여 문학상 심사 후기를 보면 엄마가 ‘해은’을 낳았다고 오독을 하고 있다. 이는 모호함이 가능해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연극과 달리 다언이 1인칭 화자로 진술하고 있는 바, 납치 관련 진술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극중 화자가 스스로를 속이는 생길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다. 연극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납치해서 키우는 과정이 제목이 신학성서 구절에서 따왔듯 구약성서에서 나온‘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해당한다고 해도 신이 없는 시대, 다언 모녀가 더불어 선우 이모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편이 살인자와 공범으로 뻔뻔하거나 혹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삶보다 나으리라고 본다. 연극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이 법의 테두리를 다루려는 법정극이 아니고 신이 없는 시대, 저주받은 인생들이지만 신을 대처해보고자 애처롭게 최선을 다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소설을 각색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연극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고전’ ‘베스트셀러’에 국한되었던 이력을 생각하면 아직 정식 단행본으로 발간되지 않은 소설을 각색하는 이번 시도는 변별력을 가진다.’평가는 권여선 작가가 한국 문단에서 충분히 검증을 받은 작가이고, 연극화 결정 이후에 받았는지 모르나, 대상이 아니라도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볼 건 아니다. 다만 극장장과 기획PD의 개인 취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원작의 몇 가지를 덜어내면서 앞서 언급했고, 또 소책자 연습일지에서도 강조했듯 원작과 전혀 다른 결말을 가져오면서 ‘말 그대로’각색하려는 그 시도가 변별력을 가져왔는지, 그 의도에 맞았는지 묻고 싶다.


 

기획PD 정도 되면 당연히 좋은 원작을 발굴해 무대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의무라고 생각한다. 꼭 희곡에서만 연극을 추출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관객 입장에서 절대 반대한다. 관객마다 취향이 다를 것이므로, 또 독자로도 권여선의 소설이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된다고 본다. 물론 그 책임도 본인이 져야겠지만 우정원, 황은후, 신사랑, 노기용, 신지우 까지 누구 한 명 빠지지 않는 알토란처럼 좋은 배우들 조합이라면 어떤 작품을 맡겨도 좋을 것이다. 무대 역시 연출의 말처럼 극장의 장점을 잘 살렸다고 본다. 

 

아무려나 아무쪼록 남산예술센터의 동시대성을 확보하겠다는 기획이 검증보다는 시도와 모험을 하는 기획이 바뀌지 말아야 한다. 남산예술센터가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작품들이 많았다. 2018년 삼일로 극장 역시 잘 부탁한다. 서서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