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 샘에 고인 말] 누가 들어도 좋은 말

구보씨 2009. 12. 3. 16:50

이 당시만 해도 김동현 연출, 염혜란 배우, 한현주 작가를 어설피 알 때였지요. 연극에 관심있는 분들은 동감하실텐데요, 이후로 이분들이 각자 영역에서 펼치는 솜씨에 두루 감탄을 하곤 합니다. 염혜란 배우는 제가 연출, 작가, 극단을 보지 않고 배우에 방점을 두고 작품을 고르는 몇 안 되는 배우입니다. 이연규 배우 등 다른 배우들도 물론 기억에 오래 남는 배우들이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구요.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서미영 배우는 앳된 연기 못지 않게 나이에 걸맞도록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예종 사제지간인 김동현, 한현주 조합은 앞으로도 쭈욱 지속될 듯 합니다.



故 김동현 연출( ~2016.02.24) 


글 안에서도 썼지만 '완성도가 높은 연극의 예'로 꼽으라면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재밌다거나 깊이가 있다거나 하는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고루 짜임새가 좋은 작품이랄까요. 샘에 정령이 있다는 설정이 자칫 유치할 수가 있는데요. 튀지 않고  작품 전체가 가진 변방에 대한 기억 혹은 아쉬움을 두고 차분하게 잘 이끌어갑니다. 어쩌면 '무난하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좋은 글이란 가장 쉽게 쓰는 글이라는 정의에서 보면 전 이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기억에 비해 리뷰는 짧기도 하고 듬성듬성 구멍이 많습니다.)  


암전 상태에서 손전등 두 개로 달려오는 차를 표현한 장면이 있는데요. 최첨단 3D 기술 시현이라도 보는 듯 감탄을 했습니다. 단순히 무대의 제악이 아닌 소박한 무대극 전체와 맞물린 연출이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관객인 저에게 녹아들어서 어릴 적 놀이에서 차용한 조명을 두고 마음을 빼았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론가 평점을 보니 점수가 높지는 않은데요. 글쎄요, 아무튼 누구에게나 연극을 볼 때 기준을 잡아주는 이런 작품이 한 편 정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3.01.21]


제목 : 그 샘에 고인 말

기간 : 2009/12/03 ~ 2009/12/16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출연 : 이연규, 배수현, 천정하, 염혜란, 이미지, 전가람, 서미영

희곡 : 한현주

드라마터그 : 정영훈

연출 : 김동현

제작 : 극단 코끼리만보


 

가끔 기대 이상으로 가슴이 넉넉하게 채워주는 작품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전 정보가 적은 연극에서 그런 작품을 만날 때면 숨은 보석이라도 찾은 양 기분이 한껏 올라간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실망을 할 때도 많다 보니 뭐랄까, 숨은 보석을 찾는 과정이라는 말이 얼추 들어맞는다. 아무래도 창작 초연이면 우선 꼼꼼히 작가와 연출과 극단을 살펴보게 된다.

 

젊은 희곡 작가 한현주에 김동현 연출이라, 이들과는 연극 <착한 사람 조양규>로 2008년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사람, 조양규]  http://blog.daum.net/gruru/25 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작품에 대한 느낌이 참 좋았기도 하여, <그 샘에 고인 말>은몇 가지 이유로 봐야하는 이유가 충분한 공연임에 분명했다.

 

7명의 배우 중 2명은 샘의 정령이니, 현실적인 무대를 적은 수의 배우들로 어떻게 채울까 싶었는데 역시 배우들의 역량이 뛰어나면 흐릿한 캐릭터 여럿 몫을 단단히 한다는 걸 깨달았다. 좌우 폭이 넓은 편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는 재개발을 앞둔 퇴락한 동네의 분위기를 잘 담아냈다. 담벼락의 흐릿한 낙서와 그 위 깨진 병으로 이어붙인 예스러운 방범 장치(?)까지 꽤나 세심하게 표현했다.



 

극단 코끼리만보의 젊은 배우들도 역량이 뛰어나지만, 연배가 넘치는 중년 배우들의 연기는 연기를 잘 모르더라도, “참 잘하는구나”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그중 쇠락한 주변부를 다룬 진중한 주제를 두고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조연 역할을 제대로 하는 염혜란의 연기는 참으로 탁월하다. 자연스러운 웃음을 끌어내는 역량이란 억지나 과장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역할에 몰입해서 연기를 했을 때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극 내용이 시의적절한가, 혹은 서사만 놓고 볼 때 부족한 점은 없는가, 이런저런 논의를 떠나서 배우와 무대와 조명과 작가와 연출이 제대로 어울렸을 때, ‘연극적 완성도‘가 높다는 말을 한다면, 내 경험으로는 바로 이 작품이다. 전에는 그 의미를 막연하게 느끼는 정도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고른 기량이 빚은 앙상블이 무엇인지 좋은 예를 통해 보여준다. 요 사이 대학로에서 몸을 앞세운 자극적인 작품들이 꽤 많이 선을 보인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 4명의 극중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는 작품인데도, 남녀노소 누가 보더라도 지루하지 않고 따뜻하면서도 박수를 받을만한 좋은 작품이다.*

 

사진출처 - 극단 코끼리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