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스테스] 드라마 원류에 대한 재연 혹은 재현
제목 : 오레스테스 - 2013 게릴라극장 해외극 페스티벌 희랍극1
기간 : 2013/06/06 ~ 2013/06/30
장소 : 대학로 게릴라극장
출연 : 클레테메스트라 역 - 김소희, 코러스 장 역 - 김미숙, 이승헌, 카산드라 역 - 배보람, 오레스테스 역 - 이재현, 1부 코러스 역 - 김철영, 전령 역 - 홍민수, 2·3부 코러스 역 - 손청강, 서민우, 2부 코러스·악사 역 - 김아라나, 엘렉트라 역 - 김아영, 문지기·아폴론 역 - 임현준, 아이기스토스 역 - 황설하, 유모 역 - 이성숙, 3부 코러스 역 -김사이
원작 : 아이스퀼로스
번역 : 김창화
대본 : 이윤택
협력연출 : 김미숙, 김소희, 이승헌
제작 : 연희단거리패
주최 : 게릴라 극장
연희단거리패의 진지함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하하. 재밌는 시도인데?” “설마 진심인거야?”“……”시도 혹은 실험 정도인가 보다 생각하다가 배우들의 몰입도를 보면 진심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바, 더불어 진지한 심정으로 연극을 보고 만다. 희랍극 <오레스테스 3부작>을 보면 배우들이 80석 남짓 게릴라극장을 마치 6만 명 관객을 수용했다는 그리스 에베소극장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게다. 이 작품은 1부 90분, 2부와 3부 90분으로 총 180분에 달하는 작품이다. 1부와 2~3부를 각각 다른 날짜에 나눠 올리기도 하고, 같은 날 연속 공연으로 올리기도 하였다. 이 정도로 긴 러닝타임은 소극장 공연치고는 드문 경우이다.
1부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세기)가 쓸 당시로부터 흐른 아득한 세월만큼 그 거리감을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은 극장에서 원형 3부작을 요약하지 않고 올리겠다고 하니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2004)로 흔히 기억하는 10년 전쟁을 이기고 그리스로 돌아온 아가멤논으로부터 시작되는 치정과 피로 얼룩진 가족파탄사이나, 단순 치정극이 아닌 신탁에서 비롯한 인간의 유한함 혹은 신과 인간 사이 역사의 수레바퀴의 일부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면 커다란 무대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인물 군상과 웅장한 코러스의 역할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약한 무대만큼 1부 등장인물은 단출하다. 문지기 1명이 극을 열고, 코러스 둘이 극을 관객에게 설명하면서 왕비와 호흡을 맞춘다. 사건의 중심 클레테메스트라가 자신의 감정선을 폭발해 작품을 극적으로 끌고 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데, 무대와 객석 구분이 없다고 할 만큼 맞닿은 게릴라극장 특성에 따라 배우의 감정선이 충실하게 전달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노련하지 못한 배우에게는 1m앞에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관객들이 눈에 보이니 고역일 테지만 그만큼 훈련이 되는 셈이다.
훈련 단계를 넘은 배우들에게는 되레 쉬이 객석을 압도할 수 있으니 장점이다. 달랑 코러스 둘에 그리스 원형 극장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소극장이라니, 코미디나 풍자로 가능할 성 싶은 설정이다. 김소희의 연기는 개선해 돌아온 왕을 죽일 수밖에 없는 악녀이자 난폭한 폭군으로 치정극이 아닌 접신을 한 듯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다. 다만, 칭찬만 했던 그녀의 연기를 보면 몇몇 특징이 모든 배역의 김소희 화(化)로 귀착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때로 보는 입장에서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과잉의 연속은 자극을 무디게 하는 법이나, 요사이 말로 진격의 연희단거리패가 그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고, 또 멈추지 않길 바란다. 그들의 연기 혼이 근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왕비 클레테메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이 전쟁 출항을 하기 위해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딸 이휘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제사를 들어 타살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여자로 10년 동안 외로움을 참기 힘들었고, 또 남편이 많은 여성을 거느린 사실을 들어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권리를 주장한다. 탕녀가 아닌 권력을 두고 솔직한 야망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크레테메스트라의 주장에 힘을 싣는 연출은 큰 배역을 보기 힘든 카산드라의 등장과 독무, 독백에 있다. 아가멤논은 판초우의를 입은 초라한 늙은 군인으로, 마차를 끌고 온 늙은 당나귀쯤으로 그린 반면에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끌고 온 카산드라는 마차 위에서 도도하게 왕비를 노려보며 등장한다. 그리스극에서 종종 활용한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를 차용한 게 아닌가 싶다. 게릴라극장의 구조상 좁은 통로를 무리하다 싶게 활용한 장치는 객석을 넘나드는 코러스와 함께 나름 당시 극장 연출을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카산드라가 당시 방식처럼 신, 혹은 신의 역할을 하는가? 화려한 중동 무희의 복장을 입고 등장한 데 비해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 그녀의 죽음은 아가멤논의 죽음이 그렇듯 무대 뒤편으로 설정한 스케네 무대의 천으로 만든 막 뒤에서 벌어지면서 간접적으로만 그려진다. 의상 등 무채색으로 꾸민 작품에서 유독 눈에 띄는 빨간색의 도발적인 복장이고 보면 다소 싱거운 등퇴장일 수 있다. 그러나 신탁 외에 왕비가 벌인 살해를 질투, 혹은 동등한 타당함으로 본다면 아가멤논이 아닌 카산드라가 대척점으로 놓인 상황이 이해가 간다.
2부와 3부
하루 지나 극장을 찾았으나, 2부와 3부 무대 한 쪽에 마차가 그대로 있다. 이 작품은 이후 하루 3부작으로 연속으로 공연할 계획이고, 공연 시작에 앞서 2부 코러스 장 김미숙 배우가 친절히 설명한다. 2부와 3부는 1부와 성격을 달리한다. 첫 장면을 보면 아가멤논의 무덤 앞으로 무당들이 굿을 준비하고 있다. ‘제주 칠머리 당굿 사설조’로 한국 토속 문화를 접목한 대목은 익히 연희단거리패의 장기이기는 하나, 1 부와 연결하여 보면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다만 작품 전체를 김소희, 김미숙, 이승헌이 공동연출로 나섰다고 밝히고 있다. 전통 관련해 소리 부문을 김미숙 배우가 도맡았고, 작품 중심을 주요인물 외에 코러스에 방점을 찍고 작품을 이끄는 이상 그녀 특유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번 작품이 우리극연구소 20주년 기념 공연이라고 밝히는 바, 연구소 출신들이 오랫동안 배우이자 연출로 또 극장장이나 배우장으로, 연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이합집산하는 모습 역시 연희단거리패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20주년 기념작인 만큼 5기에서 20기까지 선후배들이 꾸리는 무대는 이끌고 따라가는 끈끈한 선례를 관객에게 시연하는 한편, 올해 새롭게 참여한 20기인 경우, 선배들에 비해 연기력이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한 작품 안에서 선배들 내공에 맞추려니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막 1년이 안 된 배우들이라고 보면 꽤 좋은 연기를 펼친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김아라나 배우나 손청강(18기) 배우 등 2~3년 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익히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비장미가 넘치는 1부에 비해, 2부와 3부는 해학이 넘치는 구성이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라는 일관성으로 보면 다소 여유로운 구성이다. 마당극 형식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지옥에서 클레테메스트라가 불러들인 잡신(버려진 황야의 여신)들과 아폴로 사이 오가는 대화도 그렇고, 나름 진지한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 외에는 일관성이 다소 없어 보인다.
일관성이 없다는 표현보다는 신이 보는 인간들 복수극이란 유희 정도라고 해석했다고 보이기도 한다. 재해석의 여지를 줄이고 원작에 충실한 편인만큼 마지막 장면은 다르지 않지만, 다 같이 무가(노래)를 부르며 하나로 화합하는 장면은 역시 한국적이라고 할 만하다.
연출, 대본, 배우, 제작, 홍보, 극장 등을 한 극단 내부에서 담당하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춘 극단으로는 연희단거리패가 거의 유일한 편이다(극단 차이무가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작품을 보기 전에 당최 분업이 아니고 보면, 요즘 기준으로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극단시스템 중심에는 특유의 광기랄지, 신들림이 있을 것이고, 희랍극 시리즈 오레스테스 3부작은 그 확장성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전망했었다. 작품 이전에 극단(연희단거리패, 우리극연구소 등) 역사와 배우들 사이 관계망을 이해하고 보면 좀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출처 - 연희단거리패http://cafe.daum.net/theaterguerr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