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챔피온] '척'하지 않는 챔피언들을 위한 찬가
'내일은 챔피온'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희곡 공모전 ‘창작팩토리 사업’의 지원작으로 지금은 철거했을지 모를 서울 외곽 변두리 어디쯤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이 아닌 세입자라는 점에서 언제 떠날 지 모를 인생이지만, 또 극 중 떠나기도 하지만 서로 의지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끈끈하게 사는 소민들의 이야기입니다. 3층 건물이 위 아래로 솟았다가 내리는 무대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이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작품이네요.
재밌는 추억이 있는데요. 공연 볼 당시, 실제 권투동장을 운영했을 법함 관객들이 오셨는데요. 공연 중에 벨이 울리고, 아저씨 한 분이 전화를 받더니만 한참을 통화하더라구요. 그런데 범상치 않은 통화 내용에... 아무도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중간 휴식이 끝나 공연이 막 시작했는데 객석 안쪽에서 아저씨 한 분이 갑자기 나오더라고요. 다들 우루루 비켜드렸더니, 3~4분 사이를 두고 아주머니 한 분이 또 나오셨지요. 부부였을까요? 연극을 보면서 처음 겪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2012년에 재공연을 올렸습니다. [2015.06.28]
제목 : 내일은 챔피온
기간 : 2010년 5월 11일 ~ 2010년 5월 22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권오진, 최원석, 이동규, 김병수, 주유광, 송우재, 신용숙, 김은지, 박묘경, 장설진
작/연출 : 전훈
음악 : 봄여름가을겨울
제작 : 애플씨어터
주최 : 서울연극협회
주관 : 서울연극제집행위원회, 문화기획 연
‘내일은 챔피온’. 귀에 익다. 인생을 살다보면 술김에라도 눈물 찔끔 흘리다가 밟히면 꿈틀하는 지렁이처럼 비명 대신 내지르는 악에 바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데 기억을 곰곰이 거슬러보니 KBS 코미디 방송 ‘유머 1번지’에서 심형래가 어리바리한 영구 캐릭터로 등장하는 코너 제목이다. 심형래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까지 찍었더랬다. 그 당시 유행어, “칙칙!”은 배우 박철민을 스타로 키우기도 한 관련 검색어 “요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쩌다 ‘챔피온이 되겠다’는 각오가 코미디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챔피온을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사는 자신을 보면서 짓는 회한 같은 쓴웃음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내일은 챔피온’이라는 다짐은 어느새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이라는 식당 벽에 나붙은 농담이 되고 말았으니.
연극 <내일은 챔피온>은 어떨까. 서울 외곽을 막 벗어난 고양시 원당역 근처 지하1층 지상 3층 미미빌딩이라는 배경은 변두리 동네라면 어디쯤 있기 마련인 건물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연극은 극사실주의를 표방하지만 근본적으로 코미디이다. 그렇다고 가볍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코미디이다. 극중 대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마음만은 챔피온인 스파링 파트너 이정일이 늘 달달 외는 알리 선생님의 삶처럼 나비처럼 가볍게 스텝을 밟지만 주먹은 KO를 부르듯이 연극은 가볍게 웃다가도 어느새 펀치드렁크에 걸린 듯 묵직하다.
미미빌딩 입주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지하1층부터 지상 3층까지 건물 자체가 주인공인 듯, 이 작품은 연극이라는 장르, 즉 실제 건물 한 층과 그리 다르지 않은 무대와 딱 잘 맞아 떨어진다. 다만 실제로도 이들처럼 아옹다옹하면서도 사이가 좋을까 싶기는 하지만 미미빌딩에 오래 묵은 이들은 나름 각자 인생의 달인들이다. 달인이란 게 남하고만 비교할 게 아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들에게 미미빌딩이란 곧 링이 아니던가 말이다.
각 층마다 사는 면면을 보면 뭣 하나 동질감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은 실제를 유사하게 옮기려는 전훈 연출의 노력이기도 한데, 각자 서로 엇갈리는 애정 전선도 그렇고, 여느 연극이 그렇듯이 어떤 한 사건에 다 같이 우르르 “정말?” 하고 놀라는 법이 없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는 사람도 있고 아쉬운 사람도 있고 즐거운 사람도 있고 덤덤한 사람도 있는데, 마치 따로 노는 듯 싶지만 인생이라는 게 각자 살아온 이력이 다른 만큼, 또 입장이 다른 만큼 서로 과한 이입은 ‘척’이고 거짓이라는 게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척이 벌어지는가. 24시간 페인트 모션을 쓰다 보니 자기 본질이 없어지는 판국이다. 극중 인물들이 오늘이 아닌 늘 내일은 챔피언인 이유라면 페인트 모션을 잘 쓰지 못하는 대신 우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원칙은 이 연극이 데뷔작인 샐리 역의 김은지와 가슴이 역의 장설진을 비교해보면 눈에 띈다. 둘 다 어린 배우라 연기가 다른 배우만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샐리는 자연스러운 반면 가슴이는 비중이 달라 긴장한 듯 보인다. 극중에서 미용실 보조로 막 입사한 샐리에게는 미미빌딩 입주민들의 끈끈함을 알 리가 없다 보니,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다시 말해 극에 과하게 몰입할 필요가 없다, 아니 하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빼어난 노래실력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녀 나름의 되고픈 챔피온이 뭔지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중이 적긴 하지만 나름 미미빌딩 다방 레지로 인연을 맺은 가슴이는 입장이 다르다. 더욱이 짝사랑을 하는 와중이라 그녀의 사연은 애절하다. 그녀의 남다른 몸매가 그녀의 캐릭터를 설명하지만 보다 몰입하는 연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공연을 위해 2년여 동안 권투를 맹훈련’했다는 홍보 문구에(물론 그 노력은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스파링 장면을 보면서 기대를 했다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역시 극을 끌어가는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가 위안이 되고 흥얼거렸던 이들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공연이다.*
사진출처 - 애플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