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화가들The Pitmen Painters_2010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 그냥, 우선 그냥 그려보세요
2010년 5월, 4년 전에 초연을 올린 <광부화가들>입니다. 오늘(5.11) 마지막 공연을 마친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를 연출한 이상우 연출이 만든 작품입니다. <한때....>도 그렇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번안극을 가장 잘 만드는 연출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접 번역을 해서 올리기도 하니, 원작의 기조를 떨어트리지 않고도 과감하게 생략 혹은 변화를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광부화가들>은 2013년에 재공연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초연 당시에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고, 자체 제작했으니 재공연이 무리가 없었겠지요. 제작극장으로 좋은 점은 알고보면 좋은 레퍼토리나 노하우를 무궁무진하게 쌓고 있는 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좋은 사례로 명동예술극장은 관객 대상 프로그램으로 이 작품을 2011년 아마추어배우교실 제 2기 공연으로 올렸습니다. 참고로 광부화가들의 작품이 궁금한 분들은 애싱턴그룹 홈페이지 http://www.ashingtongroup.co.uk 를 참고하시길. [2014.05.11]
제목 : 광부화가들The Pitmen Painters
기간 : 2010/05/05 ~ 2010/05/30
장소 : 명동예술극장
출연 : 권해효, 김승욱, 이대연, 윤제문, 문소리, 장세하, 원창연, 장아름, 손성민
원작 : 리홀
번역/연출 : 이상우
제작 : 명동예술극장
명동예술극장이 좋은 연극을 통해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고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목표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작품입니다. 다만 개관 이후 명동예술극장이 선보인 일련의 공연들이 모든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두지는 못했음을 알고 있기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이번 작품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입니다. 이 공연의 연출자 이상우 선생을 비롯하여 참가하는 스태프, 캐스트 모두가 내공이 만만치 않은 면모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광부화가들>(The Pitmen Painters) 팸플릿에 실린 구자홍 극장장의 인사말이다 명동예술극장 공연작을 두고 실망감을 부러 감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광부화가들>에 대한 자신감이 과하게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공연계에서도 주거니 받거니 워낙 자화자찬이 흔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극장장 입장이고 보면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하기 힘든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그럴까.
배우들이 보고 있는 그림을 2013년 재공연 포스터 이미지로 썼다.
그런데 인사말에서 든 자신감의 근거가 연출가, 출연자, 스태프라면 경솔한 언사가 아니라는 것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권해효, 윤제문, 문소리 등 영화배우로 활약을 하는 명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작품이니 일반인들에게도 눈길을 끌지만 연극배우로 중견배우인 원창연, 김승욱, 이대연이 한 작품에서 만나는 캐스팅만으로도 연극을 보는 관객치고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작년 10월 아르코예술극장 기획공연 선정작 <뱃사람>의 이호재, 정동환, 이남희, 이대연, 이명호 캐스팅 이후, 이 정도 내공을 쌓은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작품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어쩔 수 없이 배우 예술인 연극을 두고 이만큼 꽉 찬 무대를 본 적이 있나 싶다. 이를 비교하면, 뭐랄까, 아이돌 걸 그룹의 인기 멤버들이 모인 프로젝트 그룹 4Tomorrow 등장에 비견될만한 일이다.’ 당시 감상을 적은 한 대목이다.
게다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겸비한 배우들의 조합을 조율하는 연출이 이상우이다. 올해 영화 <작은 연못>의 각본, 감독으로 영역을 확장한 그는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거장 중의 한 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소극장 객석에서 학생들 박표작을 유심히 보는 모습을 종종 봤는데, 교수, 작가, 연출, 번역, 영화감독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보는 늘 관심을 끈다. <뱃사람>의 연출 이성열도 뛰어난 젊은 연출가지만 무게감이 다르다.
<광부화가들>에서 주연급이 아님에도 문소리가 합류한 데에는 이상우 연출의 아우라가 있음이 알려진 바이다. 다른 배우들도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이상우 연출이라면 바쁜 일정에 쫓기는 배우더라도 욕심을 낼만하다. 더욱이 <광부화가들>은 25일 간의 공연 일정이다. 짧지 않은 공연 기간을 더블 캐스팅 없이 채워야 한다. 연출, 스태프는 물론이고 명동예술극장 입장에서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도 극장 시설에 이 정도의 드림팀을 구성하고도 관객이 들지 않는다면 한국 연극계의 근본적 전환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은 어떨까. 엘튼 존의 참여로 더욱 관심을 모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리 홀이다.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오랜 준비를 거쳐 올해 8월부터 뮤지컬로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외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부분은 사실 리 홀이 하고자 하는 맥락과 다소 다를 수도 있다. 광산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명확하다. ‘문화는 나누는 것이다. 문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가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광부화가들>은 어린 소년 빌리의 발레에 대한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 아버지들의 이야기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영국 북부 탄광촌 출신의 로열 발레단 댄서 필립 말스덴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면 <광부화가들>은 ‘애싱톤 그룹’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광부’와 ‘화가’라니, 가난한 광부들이 예술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1930년 대 영국 광부들의 실상이란, 동시대 일제 강점기의 광부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처한 입장이나 발전 정도가 다르다고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 갱도로 들어가는 최하층 노동자의 삶이란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부 출신 화가들의 작업실을 주 무대로 삼은 이상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남루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상우 연출이 번역을 하면서 당시 정치사회적인 정보를 덜어냈다고 한 이상, 실화를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에서 광부들의 비참한 실상이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내외부적 갈등을 무대 위에서 표출하지만 거칠게 치고 나가면서 연극적 긴장감을 불러오기보다는 정해진 결과를 향해 가는 일련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의도는 대중적이지 않은 원작과 영국의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다수의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도 보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 비판을 감수해야할 지점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첫 영화 연출작으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노근리 학살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을 다룬 이상우 연출이고 보면, 그가 사회정치적 부담을 부러 피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화는 기존 영화 제작사들이나 감독들 대신 그가 짐을 졌다고도 짐작한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일까. 작품 속에서 광부들의 그림은 적어도 계급 갈등처럼 보일 수 있는 의도를 여실히 허문다.
무대 위에 걸린 두 대의 스크린으로 선보이는 ‘애싱톤 그룹’의 당시 실제 그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투쟁을 담은 그림이 아니다. 이들이 그리는 그림은 때로는 그들의 실제 모습을 담은 당시 흑백 사진 몇 컷과 정반대의 지점을 향하고 있다. 단순하고 순박하고 원근감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 지미의 그림은 총천연색 동화의 일러스트나 다를 바 없다.
Pigeon Crees by Jimmy Floyd
게다가 애써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거나 흑백 사진이 아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냥 보이는 현실을 그릴 수 있을 만큼 그린 작품이다. 관객들 역시 궁금했던 첫 번째 과제물과 두 번째 과제물을 본 이후 연극은 당시 공시적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학벌, 탄광촌을 벗어난 적도 적고, 주급 3파운드의 광부들의 그림이 점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다는 전제 하에 그림을 봤다면 우리가 짐작하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짐작할 수 없다.
Whippets by George Blessed
시대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나 광부로서 자신들의 삶을 다룬 그림에서도, 적어도 내가 보기에 과잉이 아닌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마찬가지지만 예술의 가치와 가능성이란 특정 인물에 한한 게 아니고,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삶에 쉽게 녹아드는 동시에 놀라운 가능성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애싱톤 마을 남자들과 미술교사인 라이언의 첫 만남을 보면 당최 서로 이해 지점을 찾지 못한다. 처한 입장이 다른 상황은 쉬운 단념으로 이어진다. 미술에 대한 기초 이해는커녕 그림을 본 적이 없는 광부들에, 전기 코드 사용 하나하나까지 조합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보통 미술교사라면 그만 두는 게 당연한 선택이다. 라이언은 포기하는 대신 “그림을 그려보라”라는 주문을 한다. 그것도 “그냥”이다. 예술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기본 전제에 충실하다. 그렇다고 라이언의 일방적인 희생은 아니다.
Fish and Chips by Fred Laidler
2막에서 라이언은 애싱톤 그룹의 유명세에 힘입어 원하는 대학 교수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를 한다. 1막과 다르게 다소 계산적인 라이언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훈훈한 교훈극에서 봄직한 존경하는 교사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모습은 예술이 관객과의 호흡인 동시에 개인의 내면 성장이라는 이치와도 닿아 있다. ‘애싱톤 그룹’의 작품은 투박하기는 하지만 소속 광부들의 작품은 엇비슷한 대신 개성이 뚜렷하다.
‘광부화가들’이란 제목이 각각 동떨어진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들리지만 ‘애싱톤 그룹’ 사람들은 광부였기 때문에 화가가 될 수 있었다는 원칙을 깨지 않는다. 뛰어난 솜씨로 전업 작가로 후원 제안을 받은 올리버는 ‘사고파는 예술’을 하는 대신 삶의 원동력으로 예술을 선택한다.
The Miner by Leslie Brownrigg
연극이 끝나고 1930년대 당시 영국 노동조합 프로그램으로 가능했던 ‘미술 감상’이 현실에서는 왜 불가능한가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 다시 생각해봐도 해리의 주장처럼 노동의식을 강화하는 이념교육이 아닌 미술 감상이라니,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0 허황된 얘기처럼 들린다. 당시 현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여유와 가능성을 안고 살지만, 강박관념에 빠져 스스로 가능성을 축약시키는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곧 관객인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간다.
당시 상황이나 애싱톤 그룹의 작품 수준은 사실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밀가루라면 효모에 반응을 하고 부풀듯이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술이 나를 나로 존재하도록 이끄는 힘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린 문제이다.
광부이자 화가일 수 있다면, 농부이자 시인일 수도 있고, 또 누구라도 자기 안에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극중에 선보이는 100여 점 이상의 그림 중 명화들과 애싱톤 그룹의 그림들은 돈 가치는 천지차이일지 모르고 미술적 미학 가치에서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연극적 미학에서는 전적으로 등가이다. 같은 조건, 동일한 크기의 스크린을 통해서 본 이유도 있겠지만 극중 작품들이 관객에게 일깨우는 자극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광부화가들>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동안, 근처 남산예술센터에서는 때마침 2010 시즌 프로그램 신진연출가 기획전이 열렸다. 완성도 높은 중견 연출가의 작품과 더불어 신인 연출가의 도전적인 작품이 명동에서 같이 선보인 것이다. 재밌게도 이상우 연출의 한국예종 제자들인 한현주 작가, 김한내 연출의 <우릴 봤을까>가 때마침 무대에 올라 제자와 스승의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남산예술센터가 이전부터 주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던 반면 명동예술극장의 개관으로 그 중심을 잡았고, 우연치 않은 이번 기회는 각각 그 역할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광부화가들>은 명동예술극장의 나아가야 할 지점을 명쾌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사진출처 - 명동예술극장, http://www.ashingtongroup.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