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하녀 마리사] 작가를 보고 갔다가 배우를 읽다
제목 : 유쾌한 하녀 마리사
기간 : 2014/03/06 ~ 2014/03/23
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출연 : 서정연, 김태근, 이은, 권귀빈, 박기덕, 박호산, 이창훈, 노현우, 안혜경, 배유리
대본 : 천명훈
연출 : 김한길
기획 : 두산아트센터, 맨씨어터
제작 : 맨씨어터
익숙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치미를 떼면서 익숙하지 않게 들려줄 것인가가 천명관의 소설이 처한 문제 상황이며, [고래]에서 끝없이 곁가지를 치며 무한증식하는 이야기의 축적이 안겨주었던 즐거운 공포를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가 또한 [고래] 작가로서 떠않을 수밖에 없는 자의식이겠다. -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해설문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의 아이러니’(김영찬) 중 일부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것도 에센스라 할 만한 소설로 풀어낸 이야기를 다시 사람이 읽고 고쳐 쓰고 상상해 무대에 올리는 일은 이래저래 손익계산이 잘 맞지 않는 짓이다. 미사여구로 도배를 했거나, 자의식이나 허영으로 가득한 일기류 따위면 또 모른다. 명란젓 스파게티가 있듯이 느끼함을 덜어내 색다른 맛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이야기 전달에 충실한데 하필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이 ‘캐릭터’이라면 더욱 난감하다.
양날의 검, 그렇다. 천명관의 소설은 그러하다. 기가 차지만 참 옹골진 인물들 보면서 깔깔대고는 은근히 영화나 연극을 기대하지만 기대보다는 입맛이 쓰다. [고령화 가족]을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았는데, 둘 다 나쁘지 않았으나, 연기도 잘 하였으나 이건 뭔가 씹고 난 껌을 다시 씹는 기분이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난 소감은 ‘그렇지만 소설을 읽어라’로 귀결이 되고 만다.
[고령화 가족] 가장 불행한 나이를 견디는 아저씨 아줌마들을 위하여 http://blog.daum.net/gruru/174
단물이 남고 안 남고는 차후의 논쟁점이다. 결국 익숙한 코드가 횡횡하지만 황당하면서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지는 [고래]는 결국 영화로는 보기 힘들 것이다. 머릿속과 극장 스크린과의 차이랄까, 이야기(소설)가 3D로 진화한 영화와 견주어 우위를 점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아무려나 [고래] 영화 판권이 날름 팔렸듯, 누구든 만들고 자시고를 떠나 손에 쥐고 봐야한다는 마력을 가진 글을 천명관은 쓴다. 연극 [유쾌한 하녀 마리사](이하 마리사)는 그가 쓴 첫 번째 희곡이다. 이 작품이 앞서 비교한 교묘한 이유는 앞서 늘어놓은-누구나 짐작하면서도 불만인-먹고 싶지만 함부로 먹을 수 없는 독사과의 딜레마를 깨는 방법을 작가에게 직접 구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와 백신을 둘 다 쥐고 장사를 한다랄까, 독자 입장에서 뭔가 좀 정도라거나 상도덕에 살짝 어긋난 듯한 기분도 들기도 하고, 소설도 좋아하지만 못지않게 연극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기실 연극으로 원작을 대신하는 일이 빈번한 주제에서 청출어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연극 [마리사]는 작가에게 직접 청탁해 희곡을 받았다. 천명관이 방외(方外)작가로 불리우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소문을 들어 알 듯 나온 혹은 낳은 희곡은 소설과 비슷한 듯하나 생김새며 성격이 달랐다. 단편인 원작이 대부분 유서 형식에 말미에만 살짝 반전을 주는 식인데, 구성의 변칙은 논외로 하고, 회곡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다른 시선에서 다룬다. 미필적고의에 의한 타살 사건을 두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촌 쯤 사이에서 흔히 잘못 아는 정도로 원작과 희곡은 거리를 둔다.
우선 마리사가 손주를 둔 할머니(나이는 적어도 중년 이상 부인)에서 어린 처녀로 회춘을 하면서,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한다. 참치잡이 선원 오빠 파올로는 연극에서 아주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로맨스도 살짝 등장해 신참내기 경찰 안커 순경은 마리사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러니 수사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하녀로 마리사의 싹싹하고 부지런한 장점이 부른 운명의 장난 이후 전개가 소설을 읽은 독자 입장에서 후속편 쯤이 되는 식이다.
새로운 이야기가지로 파생, 여기까지가 희곡 작가로 그의 몫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고령화 가족]이 천명관 팬들을 비롯해 시나리오 작가로 열등감(?)을 가진 그에게 세상을 향한 반전 성공사례이자 복수극일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이야기꾼으로 탁월한 입담이 팀플레이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고 할까, 소설을 보지 않은 관객은 뭐라할지 몰라도 천명관 홀릭들에게는 혼란을 주는 작품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 탓이 아니다. 아울러 연극도 마찬가지다.
아무려나 [마리사]는 극단 입장에서 더 큰 골칫거리를 던진다. ‘예측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를 ‘다양한 행동 반응, 다채로운 심리와 표정 들의 한 단면을 포착하는 소설’을 쓰는 천명관에게는 ‘국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아니 애초 국적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 세사’(해설문 일부)를 풀어내는 게 숙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포르투갈 출신 하녀라니, 이걸 어떻게 무대에서 보여줄 것인가 말이다.
천명관은 평범하게 생겼다. 주변에 비슷하게 생긴 친구가 한둘 있다.
애초 초연이 제2회 대학로 코미디페스티벌을 겨냥한 작심하고 코미디극인 이상 무대, 분장, 의상의 희화화는 예견한 바이다. 요것들은 양념이라면 배우가 알멩이일텐데, 맨씨어터는 믿을 만한 내공을 갖춘 극단답다. 12년 당시 초연작을 보지 못했고, 앞서 봤던 맨씨어터 주축 격인 배우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더블 캐스팅으로 박호산 배우가 나온다-젊은 배우들이 이렇게 천연덕스럽다니 기대 이상이다.
프랑스? 포르투갈? 장담하건대 가난하였던 작가도 가보았다거나 특별히 애정이 많은 나라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바 주브로카공화국이어도 상관없다. 참고로 주브로카공화국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배경인 가상 국가이다. 그렇다면 굳이 선입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결과는? 등장인물 8명 가운데 주조연을 가리지않고 전형적인 캐릭터가 없다. 아니다, 전형적이되 배우가 끄집어 낼 수 있는 희극배우로 각자 자기가 가진 특징을 죄 밖으로 드러내 쓰고 있다. 그러니 인물마다 지루하지 않고 생동감이 넘친다. 희극배우에게 말투, 억양, 얼굴, 뱃살, 키, 팔길이, 알통 등등은 그 자체로 희귀한 아이템이다.
그래서 이은 배우의 커다란 눈과 코맹맹이 소리는 더도 덜도 아닌 딱 마리사이다. 유럽형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쏙 빼닮은 그녀로 인해 앞으로 마리사는 이은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그래서 포스터에 등장하는 프로필 사진이 아쉽다. 낯설다. 프로필 사진과 다른 완성형 분장으로 봐야 한다. 안커 순경 역의 이창훈 배우 역시 보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였는데, 더블캐스팅이 다름 아닌 박호산 배우라, 박호산이 연기한 안커는 또 어떨지 궁금하다. 단역이랄 수 있는 수잔느 역의 배우리 배우도 안혜경 배우가 궁금하다.
머리에 빵 셋을 이어붙인 마리사가 최종판 마리사이다.
연극이 배우 예술의 꽃이라고 하지만 골고루 눈도장을 꽉꽉 찍은 작품이 있나 싶게 배역 해석이 맘에 든다. 여기가 완성형일지는 레퍼토리 공연이 된다면 이후 캐스팅을 봐야겠지만 이런 조합은 참 맘에 든다. 무대와 객석이 가까운 소극장 연극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잘 살렸다.
아는 척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글 서두 인용문은 왜 따왔을까. 인용극을 더 요약하자면 문학평론가 김영찬의 논지는 정통파가 아닌 변화구 투수인 천명관이 기존과 다른 어떤 공을 어떻게 구사할까, 궁금하다는 게다. 너클볼이 익숙치않다는 건 장점이지만 너클볼로 성공한 메이저리거가 드문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천명관의 작품이 양날의 검이라고 했지만-너클볼이 그렇다. 감으로 던지는 너클볼은 던질 때마다 결과가 제각각이다-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게다.
종이책으로 구분이 있을 뿐 천명관식 글쓰기는 인터넷에서 점차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내공의 차이가 도드라지지만 독자의 시선을 언제까지 잡아둘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그를 방외작가라고 부르는 이상 그의 경쟁 상대는 소설가에 한정할 수 없다(그가 의도했든 안했든 기존 문학 판에서 그렇게 보고 있다는 언질쯤으로 이해한다). [마리사] 경우로 보듯 솔직히 왜 소설집 가운데 표제소설인지 갸우뚱한 원작을 가뿐히 뛰어넘는 희곡으로 성취도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초연 당시 포스터는 책 표지 이미지를 그대로 따왔다. 하지만 소설 속 마리사는 손주를 둔 할머니이다.
즉, 소설집 표지는 다른 소설에서 착안한 이미지인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원작에 기대 연극을 홍보하다보니 포스터가 산으로 갔다.
소설로 벌써 2007년이니 해묵은 이야기를 그만 두기 앞서, 익숙하지 않기로 노이로제가 언뜻 엿보이는 당시 작품은 ‘환상적인 이야기의 활력보다는 현실과 인간관계에서 한 개인이 부딪히는 곤경이나 사소한 소동과 갈등들’에 집중하면서 전환으로 그 스스로에게 의미를 줄지 모른다. 판을 달리해 영화 연극으로 2014년으로 오면 유명세로 얻는 이득 이외 고민할 부분이 많다.
연극 [마리사]는 추천작이지만 더 이상 ‘천명관’ 혹은 ‘천명관의 소설’로 어드벤티지가 있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을 직접 보기 전까지 몰랐다. 다만 천명관은 소설로 만났을 때 최고라는 생각이 앞으로 바뀔까 싶긴 하다. 왜냐하면 자체로 높은 수준에 있는 좋은 연극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맨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