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옌]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신기루 같은 이름
제목 : 하이옌
기간 : 2015/06/26 ~ 2015/07/12
장소 : 청운예술극장
출연 : 고인배, 도영희, 민준호, 위명우, 태준호, 김서년, 김인묵, 마정덕, 유승철, 강한나, 김나은, 신영은
작/연출 : 한윤섭
제작 : 극단 에이치프로젝트
한국으로 국제결혼해 이주한 동남아 여성의 이름은, 한국이름으로 바뀌기 전의 무엇, 미개한 나라의 흔적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어도 제대로 하는 국민은 몇 되지 않는 주제에 한글만큼 영어가 친숙한 한국인에게 발음이 익숙지 않은 동남아인들의 이름은 자체로 주홍글씨일 수 있다. 연극 <하이옌>의 주인공 하이옌은 그 이름마저도 진짜 이름이 아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농촌으로 시집온 그녀에게 가짜 서류로 만든 ‘하이옌’이란 이름은 머지않아 떼어버려야 할 무엇이다.
이 연극의 마지막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본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 데에 있다. 한국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으나 가짜 신분으로 휘발하듯 추방을 당해 정체가 묘연한 그녀의 이름 ‘하이옌’은 비슷한 처지의 이주여성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대명사로 기능한다.
농촌 노총각 결혼, 이주여성 인권, 신종플루, 국제결혼 사기, 공직자 기강 해이, 가부장의 잔재 등 작품 안에서 다루는 한국사회의 이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결혼이 가족을 구성하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삶의 근간이라고 하나, 결혼률은 세계 최저, 이혼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사회는 구조적으로 살기 좋은 곳일 수가 없다. 게다가 임시방편으로 사오듯 결혼하는 국제결혼은 그 시작부터 비극을 낳을 여지가 많은 편이다.
이 연극은 이른바, 사회의 상식과 편견 사이를 오가는 작품이다. 물건을 고르듯이 만나 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하이옌은 결혼이 아닌 돈벌이가 목적이었으므로 타의에 의해 실종 당했을 때 ‘남편을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라는 가족, 경찰 이웃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만은 않은 짐작 가능한 반응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편 조영천은 ‘16살 나이 어린 여자’와 ‘문화 차이’그리고 그에 따른 갈등으로‘폭력’을 휘둘러 가출의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억측을 받는다. 이 역시 실제 사례에서 흔히 빚어지는 일이다.
결혼 한 지 보름도 안 되어 아내가 사라지고 남편이 아내를 찾는 과정은 실제와 비슷한 상황이나 연극이 다른 점은 그 둘이 서로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하이옌은 진짜 하이옌이 되고자 하고, 조영천은 남들이 보기에 온갖 진상 짓을 하더라도 천생배필인 아내를 꼭 찾아야 한다.
시의성을 띈 주제와 시의적절한 현실 반영과 색다르게 접근한 아이디어가 ‘제 25회 거창국제연극제 대상 수상작 서울 초연’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품은 분명하다. 2016년 최저임금이 처절한 수준에서 결정되자 엉뚱하게 외국인노동자에게 불똥이 튀는 현상을 보면 다문화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롯해 문화 차이 혹은 타인을 향한 벽의 두꺼움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 벽을 허물어보자는 의도 역시 작품 안에 광의적으로 녹아 있다고 본다.
다만, 작품의 전개가 우연의 연속인지라 사랑에서 비롯된 조영천의 절절한 감정선을 걷어내고 보면 얼개가 단단하지 못하다.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내를 길에 혼자 두면서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이유, 약국에서 감기약을 샀을 때 하필 신종플루로 의심을 받은 상황, 사진과 얼굴이 다르고 남편인 조영천이 부정하는 데도 가짜 하이엔(동명이인)을 내세우는 경찰과 국제결혼회사 사장 등 상황을 비극으로 몰기 위한 장치들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가짜 하이옌(동명이인) 역시 모두를 속이면서 자신이 실제 아내라고 우기는지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인물들은 전형적이고 상황은 관습적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몰아간 역설이 꽤 그럴듯하다. 요즘 유행하는 요리경연 방송에 빗대면 평범한 음식일 수 있으나 마지막 소스가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전구를 갈아 끼우듯 진짜 하이옌이 가짜 신분으로 쫓겨나고, 동명이인인 가짜 하이옌이 진짜 하이옌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사는 역설은 ‘우수 다문화 가족’ 사례로 가족, 마을, 관공서로 인정을 받아 표창장에 해외관광까지 다녀오는 결과를 낳는다. 가짜 아내는 한국말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해 시어머니에게 사랑을 받는다. 얼굴 예쁘고 이전 아내 못지않게 참하다. 그러니까 조영천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대한민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셈이다. (물론 그녀의 목적이 불명확하니 경찰조사를 받게 된 국제결혼회사 사장과 거래가 있었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 도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가짜 하이옌은 신분을 속여 결혼을 했으니 법에 따라 강제 추방이 마땅하고, 또 신종플루 의심에 따른 격리 상태에서 풀린 뒤 본인 의사가 아니더라도, 마사지클럽에서 몸을 파는 일을 했으니, 아이 아버지가 조영천이라는 주장도 의심스러울 법하다. 조영천과 사랑은 증명할 길이 없으되 정황은 명확하다. 당신이 조영천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사랑 대신 가정과 국가의 안녕을 택한 마흔 살 착한 시골 노총각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사진출처 - 에이치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