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시] 색이 바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제목 : 빨간시 Red Poem
일시 : 2014/10/09 ~ 2014/10/26
장소 : 뮤디스홀
배우 : 강애심, 전형재, 조두리, 레지나, 제희찬, 안재현, 이대희, 박현덕, 홍철희, 송재연, 김가람, 장원경, 변민지, 이지혜, 이송이, 신장환, 최준수, 유민경, 이운호, 이사랑
작/연출 : 이해성
주최, 제작 : 극단 고래
주관 : 극단 고래, 선돌극장
삶이, 살아있음이, 꽃 같습니다.
아름답고 두려운, 빨간 꽃 같습니다.
“극 중에 실제로 시가 두 편 나온다. 그 시를 타고 저승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시는 피안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쓰고 연출한 이해성의 말이다. 상투적인 비유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저물 때를 기다리는, 10월 쌀쌀한 바람 앞에 하염없이 잎이 떨어질 때가 가까운 꽃이다. 그녀들이 다 죽고 나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학대를 당했던 위안부들의 가슴 아픈 역사는 장례가 끝난 뒤 국화가 그렇듯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몇몇은 과장한 역사였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떠들어댈 테고, 당사자가 아닌 문제에 소극적인 우리는 혀 끌끌, 그러려니 할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다룬 연극(배수의 고도, 2014/06/10~07/05,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을 여름에 봤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진행 중이다. 11년 3월 11일 이후 3년이 지났지만 ‘멜트다운’ 현상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들리는 말로는 하루 300톤씩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조류를 타고 몇 년 후면 돌아온단다. 문제는 한국에서도 원전사고 위험이 높아진다는데,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게다. 그래서 <배수의 고도>는 나름 새로운 방식으로 색다른 시선으로 원전 문제를 짚었다. 소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미미할 수 있으나, 관객과 배우와 제작진이 새롭게 인식 혹은 각성을 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빨간시>는 2011년 12월 극단고래의 창단 공연이다. 2013년에 재공연을 올렸고, 2014년 4월부터 극장을 바꿔가며 공연 중이다. 어쩌면 잊히지 않기 위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앙코르 공연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10월에 본 <빨간시>에는 젊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세대를 바꿔가며 구술로 전승하여 잇듯 한 작품을 두고 이어가는 것이다. 제작극장이 늘면서 극단 체제가 점차 설 자리를 잊는다지만, 극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위안부와 故 장자연 사건이 얽힌 <빨간시>는 두 사건 중 무엇도 현실이 아닌 게 없다. 그리고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그 기류라 바뀌지 않을 성 싶다. 장자연, 한때 세계적인 영화 말미 스크롤에 걸릴 이름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을 이름은 기사로나 TV에서 다시 다뤄지지 않을 이름이다. 조선일보 계열은 더더욱 그럴 테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구도나, 저승에서 나름 한을 풀어주려는 한국 정서를 담은 염라, 옥황, 저승사자의 등장은 좋은 의도에도 할머니들의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했을 할미(강애심 역)의 독백 앞에 거리가 생기고 만다. 당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던 상황 묘사는 어떤 식으로든 몇 번을 듣던 보던 읽던, 무뎌지지 않고 가슴이 쓰라리게 아파온다. 강애심이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는, 일자리가 없어 아예 중년배우들 중심으로 극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와중에, 중년 배우로 쉼 없이 연극무대에 오르는 저력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매번 볼 때마다 대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빨간시>야말로 대표작이다.
일본군한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해서 낳은 아들의, 과거를 곱씹을 수밖에 없는 존재 자체로 애증일 수밖에 없는 그 등에 업힐 때, 등이 굽은 자그마한 뒷모습은 여지없이 그녀들의 그것이다. ‘할미’ 역에 더블캐스팅이 된 장원경 배우의 연기를 보지 못하였으나, 안타깝지만 어떤 여배우도 강애심의 할미를 따라올 수 없다, 는 걸 직감할 수 있다. 한이 절절하게 배인, 현실에서 여전히 풀지 못하고 응어리진 채인 그녀들의 심정을 담아 매일매일 연기를 한다는 건 무속인이 아니라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그 무게를 덜어주려, 할미가 좀 길게 쉴 수 있도록 저승 장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극장 공연으로도 나쁘지 않지만, 극장을 좀 늘려도 좋을 수 있겠다. 사물놀이 장면이 그래서 좀 더 커져도 좋고, 과거 좋은 기억과 연동해 피리 연주를 해도 좋고, 제작 여건만 되면 좋은 연주자들을 모아 연주를 해도 좋아 보인다. 고래가 해수면으로 그 큰 덩치를 내보이면서 숨을 쉬듯이, 잊히고 마는 문제를 놓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길 희망한다. 이해성 연출의 말대로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으니, 좋은 배우들이 자꾸만 느는 게 아닌가. 다음에는 다른 할미를 보면서 박수를 보내겠다.
"으으으으응. 복순이도 그렇게 죽고 김학수이 강덕경이 노수복이 김계화 곽복례 송남이 박잠순 권술선 김옥주 박옥련 이기선 정서운 석복림 홍재선 박두리 최일례 김난이 윤두이 성태운 임정자 김은례 장점돌 한옥선 김상희 천봉순 김순덕 다 그렇게 보냈데이. 인자 아무도 그렇게 못 보낸다." ('빨간시' 중 '할미' 대사 일부 인용)
일본 패망 직전, 철수하기 전에 도륙한 꽃다운 누이들의 실명이다. 당시 돌아가신 장례식에서 그렇듯 넋을 비는 자리를 채우고 지키려는 마음가짐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극단 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