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뷰티퀸]아일랜드식 접사렌즈로 바라보는

구보씨 2010. 1. 16. 13:01

미처 마무리를 짓지 못했던 리뷰인데요.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다보니 나머지 부분을 다시 채우기가 불가능하여 그냥 두고 말았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연극을 보고 드는 생각이 참 많았더랬습니다.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몰라 막막했다가 인물별로 탐구하듯이 썼는데요. 모녀만 소개하고선 내공이 부족하여 멈추고 말았네요. 모린이 언니들처럼 집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남자주인공 격인 파토가 제시하는데 말이죠. 


박근형이 연출하고, 최민식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연극 <필로우맨>(2007) 작가 마틴 맥도나가 25살에 쓴 글이라니 놀랍기만 합니다. 연극을 볼 당시 어쩌면 저리도 리얼할까, 소름이 오싹 돋았더랬습니다. (남자인데도 말이죠.) 김선영 배우의 연기는 얘기로 듣다가 당시 처음 봤는데요. 역시 좋은 배우였습니다. 물론 홍경연 배우를 비롯해 다른 배우들도 밀도가 대단했구요.


민간극장 가운데 창작 연극을 고르고 지원하는 안목이 뛰어난  '두산아트센터 Space111' 프로그램을 아마 이때부터 주목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리모델링을 하기전 마름모꼴 극장에서도 좋은 작품을 봤습니다만, 이후 '소극장은 넓다' 시리즈를 비롯해 좋은 작품이 많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구요. [2013.01.31]

 

장르 : 연극

일시 : 2010년 1월 16일~2월 28일

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원작 : 마틴 맥도나

연출 : 이현경

출연 : 홍경연, 김선영, 신안진, 김준원

기획 : (주)뮤지컬해븐, 두산아트센터

제작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C바이러스



아일랜드 연극, 아일랜드 정서

2008년 10월, 아일랜드 희곡작가 코너 맥퍼슨의 연극 <뱃사람 The Seafarer>(http://blog.yes24.com/document/3616023)을 관람했다. 비바람 몰아치는 아일랜드 더블린 북쪽 바닷가 언덕 위에 낡은 집이 한 채, 거실 바닥에는 술병과 빈 맥주 캔이 뒹굴고 집안 가득 낡고 너저분한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버티는 50대 별 볼일 없는 중늙은이들의 이야기다.

 

비록 한국에서 한국 배우들이 펼치는 무대지만 아일랜드 정서라는 게 뭔지 좀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 작품에 모이기 힘든 노련한 남자 배우 다섯에 연출도 믿을 만했다. 작품에 만족하지만 기대가 좀 컸는지 대체로 차분하고 심심했다. 찌든 술 냄새 사이로 바다 비린내와 늙은 수컷들의 노린내가 훅 끼치는 강렬한 무대를 원했던 듯 싶다.

 


 

연극 <필로우맨>으로 알려진 아일랜드 여성 작가 마틴 맥도나의 처녀작 <뷰티퀸>을 봤다. <뱃사람>이 형제를 그 중심에 뒀다면 이 작품은 모녀가 있다.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루저들의 서열은 거실 흔들의자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에 있다. 아일랜드 리넨의 황량하고 외딴 농가, 관객이 등장하기 전부터 좁은 거실 흔들의자에 괴팍한 노모 매그가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다.

 

중극장 무대를 사용한 <뱃사람>과 다르게, 객석 바로 앞에서 소극장 좁은 거실은 구질구질한 일상이 도드라진다. 배경, 상황이 <뱃사람>의 다른 버전처럼 보이지만 더 음산하다. <뱃사람>에서 술병이 나뒹구는 거실 풍경은 한바탕 휩쓸고 간 뒤 잠시 고요랄지 쉴 틈을 엿보인다면, 늙은 노모가 지키고 있는 거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계심을 잃지 않고 틈입을 허용하지 않을 기세다.

 


 

매그, 거울을 보듯이

모린이 장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한때 이 마을의 ‘뷰티퀸’이었으나, 현실은 마흔 살 노처녀로 닭똥이나 치우면서 홀로 노모 뒷바라지를 하는 신세이다. 모린은 위로 언니 둘이 있지만,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사는 언니들은 엄마 생일에도 잘 찾아오지 않는다.

 

매그는 모린이 들어오자마자 분유 덩어리가 물에 풀어지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방광염을 앓아 몸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무관심한 딸을 향한 정신적 가학은 안타깝게도 딸을 향한 애정 표현이자 갈구이기도 하다. 이들의 관계를 극으로 몰아가는 건 실제로 현실에서 그렇듯 소소한 생채기들이다.

 

 

 

딸들이 매그와 관계가 소원한 원인도 비뚤어진 접근 방식, 매그의 성격 탓이다. 매그는 막내 딸 모린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병적으로 집착한다. 절대 자신을 떠날 핑계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다른 두 딸은 시집을 가면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는가. 남자는 매그에게 최대 적수이다.

 

"이거 다 마시고 덩어리를 쪽쪽 빨아서 목구멍으로 넘겨요. 그래도 남은 게 있으면 엄마 머리 위에 다 부어버릴 테니까." 모린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다. 엄마가 부러 싫어하는 쿠키를 사오거나 음식은 억지로라도 다 먹인다. 모린은 수발을 들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엄마의 약점인 육체적 가학으로 복수한다. 안타깝게도 매그는 이런 딸의 모습을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매그의 피가학은 딸을 거울처럼 받아들여 ‘자기화’시키려는 욕망이다.

 

“난 절대 안 죽어. 일흔 살이 돼서야 내 장례식을 치르게 될 걸. 그때 애프터 쉐이브 냄새를 풍기며 네 허리에 팔을 두를 남자 몇이나 있겠니?” 딸을 향해 퍼붓는 지독한 저주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남자는커녕 딸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일흔의 괴팍한 노파.

 


 

모린, 뷰티퀸

<뷰티퀸>은 동화 백설 공주의 왕비 버전이다. 왕비가 보는 거울은 요술 거울이 아니라 왕비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접사렌즈일 뿐이다. 정신착란이라 부르든 마녀라고 헐뜯든 그녀가 원한 백설 공주의 심장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젊은 피, 즉 젊음의 상징이다. 거울을 깨지 않은 한, 그녀 주변의 어린 여자들은 남아나지 않을 뻔 했다.

 

언니들은 백설공주처럼 용케 도망쳤지만 모린은 거울 안에 속박당한 채로 고스란히 늙고 있다. 이 작품은 매그의 ‘거울보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모린의 ‘거울 깨기’이다. 매그의 보이지 않는 거미줄은 더욱 칭칭 감고 들어오고 한때 ‘뷰티퀸’으로 화려함을 자랑했던 모린 날개는 점차 색이 바랜다. 동화와 다르게 곧 마녀가 한 명 더 생길 뿐, 백설공주 같은 ‘뷰티퀸’의 존재는 사라질 운명이다. 잠을 깨우는 왕자 역할은 20년 전, 뷰티퀸을 기억하는 파토다. 모린에게서 그 모습을 일깨우면서 거울에 금을 내기 시작한다. 

================================================================

 



사진출처 -  노네임씨어터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