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威力위력_두산아트랩 2016] 45분짜리 위트 넘치는 실험의 위력(僞力) 혹은 위력(威力)
제목 : 두산아트랩_소리의 威力위력
일시 : 2016.03.10 ~ 2016.03.12
장소 : 스페이스111
출연 : 허연정, 백성철, 신재훈, 공상아, 하준호, 이시훈, 김보미
작가 : 김선미
연출 : 신유청
제작 : 두산아트센터
듣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해 녹음 현장을 생중계로 보여주는 라디오 콘셉트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 소리의 세계, 눈으로 보는 대신, 귀로 듣고 상상하는 라디오 드라마가 연극 콘셉트이다. 젊은 세대는 스피커를 통해 공유를 했던 라디오 대신 외부로부터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기 위해 이어폰을 적극 활용한다.
보통 (능동적으로) ‘본다’고 하고 (수동적으로) ‘듣는다’고 하지만 지금의 듣기는 수동형이 아니다. ‘듣기’를 위한 수단인 전화기가 ‘보기’ 혹은 ‘행동하기’에 적합한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보고듣기’는 적극적인 행동 양식이다. 지하철, 버스,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을 꼽고 있는 경우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읽힌다. 특히 지하철이 붐빌수록 내 전후좌우로 누군가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일수록 서로 철저하게 외면하고 외면당한다.
잠을 자면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 이젠 꽤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듣지 않으려는 세상, 듣기를 두려워하는 세대의 양산은 역으로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거나 실체와 허상이 구분이 가지 않는 세태에서 비롯되기도 한 셈이다. '귀를 열어 그의 말을 듣고 소통하라', 는 단순 명료한 사회적 명제는 말하는 이의 얘기가 참일 때만 성립한다. 보이스피싱을 보라.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는 세상이다. 믿을 수 없는 소리,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무의미한 소리가 가진 위력僞力, 가짜 힘을 경계하고 주의해야한다.
연극‘소리의 위력(威力)’에서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시각과 청각, 위력(威力)과 위력(僞力)의 경계가 위트 있게 비틀어지고 뒤엉킨다. 두산 아트랩 성격 상 완성이 아닌 과정을 관객과 공유하고 보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배경은 1962년 라디오드라마 전성시대, 즉 소리의 전성시대 녹음실로 생방송 현장을 중계하는 현장이다. 관객 대부분은 적어도 나는, 당시 드라마를 알지 못한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몇몇 영화, 드라마, 개그프로를 통해 짐작하고 상상할 뿐이다.
극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한 비극-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연인의 아버지가 각각 독립군과 일본순사-을 다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심각하지않고 코믹한 신파조로 당시 상황을 묘사하기 대문이다. 중간 중간 추억의 PPL광고도 그렇고 눈을 감고 들고 있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 당시 최고의 라디오 드라마 ‘어찌하오리까’를 듣는 듯 하다. 하지만 당시 드라마를 보지 못했으므로 앞서 말한 몇몇 이미지들이 겹쳐 떠오르는 착각이다.
성우가 생방송 시작 10분 전에 식사를 마치고 온다거나, 배탈이 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상황은 아마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중 사연을 보낸 당사자가 생방송 현장을 찾아오거나 혹은 직접 출연하는 상황 역시 그러하다. 사연당사자 문희가 녹음실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 또한 거의 불가능하거나, 인질극이벌어진 상황이라 방송을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연출이 무대 위 배우 옆에 앉아 실제로 효과를 조율하는 장면은 나름 참신한데, 인질극이 벌어지고 사건이 벌어져도 전혀 동요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모습도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가 녹음실에서 발사한 실제 총과 마지막 효과음으로 처리한 자살 총격 장면 연출 역시 그렇다. 눈을 감고 들으면 극중 실제 총소리와 망치로 내는 효과음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청취자 입장에서는 그녀가 마지막에 자살을 했다고 믿을 수 있다.
우발적이고 긴급한 상황에서 문희의 사연에 동조해 그녀를 도와 연기를 펼치고 효과음을 내는 성우들로 인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페이크 다큐인지, 실제 벌어진 상황인지도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희가 직접 라디오에 등장해 애인의 무죄를 주장해도 진실과 거짓이 모호한 라디오 드라마와 듣는청취자를 포함해 ‘소리의 세계’에서는 무의할 수밖에 없다. 그녀 스스로 자살로 위장을 했음으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소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분장이나 소품에서도 의도로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현재가 골고루 섞여 있다. 의상은 과거에 맞춘 듯하나, 무대위 조정실 스태프(연출 신유청)는 무대의상이 아닌 채로 스냅백을 쓰고 있다. 녹음실 전화기는 로터리식이지만 주변의 각종 기자재는 최신식(실제 조정을 해야 하므로 그렇다)이다. 화장지가 없어 신문을 구겨 휴지로 쓰는데, 신문이 컬러판이고,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는 생수통이다. 게다가 성우들이 들고 읽는 대본은 A4 프린트물이다.
신경을 쓸 여력이 없거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일텐데, 연출 의도와 별도로 과거와 현재, 가상과 현실의 공존은 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이다. 극중 가장 중요한 ‘소리’를 내는 음향효과장치들은 실제에서는 숨겨야 하지만 연극에서는 ‘보이는’ 오브제로 신기하고 아기자기한 묘기처럼 보이지만 이는 들리는 과거 극중에서는 상상력을 불러오는 한편, 보이는 현실 무대에서는 교묘한 속임수인 셈이다.
익히 무대 경험이 있고 재기가 넘치는 작가와 연출가는 그들의 말처럼 짧은 한 달 안에 재미있는 소품을 한 편 올렸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하다! 남녀노소 누가 봐도 재밌을 작품이고,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봤다. 공연시간을 늘려 완성작이 기대가 되지만, 아트랩 실험보다 더 좋은 작품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낯선 50년 전이라는 설정에 시간이 촉박한 생방송 현장을 따와 빠르게 전개한 배경에는 당시 소리의 전성시대라는 의미도 있지만, 낯설고 어리둥절한 공간에 관객을 이끌어 흥미로우나, 극 전반에 걸쳐 얼개가 약한 부분에 대한 판단 감추는 장치이기도 하다. 45분짜리 단막극은 아쉽지만, 극 전체를 다시 고민하지 않는 이상 바뀌기 힘든 설정이나 무리한 상황이 많아 자칫 장점인 재미를 놓칠 우려가 있다.
'소리의 위력'은 올해 아트랩 가운데 가장 대중적(다음 작품이 다원 예술이므로 예견하자면)이다. 대중 작가로 혹은 연출가로 가진 아이템 외에 새로운 조합과 도전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실험’과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실험’이라는 게 지원을 받아 하지 않은 혹은 앞으로 하지도 못할 시도만이 아닐 것이다. 연출의 글에 '들리는 것은 더 주관적인 마음의 파장'이라는 대목이 있다. 이후 연극 '소리의 위력(威力)'이 파장의 위력을 보여줄지 아니면 위력(僞力) 그칠지 두고 볼 일이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