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구토] 몸부림에 이은 실체의 확인

구보씨 2010. 5. 26. 17:03

올해 무용가 김성한이 이끄는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가 <구토>(2010), <보이체크>(2012)에 이어 이른바, 실존주의 3부작이랄 수 있는 <이방인>을 현대무용으로 올렸습니다. 앞서 종종 얘기했듯 무용을 잘 모르는 장르입니다만, 어쩌다보니 세 편을 다 봤네요. 그 만큼 원작 제목이 귀에 익기도 하였고, 또 김성한이라는 이름을 귀동냥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세 작품을 묶어 소개했지만 <구토>는 이후 두 작품과 달리 다른 기획인 '인간탐구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하지만 인간탐구시리즈의 앞선 두 작품이 창작극이었고, <구토>로 다음 해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참가, 안무가상 수상 등 많은 찬사를 받은 후에 <보이체크>과 함께 레퍼토리 공연으로 묶이는 만큼 이런 분류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어서 나머지 작품 리뷰를 올리겠습니다. [2013.07.27]   




제목 : 세컨드네이처의 구토

기간 : 2010/05/26 ~ 2010/05/28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권혜란, 이정훈, 이주형, 조성국, 박혜미, 신영석, 정상현

원작 : 알베르 카뮈

대본 : 홍석환

안무 : 김성한

연출 : 오선명

주최 : 서울문화재단 /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컴퍼니

주관 : 코리아트 ENT



사르트르 서거 30년, 세컨드네이처(Second nature) 댄스컴퍼니가 그를 기리는 작품을 올렸다. 노벨문학상도 거부한 그가, 30주년 기념작이라는 부제가 붙은 <구토>를 좋아할까 싶기는 하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하는 말이다. 적어도 구토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구토를 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각성의 노력은 가히 인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구토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지하는 주체가 ‘자아’인 인상 어쩌면 같이 공유하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다.

 

로캉탱에게 처음 구토를 유발시킨 조약돌이 나에게도 구토를 유발시킬까. 어림없는 소리다. 받아들이는 주체가 구토의 덩어리가 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사물과의 대립이자 전쟁이지만 역설적으로 대립은 내가 실존한다는 근거이므로 구토를 거부할 수가 없다. 구토는 죽음 혹은 저어도 존재의 가사상태에 이르지 않으려는 자발적 인식이다.

 



재밌는 점은 사르트르의 <구토>가 원효대사의 일화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구토가 사물이나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생기는 생리작용이고 보면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밤중에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라는 걸 깨닫고는 구토를 하다가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라는 대오를 깨달은 원효대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원효대사의 일화를 꺼낸 이유는 실존의 깨달음이 종교로 나아가고, 사르트르를 통해 철학으로 발전했다면 무용을 통해서는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가. 세컨드네이처가 익히 사르트르의 <구토>를 원작이라 밝히고 있고, 서거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니 사르트르의 소설 속 궤적을 멀리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사각형 무대 위에서 펼치는 무대극을 볼 때마다 곧 책의 본질적인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가격을 치르고 객석(혹은 어디든)편하게 앉은(혹은 책을 든) 관객(독자)의 일방적인 선택과 흐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몇몇 무대극들(책들)은 역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휘청거리도록 몰아붙인다. <구토>라면 그로기 상태를 더욱 몰아쳐서 구토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




세컨드네이처의 <구토>가 구토를 유발하는 지점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책에서 말하는 존재 혹은 실체란 추상 명사이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이 말들은 오로지 동질감을 형성할 때만 가능한데, 분명 실재하지만 남들과 똑같이 공유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러다보니 그 증상으로 구토를 유발한다. 구토를 하는데, 구토를 유발하는 정체가 뱃속에 있지 않으니 밖으로 나오는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원효대사의 마음에 달린 문제가 그렇듯이, 조약돌이든 빵이든 다르지 않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무용수들과 바닥에 붙어 흐느적거리는 무용수들은 그 사이 무대에 서 있는 로캉탱을 둘러싼 세계이다. (그들을 천장 혹은 날아가는 새라고 부르거나 마루 혹은 뛰어가는 개라고 불러도 된다.) 같은 관점에서 로캉탱 역할을 맡은 무용수 앞을 가득 채운 관객들 역시 벽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로캉탱의 실존에 관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단, 역으로 보아 관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용수들의 흐느적거리거나 미끈거리는 움직임은 구토를 유발하는 현실을 눈으로 볼 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끈적이면서 달라붙는 현실을 틈입을 거부하듯이 로캉탱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역으로 방독면이 의미하는 단절은 터져 나오는 구토를 막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팬티만 걸친 벌거벗은 몸(극중 현실로는 알몸인)에 휘감아 돌면서 거부할 수 없는 감각으로 포착하는 무의미한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

 

감각은 의지로 막을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서 있는 로캉탱은 모든 무용수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실존의 무게를 절절하게 깨닫는다. 다시 말해 가상의 도시 부빌의 무게이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상의 무게이다.

 

방독면을 벗은 로캉탱은 실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가 앉아 있는 빨간색 소파는 우리가 소파라고 부르고 부리기 전, 한 꺼풀 벗겨낸 실체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가구’라는 부여 가치에 제약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실체를 깨달은 로캉탱 앞에서 더 이상 소파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처럼 무대 위를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



 

로캉탱은 이제 극장 뒷배경, 꾸미기 전의 틀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대 뒤 2층 통로에 서 있다. 단순히 극장 활용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한 꺼풀 벗겨난 실체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불성실한 무대 연출은 절대 아니다. 더욱이 관객들에게 무대의 한계점, 그러니까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벽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통로를 오가는 그의 모습은 쳇바퀴를 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벽에 몸을 기대거나 부딪치거나 울부짖거나 의미 없는 말을 내뱉는 행위는 그가 무의미한 실체와 맞닥트렸을 때 보이는 구토 증세이다. 그러니까 부조리한 방식을 대항하는 방식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나 대응은 무의미한 것이다.



 

김성한의 <구토>를 사르트르의 <구토>로서 완성도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보고 좀 더 체감하면 뭔가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묵음으로 오랫동안 단절과 적절하게 섞인 음향 효과나 조명의 다채로운 활용은 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한편으로 비슷한 방식의 음향, 조명, 무대는 추상적인 현대무용에서 종종 봐왔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주제와 제대로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어쩌면 현대무용이란 몸짓을 통해 실존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몸으로 표현하는 현대무용이야말로 작용과 반작용이 가장 풍성하게 드러나는 장르이다.)

 

마지막 장에서 로캉탱이 분무기로 표현하는 ‘세상의 빛에 부딪치며 부서지는 물입자들의 향연’은 그 역시 추상성을 띤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설 속 로캉탱의 글쓰기처럼, 혹은 극중 강렬하게 들리는 계속 뛰어야 하는 심장 고동소리처럼, 실존을 인지하기 위해 내내 이어져야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동의하지만 다소 소박하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사진출처 -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