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저항하는 여인들] 저항하는 이유를 찾아야
제목 : 난세에 저항하는 여인들
일시 : 2016.03.02 ~ 2016.03.20
장소 : 게릴라 소극장
출연 : 윤종구, 신진철, 신진우, 이훈희, 강현극, 김영성, 곽유평, 김지수, 이수진, 김민건
원작 : 아리스토파네스
연출 : 황선택
주관 : 게릴라극장
제작 : 극단 해적
섹스를 통제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섹스파업’을 벌이면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 ‘리시스트라테’는‘아테네인들의 평화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희극적으로 다루면서 최소한 연극, 특히 희극에서만큼은 평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사물의 본성이라는 점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여자의 평화Lysistrata]는 평가를 받는다.
코미디를 보고 전쟁을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최소한 연극, 특히 희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는 힘들다. 찰리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 가 아마도 같은 의도이자 시도로 ‘민주주의로 하나 되자!’는 군대 연설은 지금도 명대사로 환기되고 있지만 이후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추방당한 불행한 인생이 그랬듯 영화와 현실 사이 괴리가 깊다.
시대가 많이 흐르기도 하여 2500년 전 매우 파격적이었을‘리시스트라테’의 의도는 희극으로 봐도 그리 흥미롭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극단 해적 버전을 보기 전에 봤던 극단 물결의 ‘리시스트라테’(2015)는 점잖았다. 일반 시민들이 작품에 참여해 화합의 의미를 살렸다지만 밋밋했다.
극단 해적의 ‘난세에 저항하는 여인들’은 해석이 다르다. 그녀들의 섹스 파업 역시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로 본다. 여인들 역을 죄다 남자배우들이 하는 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옷차림과 화장을 제외하면 목소리며 행동이며 사상이며 하나같이 권력투쟁에 나선 ‘정치인’들이다. 리시스트라테 역 김영성 배우는 근육질의 마초처럼 보이고, 통통한 살집에 부드럽고 여성스러우며, 남자의 판타지가 실제 그런지,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의 개인 의견인지, 백치미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는 미리네 역 신진철 배우는 연극을 시작하기 전, 가난한 연극판 현실을 두고 후배에게 악다구니를 한다. 후배는 연출을 헐뜯고 선배는 후배를 욕과 폭력으로 대한다. 그 역시 선배에게 마찬가지로 당한다. 근절되지 않는 군대 내부반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의도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런 설정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권력투쟁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원작에 대한 이런 재해석은 극중 니체가 등장해 권력 비판을 장광설로 늘어놓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놓고 직설이어서 거칠다는 인상을 주는데, 왜 극단 해적이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지리우스, 꼴리네우스라는 날것 그대로의 명칭이나 예술 검열이나 세월호 사태와 관련해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대목도 거칠 게 없다. 다만 플라톤의 이상주의 철학을 마감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니체의 등장이 이상주의 시대의 작품을 재평가하고 해석하는 데 생뚱맞지는 않다. 주인공도 목청이 터지도록 신은 죽었다!를 외쳐대는데, 새로운 조합이지만 철학적으로 평가가 내려진 지 오래, 신선한 해석은 아니다. 되레 니체는 전쟁광인 히틀러를 위한 사상가를 오명을 쓰기도 했다.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개념으로써 연극 따위 집어치우고 ‘연기는 꼴리는 대로 막 하는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형식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 연극판을 휘저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원작의 의도와 반대로 극중 전쟁광인 남성 역에 키가 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배우들이 등장해 걸레를 문 듯 진득하게 욕설을 주고받는 장면도, 남녀 사이 관습을 깨는 듯 시원시원하다. 다만 마무리로 집단 섹스로 하나가 될 때 내내 중성적이었던 여자배우들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섹스야말로 정치적으로 나뉜 사회적 혹은 관습적 남녀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의도로 보인다.
황선택 연출은 세상의 평가나 해석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해맑게 웃는 자연인이 부럽다고 했다. 때로 나도 그러하나 그 부러움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우리가 카메라 편집본으로 본 그 모습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의도가 보이는 해석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사진출처 - 산울림소극장, 극단 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