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길 떠나는 가족] 길 위에 있는 가족

구보씨 2014. 6. 24. 16:02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29.5 x 64.5cm, 1954년 작


이중섭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자, 모사꾼이 판을 치고 그 와중에 가족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아들이 모사꾼으로 밝혀지면서 한국의 법망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일화입니다. 6.25동란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반세기만에 다시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도망친 이중섭 가족의 씁쓸한 일화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이 담긴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을 바라보는 심정이 더욱 서글퍼집니다. 누구보다 가난하게 살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에 가족이 떠나야 하는 아비의 마음은 짐작하기도 힘듭니다. 또 가난한 조센징 피가 섞인 채로 살아온 그 아들의 상황이나 심정을 모르고 함부로 욕만 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전 관객이지만 무대로 다시 불러온 이중섭에게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의 가족이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 들어와 이 작품을 봤을 리는 없겠지요. 이중섭의 치열한 삶을 다시금 그의 가족들이 보고 깨달았으면 합니다. [2014.08.31] 




초연 당시 포스터 외


제목 : 길 떠나는 가족

기간 : 2014/06/24 ~ 2014/07/13

장소 : 명동예술극장

출연 : 지현준, 문경희, 전경수, 한갑수, 김동완, 장재호, 이기돈, 배보람, 변민지, 안연주, 이승우, 이재훈, 김태현

대본 : 김의경

연출 : 이윤택

무대 : 이영란

주최 : 명동예술극장, 조선일보

제작 : 명동예술극장





<길 떠나는 가족>에서 궁금했던 부분은 이윤택 연출과 이영란 무대디자이너와의 만남이었다. 이윤택 연출이 중극장 규모의 극장에서 연출한 작품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2011.01.08~16,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나 <경성스타>(2010.11.19~28,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을 떠올려보면 세트에 공을 많이 들여 사실적으로 꾸민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희곡이 사실주의를 표방하고, 당시 시대 정서를 살리는 데에 주력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대를 비롯해 소품과 의상에 들인 정성이 새삼스럽게 보일 정도로 세심했다. 


이듬해 겨울, 같은 극장에서 올린 <꿈 - 스트린드베리이 100주기 페스티벌>(2012/12/07~16) 역시 환상극이지만 무대만큼은 2층 세트를 세우는 등 역시 노력을 많이 들였다. 이윤택 연출은 산하에 무대제작사를 운영할 정도라, 전부터 그가 무대에 쏟는 정성이나 중요성을 짐작할 만했다. 3년에 걸쳐 매년 연말마다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린 공연은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하는 게릴라극장의 좁은 무대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1년 치 한을 넓은 무대에서 풀어내는 듯이 보였다.



 

강한 카리스마에 바탕을 둔 장악력으로 지독하게 배우들을 조련하고 연습시키면서 연극을 올리는 그가,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아티스트 이영란 대표와 협업이라고 할 정도의 작업물을 올린다? 한편으로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무사히 진행하여 좋은 결과를 낼지 우려했던 부분이다. <길 떠나는 가족>에서도 이윤택 연출이 사실주의에 집착한 부분은 몸피가 작은 아이 역할를 맡은 안영주 배우나, 풍만한 큐레이터 역을 맡은 김태현 배우를 봐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연희단거리패 출신 배우가 두 명 출연하는데, 그 중 한 명이 김태현 배우다. 그녀는 연희단거리패 소속 배우지만 신인이나 다름없는 연희단거리패 산하 우리극연구소 20기 배우이다. 같은 비중이라고 해도 좋을 단역으로 나오는 14기 배보람 배우보다 한참 후배이다.


말 나온 김에 설명하지면 앙상블로 나오는 배보람 배우는 연희단거리패의 차세대를 이끄는 배우로 요즘은 주로 주연급을 맡는다. 그녀가 단역으로 나온 점도 흥미롭다. 이 작품을 연희단거래패가 만들었다면 아마도 부인 이남덕 여사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아무려나 단역으로 또 앙상블로 그녀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쉽지 않은 결정일텐데 작은 역할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는 말을 떠오른다.



뒤에서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가 배보람 배우이다.


이 작품은 1991년 초연 당시에도 이윤택이 연출을, 이영란이 미술감독을 맡았던 작품이다. 23년 만의 재공연은 그래서 조금은 덜 완고하고, 불안했지만 실험 정신으로 가득 찼을 젊은 예술가였던 두 사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국내 제작시스템 가운데 우수한 편인 명동예술극장의 중재가 있었으리라 본다. 짐작이지만 91년 초연으로 서울연극제에서 작품상·희곡상·연기상 등을 수상하고, 미국 공연을 했을 만큼 좋은 성과를 거둔 이후 두 사람이 공연으로 만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불과 불이 만나 개성이 강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중섭 역할을 맡은 지현준 배우는 누구보다 바쁘게 연극 무대에 오른다. 것도 하나같이 대작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먹어치운다. 만약 내가 배우였다면 부러움과 질투로 천불이 올랐을 텐데 그럴만한데 연기력이 물이 올랐다.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서일까 비쩍 마른 지현준 배우를 보면서 이승헌 배우가 떠올랐다. 연희단거리패가 제작했다면 그가 주연을 맡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헌 배우가 연기 지도를 맡았다. 습득력이랄지, 흡수력이랄지 지현준 배우를 연출들이 찾는 이유가 있다. 이승헌, 김소희로 대표할 수 있는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무시무시한 파토스 연기를 단 한 작품 만에 엇비슷하게 소화해다니 대단한 배우다.



 

앞서 길게 배우들을 설명했듯 이윤택 연출 작품은 배우들 연기가 워낙 드세게 불타오르는 지라, 무대는 딱 무대로 그 만큼의 역할, 사실주의 작품은 사실주의 작품으로 딱 그 만큼 보이면 그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오브제 극일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영란 대표가 만났으니 참 얄궂기도 하고, 자칫 이도저도 아닌 작품이 나올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작품을 2009년 임형택 연출이 올릴 당시, 같은 배역을 맡은 정보석의 섬세한 연기와 달리, 지현준의 연기는 관객들 시선을 빼앗을 만큼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예술가로 시대와 오체투지했던 반쯤 광인이 된 이중섭이 활활 타오른다. 



 

이윤택이 배우들을 가지고, 인간 이중섭을 기이한 그의 행적까지 가감 없이 투사해 불러왔다면, 이영란은 그의 내면이 꽃 피운 작품을 그 위에 투사를 합니다. 연꽃이 흙탕물 위에서 피우듯, 하지만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듯, 진흙탕과 뿌리와 꽃이 무대 위에서 겹치면서 상승효과를 낸다. 이윤택이 이중섭의 외공을, 이영란이 이중섭의 내공을 담아내 균형 잡힌 작품을 올린 셈이다.

 

지금 작품 완성도로도 관객들이 감동을 받지만 무대스케치로 본, 그리고 공연에 앞서 관객을 위해 마련한 이영란의 ‘15분 강의’에서 들었을 때 이영란의 의도가 그 만큼 무대에서 잘 살았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이영란의 무대디자인은 좀 더 힘을 뺀, 간결하고 담백했다고 봤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백김치에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싸먹는 맛이랄까, 자체로 일품이지만, 백김치는 역시 밥과 먹을 때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일본 처가로 이사한 가족에게 보낸 이중섭의 자필 편지


사진출처 - 명동예술극장, 잡초 님 블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