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불쌍한가
제목 :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일시 : 2017/05/13 ~ 2017/06/04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작/연출 : 박근형
출연 : 장연익, 한윤춘, 김국진, 김경일, 이기현, 신사랑, 안소영, 나영범, 이상숙, 임진웅, 고수희, 이원재, 장연익, 성노진, 권태건, 손진환, 이호열, 강지은, 오순태, 심재현, 이기현, 김병건, 서동갑, 김동원
제작 : 남산예술센터, 극단 골목길
주최 : 서울특별시
주관 : 극단 골목길, 서울문화재단
나는 그럭저럭 무던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연병장에 친 간이 텐트 안에서 팥죽땀에 찌든 군복을 입은 채로 모기에게 눈꺼풀을 뜯기면서도 잠이 들었던 유격훈련을 하는 시절 꿈을 꾸다 깨어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사관들의 갈굼이나 무시, 혹은 선임들의 직간접 폭력은 견딜만 했다. 강도의 차이일 뿐 집, 골목,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20대 초중반까지 몸에 배인 가학의 흔적은 종종 밖으로 흘러나왔다. 군인이었던 그 시절 나는 불쌍했고, 용케 적정선을 지키고 있다고 하나 가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내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 다루는 최근 사건은 2016년-초연 당시- 대한민국 경남, 제대 한 달을 남긴 병장의 무장 탈영이다. 현역 군인이 60만 명에 달하는 2017년 5월 대한민국 현실에서, 삼대독자로 면제 대상이나 입대한 이유도 제대를 앞두고 탈영한 이유도 극 말미 자살하듯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현실감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의 탈영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사이 1945년 일본 가고시마, 2004년 이라크 팔루자, 2010년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에서 벌어진 과거사가 겹치면서 관객은 그의 입대와 탈영과 죽음에 깊숙하게 동감을 하게 된다.
첫 장에서 동시대 현역 병장이 탈영을 한 직후, 이어진 장에서 재일 조선인 오카와 마사키가 카미가제 자살특공대로 자원입대를 한다. 조센징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일본인으로 장렬히 전사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려야만 그의 가족이 산다. 죽을 줄 알지만 자원입대하지 않으면 징병을 당한다. 그리고 가족이 살 수 있다. 1942년 조센징이라는 저주받은 핏줄만 남긴 아버지의 부재는 곧 가족의 부채이고,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혈, 피를 내어주는 길 뿐이다. 연극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애초 아비라는 자격조차 쥐어지지 않는다. 2004년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라크 미군부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서동철은 이라크 무장단체에 잡힌 채로 사랑한다는 말만 남긴 채 죽음을 당한다.
일제 강점기, 나라가 나라 역할을 하지 못해 중국에서 일본에서 혹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조선 아버지들이 이슬처럼 부질없이 죽었듯이, 2004년 국익을 위해, 대의명분을 위해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 앞에서 아비가 되어보지 못한 그가 죽는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모은 2500만원으로 서울에서 작은 전세방을 구해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서동철의 눈물 나도록 소박한 꿈은 현실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의 목을 벤 이라크 무장단체의 비극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폭격으로 무너진 집에 잘린 아비의 다리가 뒹굴고, 그 아래 눈알이 빠진 아기의 얼굴이 깔린 모습을 목도한 어머니 아스나는 서동철(아버지)의 죽음은 대한민국(나라)의 탓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나 그녀의 저주는 자신의 가족을 폭격에 무방비로 내몬 이라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2010년 서해 백령도 천안함 사건 당시 상황을 재현한 장면에서도 연극은 아버지의 부재에 초점을 맞춘다. 프러포즈를 하지 못한 채로 죽은 일병의 하모니카 연주는 구슬프고, 갓 돌이 된 아기의 옹알이가 “아빠”로 들리는 병장의 너스레 역시 그러하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병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는 아비가 되지 못하거나 되더라도 무능한 아비가 될 것이다. 잠수부가 이병을 뒤에서 안아주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화해를 시 한 구절 낭독하듯 표현했다.
현실로 돌아와 탈영병이 찾아간 아버지는 박근형 연극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처럼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군대에 간 사이, 집이 헐리고 아파트재개발 공사가 한창인데, 아버지는 “무허가 철거민에게 아파트를 공짜로 줄 바보는 없다”고 말한다. 당뇨병 환자인 아버지는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렵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수를 권한다. 허나 아들이 보기에 자수를 하고 사회로 나온다고 한들 당뇨병에 천천히 죽어가는 아버지처럼 그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한다.
탈영병 : … 나도 한 달 후, 전역하고 사회 나가면 나도 저렇게 살겠지. 매일 매일 검문소 통과하면서 죽을 죄 지은 사람처럼 기 못 펴고 살기 위해 무릎 꿇고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계속 빌고 살겠지. (중략) 어차피 한 달 후면 지금보다 더 비참해질 거예요.
아버지 : 가난이 널 너무 진지하게 만들었구나!
탈영병과 오카와 마사키의 죽음은 이라크 팔루자에서 죽은 서동철이나 2010년 초계함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은 장병들과 다른 길을 겪고 있는 듯 하다. 애국심이나 충성심 따위로 군대를 가지 않고 오로지 살기 위해 군대를 지원한 이들은 다른 듯 같은 길을 걷는다. 뚜렷한 목적과 신념으로 가득 찬 오카와 마사키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탈영병과 달라 보이지만 자신의 희망과 달리 조센징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의 삶이 결코 꽃길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여전히 차별 속에 살았을 것이므로 허무하다.
아버지의 부재 혹은 무능으로 인한 짐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등에 실린다는 점에서 모든 어머니도 불쌍하다. 파상풍 치료도 중단하고 아낀 돈으로 산 불고기 한 점을 더 먹이고 싶었던 마사키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서를 들고 흐느끼고, 강지은 배우가 1인2역을 맡은 이라크 무장단체 테러리스트 아스카의 단호함이 그러하다. 탈영병의 어머니는 남편의 무능에 가난을 벗어나고자 종말론 신앙에 빠져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지막 장, 탈영병을 보듬는 노숙자 역시 아저씨가 아닌 아줌마지만 그녀 역시 탈영병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탈영해서 사살당하기까지 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극중 대사처럼 자유롭고자 탈영을 했으나 갈 곳이 없다. 고작 며칠 혹은 몇 주의 일탈 후에 몇 줄 기사로 끝났을, 그렇게 휙 지나갔을 가십거리 그 이상이 아닌 무엇이 연극 무대로 오면서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74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2004년과 2010년 두 발자국을 찍고 왔다. 아버지의 무능을 다룬 신파조의 연극은 박근형 연극의 근간을 이룬다고들 하는데, 물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 아버지들만이 거쳐 가는 군대를 택하는 건 분명 악수(惡手)라고 봤으나 오히려 영역을 꽤 넓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의 편지를 낭독한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올해 만 37세가 된 김 씨는 1980년 5월 18일이 생일로 이날 태어난 자신을 보기 위해 병원으로 오던 아버지가 계엄군에 의해 희생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어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으나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이 정도 역할만 해줬더라면 대통령 탄핵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모든 군인이 불쌍하다’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