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장이 집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

구보씨 2013. 6. 28. 18:51

제목 : 여기가 집이다 - 아주 오래된 苦시원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

기간 : 2013/06/28 ~ 2013/07/21

장소 : 연우 소극장(대학로)

출연 : 장성익, 박무영, 김충근, 백지원, 한동규, 류제승, 박기만, 김동규, 김정민, 강병규

작/연출 : 장우재

제작 : 극단 이와삼

홍보, 마케팅 : 한강아트컴퍼니

후원 :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우무대



극장을 운영하는 극단 연우무대 외에도 작년 12회를 맞이한 2인극 페스티벌 개최 등 연우소극장은 좋은 연극인을 양성하는 인큐베이터로 산파 역할을 그간 두루 해냈다. 배우가 아닌 관객 입장에서 봐도 1987년 이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연우소극장은 괜스레 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극장 용도로 짓지 않은 작은 작은 건물 지하 무대는 좁은데다 낮고, 80석 객석은 마름모로 갈라져 나뉜 구조라 이래저래 편하지는 않다. 소극장 가운데 꼽을 수 있는 작은 극장인데도 객석에 따라 무대 위 사각이 생기니, 배우는 정면이 아닌 꼭짓점을 두고 좌우 객석을 감안해 연기를 해야 한다. 물론 연출이나 무대연출 입장에서도 사각이 생기는 작은 무대를 염두해야 하니 여의치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우소극장은 대학로 숨은 선술집처럼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



 

내가 본 작품 가운데 연우소극장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을 꼽자면 호라이 류타가 대본을 쓰고, 김재엽이 연출한 극단 드림플레이의 <마호로바>(2011/09/01~2011/09/25) 미쯔리 축제의 둥근 보름달처럼 풍성한 [마호로바] http://blog.daum.net/gruru/1932 가 얼른 떠오른다. 일본의 시골마을 고택의 다다미 거실을 무대 위에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설치했다. 그 무대는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애환이 밀물썰물처럼 오가는 공간으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워낙 김재엽 연출이 사업수완이 좋고, 또 여기저기 지원을 받은 작품이고 보면 좀 더 시설이 나은 극장을 선택할 법도 했다.

 

아무려나 극장과 무대의 궁합이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진 작품이 드물기도 하였다. 연우소극장의 진면목을 본 셈이랄 수 있다. (따로 휴게실이 없는 소극장 공연이나 인터미션이 있는 2시간이 넘는 공연이었으니 작정을 하고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년 가까이 흘렀다. 그 사이 가끔 들른 연우소극장에서 본 무대는 생략하거나 간단한 소품 위주였다. 극장 구조상 동선을 방해하는 무리한 배치를 하기도 만만치 않을 법하다. 




<여기가 집이다>의 배경은 서울 변두리 20년 된 낡은 갑자고시원이다. 글쎄 마호로바 배경 고택처럼 나름 전통이라면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품 소개는 전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무대 정면이 고시원 복도길로, 거실 역할을 하는 곳이자 대부분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다. 보이지 않는 무대 뒤 옆으로 통하는 동선은 부엌이고, 마름모꼴 꼭짓점 출입구는 동네 초입 혹은 건물 입구이다. 이런 구조는 <마호로바>와 거의 흡사하다.

 

무대 중앙을 거실이라고 부르기 애매모호한 이유는 고시원에서 살아보면 알지만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공간 앞쪽 길게 늘어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좁은 무대 위에 뒤로 세운 쪽방이 4곳이 있고, 각 방은 각자 개성이 강한, 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도시빈민들의 삶이 묻어나오도록 꾸몄다. 1평 남짓 독립 구조는 발 뻗고 눕기에 마땅치 않지만 냉정하게 실제 고시원과 매우 흡사하다. 오히려 방마다 작은 창문이 있는 구조이고 보면,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열고 닫을 수 없는 실제 고시원 시설보다 나은 편이다.



 

무대 대부분을 거실로 할애한 이상 마호로바 축제를 맞이해 고향집을 찾은 3대의 이야기를 다룬 <마호로바>가 그러했듯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커다란 고택 일부를 옮긴 무대와 실제 고시원과 흡사한 무대의 차이는, 비유를 하자면 연우소극장 자체가 대학로 극장들 가운데 고시원(?)에 가깝다고 보면-비하의 의도는 조금도 없다-<여기가 집이다>는 소통이라는 전제 아래 벌어지는 이면이 색다른 층위에서 도드라진다. 즉 배우로 현실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극 후반부, 옆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는 1평 공간에서 양씨와 양씨처가 몰래 몸을 부대끼고 섞는 장면은 어느 연극과 비교해도 손에 꼽을 절절하고 처절한 소통이다. 결국 옆방에 들리든 말든 부부가 토해내는 신음은 어느 대화보다 응축되고 농밀하다. 야하다는 의미와 정반대의 눈물이 핑 도는 장면이다. 그들의 삶의 면면을 관객이 충분히 물든 후에 가능한 연출이지만, 새삼 장우재 연출의 실력과 배우들의 연기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양씨 부부의 안쓰러운 신음은 아이러니하게도 허름한 벽을 타고 고시원 전체에 물결을 치고, 신파가 절정에 달한다. 삶의 애잔함을 신파로 풀어내는 능력은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아버지>의 박근형 연출을 꼽을 수 있지만, 장우재 연출은 이날 밤 고시원에 불을 지르는 장씨의 꿈을 통해 가짜희망을 경계한다.

 

가짜 희망이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든 정당해야 연극은 간다. 실재를 알아야 환상도 여기 있음을 안다. 그것을 내가 가짜희망을 오늘도 놓지 않고 있는 분들에게 무릎 꿇고 배운다. - 연출의 말 중에서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장우재의 글에서, 그리고 <여기가 집이다>라는 제목을 중의적으로 해석해서 연우소극장과 관계를 대입해보면 갑자고시원은 곧 연극판의 축약도처럼 읽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말하는 ‘가짜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은 실제로 고시원에 있는 면면과 형편상 크게 다르지 않은 연극인들일 게다. 알기로 한국에서 연극을 하는 이들 대부분의 현실이나 미래는 고시원에서 날품을 파는 이들처럼 그리 밝지 않다.



 

극중에서 고시원을 집처럼 꾸미고, 고시원을 관리하는 일에 월급을 180만원씩 주는 고시원 주인 동규가 고등학생이라는 설정은 뜬금없지만 현실에서 절대 찾지 못할 인물이라는 점에서 역으로 현실로 다가온다. 그래서 동규를 외국에서 살다온 고등학생이자, 입양아이자, 형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복잡한 설정을 해도 별 무리가 없다. 밖에 나가지 않고 고시원을 집처럼 관리하면서 월급을 받아 살듯이 극장을 벗어나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극중 월급 180만원은 연극인들이 바라는 연극만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희망금액이 아닐까. 그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동규의 사정은 극 중에서도 한계가 뚜렷하고, 호부호형을 못했던 홍길동처럼 그 이름을 대학로가 아닌 동사무소 예시에서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 심사작, 공연예술창작발표공간지원작이다. 그나마 무대를 올리기 위해 최대한 이끌어낸 지원일 게다. 국가지원책은 결코 동규가 될 수 없다. 국가정상회의록 복사본도 만들어서 돌려야 하고, 암튼 이래저래 쓸 돈이 많다. 결국은 관객이 가짜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을 줄 수 있는 실현가능한 동규일텐데, 주저리주저리, 미안함에 말만 많다.*




사진출처 - 극단 이와삼, 연합뉴스 강일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