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버The Lover] 티타임의 정사와 情夫 사이
제목 : 러버The Lover_연극열전4 세 번째 작품
기간 : 2012/06/28 ~ 2012/08/13
장소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출연 : 송영창, 이승비, 김호진
희곡 : 해롤드 핀터
연출 : 오경택
제작 : (주)연극열전
성인물
청소년관람불가 성인극,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6월 28일부터 8월 13일까지 막을 올리는 <러버The Lover>의 특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여배우 노출 등 가십난에 종종 오르는 <여교수와 제자>가 떠오른다. 에로비디오만 성인 영화가 아니듯 연극도 마찬가지지만 성인 전용 작품이 원체 드물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 기획력을 갖춘 공연기획사가, 남녀 배우 2명이 극을 이끄는, 성을 주제로 다룬 번안극으로 젊은 연출가가 올린 연극이라는 점에서 보면 <러버>는 오디뮤지컬컴퍼니의 <블루룸THE BLUE ROOM>(2011.10.29.~12.11,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과 닮았다.
<블루룸>은 미국 공연 당시 니콜 키드먼, 이아인 글렌 출연,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샘 멘더스 연출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국내 초연으로 영화배우 김태우, 송선미 캐스팅으로 막이 오르기 전부터 관심을 모았지만 기대만큼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인극 관객층이 두텁지 않은 현실에서 <블루룸>에 대한 관객의 냉정한 평가나 우려 섞인 시선이 <러버>로도 이어지기 쉽다.
다만 조심스럽게 짐작해보면 <러버>에 출연하는 송영창, 이승비도 영화배우로 먼저 알려졌지만 연극 무대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배우들이고, 연극열전이 기획 자체로 흥행성을 갖춘 연극전문 기획사라는 점에서 안정감 있는 무대를 기대할 만하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를 올린 오디뮤지컬컴퍼니 역시 <이> 등 연극 작품으로도 수작을 올린 바 있다. 역으로 보면 연극열전 역시 연극열전3에서 <트라이앵글>(2010)을 올리면서 “연극열전 최초의 뮤지컬”이라고 내세웠지만, 다른 소극장 뮤지컬과 큰 변별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연극열전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2010)에서 배종옥과 함께 블랑쉬 뒤보아 역을 멋지게 소화한 이승비는 단독 주연으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러버>는 연극열전3 ‘클래식 명작' 기획을 이어받는 작품으로 연극열전에 연이어 캐스팅되면서 새로운 히로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그녀가 유학을 병행하면서 국내 출연작이 많지 않은 편이라, 팬들이 <러버>에 거는 기대가 높은 편이다.
연극열전
스타캐스팅은 연극열전1,2의 흥행요인이자 꾸준하게 이어지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영화계 불황이 겹치면서 연애매니지먼트 회사가 참여해 스타마케팅 시스템을 극대화시킨 연극 기획 ‘무대가 좋다’에 연극열전3이 고전을 겪으면서 연극열전은 변화를 선언했다. 올해 시즌4에서 ‘대학로 소극장 중심이던 체제에서 벗어나 인지도와 신뢰도를 갖춘 국공립 극장 혹은 400~600석 규모의 중 극장’ 공연은 중극장 제작 시스템이 주류를 이루는 연극 현실에 발을 맞춘 기획으로 볼 수 있다. 소극장과 중극장 공연 연출은 검증 받은 중견 연출가 섭외가 선결조건이다. 김광보 연출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연극열전4 <M버터플라이>가 끝나자마자 20일 차이를 두고 같은 극장에서 신시컴퍼니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를 올리는 사례로도 알 수 있다.
연극열전4 상반기 레퍼토리 세 작품을 맡은 연출가들을 비교하면 ‘연극무대로 귀환’을 알린 장진(리턴 투 햄릿)이나 앞서 언급한 김광보(M버터플라이)와 비교하면 오경택(러버)은 경력이 적고 인지도가 낮은 젊은 연출가이다. 게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롤드 핀터의 작품이자 연극열전 최초 성인극이고 보면 연출로 오경택은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갈매기(2011). 세로로 길게 펼친 무대
허나 한편으로 <러버>가 기대를 모으는 이유로 오경택을 꼽기도 한다. <세자매>(2009), <갈매기>(2011)를 통해 자칫 원작 무게에 눌리기 쉬워 ‘누구나 올릴 수 있지만 아무나 올릴 수 없는’ 체홉 작품을 중견 연출가들과 다른 새로운 해석과 신선한 감각을 더했으면서도 원작의 고유함을 유지하는 안정된 무대를 보여줬다. 1974년 <티타임의 정사>로 극단 실험극장 초연 이후 김철리, 기국서 등 연출가들의 손에 2005년까지 꾸준하게 무대에 오른 작품을 제목을 원작 그대로 쓰는 데에는 분명 기존 해석과 다른 차별화를 선택했다고 본다. 오경택 연출 발탁은 잘 어울리는 카드이다.
중극장 무대와 많은 배역으로 분주한 체홉 작품이 아닌 <러버>처럼 집중력을 요구하는 소극장 공연 연출은 어떨까. 2010 '봄작가, 겨울무대' <상자 속 흡혈귀>를 떠올려보면, 신인 희곡작가 발굴 기획이고, 적은 예산과 짧은 제작 기간 등 제약이 많은 소품임을 감안하더라도 인상에 남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1년 뒤 2인극 <레드>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았다.
오경택과 더불어 제작 스텝이 드물게 언론의 주목을 받는 무대미술가 정승호의 무대를 눈여겨봐야 한다. <됴화만발>에서 세로로 2단 무대를 쌓아 올려 무대를 들어 올리고 내리면서 좁은 무대 위에 영화에 버금가는 액션 활극을 가능케 했다. 작년 11월, <갈매기>는 정승호가 오경택 그리고 홍보마케팅을 맡은 연극열전이 처음 만난 작품이다. 세로로 무대를 쌓은 형태가 <됴화만발>과 비슷했으나 1층 객석을 무대로 확장한 깊이 27m 무대는 ‘갈매기는 비극이 아닌 희극’이라고 해석한 오경택 연출의 의도대로 배우들이 맘껏 활개 칠 공간을 제공하는 아득한 깊이가 절망에 이른 뜨레플레프의 심경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그는 <러버>에서도 사각의 회전 무대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은 앞서 올라간 MJ컴퍼니의 <햄릿>에서 보듯 무대 2층 높이로 올려 객석 계단과 이어 붙인 가파른 계단 세트처럼 다양한 무대 변환이 가능한 가변무대이다. 그래서 정승호의 무대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티타임의 정사 혹은 고도를 기다리며
남자 애인을 의미하는 원제를 풀이한 <정부(情夫)>를 두고 74년 초연 당시 <티타임의 정사>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영국의 격식 있는 사교모임 대신 벌이는 불륜극이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고, 귀족부인들이 은식기와 도자기와 세팅 기술을 자랑하기 위한 허례로 변질된 티타임에 빗대 평범한 중산층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 뒤에 숨겨진 이중생활을 부각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외딴 시골집에서 사라가 몸에 꼭 끼는 깊게 파진 옷을 입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과정은 티타임의 세팅 과정과 묘하게 맞물린다. 일상에서 벗어난 색다른 섹스는 현실과 상상이 혼재하면서 맞물린다.
핀터레스크(Pinteresque, 핀터 특유의 모호한 어법이 가미된 스타일을 통칭하는 신조어)라 불릴 만큼 특유의 분위기를 유발하는 핀터는 사무엘 베케트와 더불어 부조리극의 대가로 불린다. 둘 사이 억지로 관계를 이어붙일 필요는 없지만 <러버>를 보면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부부 버전인양,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먼저 출간되었고, 또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남편 리처드가 가상의 정부 맥스가 되어 찾아오는 오후 3시에 방문한 우유배달부의 존재와 그가 늘어놓는 45초의 모호한 얘기는 <고도>에 등장하는 소년은 등장 시점, 인물, 역할 면에서 유사하다.
고도의 얘기를 전하는 소년의 말은 고도가 실제인 듯 고고와 디디로 하여금 더 혼란을 유발하고, <러버>의 우유배달부는 사라가 창가에서 맥스를 위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올리는 신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낸다(고 본다). 리처드는 사라를 정부(情婦)가 아닌 창녀라고 부른다. 고독하고 허무한 삶의 연속인 부부 사이에는 가상의 상대를 설정한 놀이만 있을 뿐이다. 부부 사이 소통이 없고 티타임을 넘어서 저녁 이후에도 관계가 이어지지만, 부부 사이 관계 회복을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여전히 리처드에게 사라는 “아름다운 창녀”이다.
2인극이나 다름없는 작품에서 우유배달부의 존재는 <고도>의 소년이 오지 않는 고도를 실제라고 상징하듯이 가상의 놀이로도 극복이 되지 않는 부부 관계에서 정부 역할을 할 준비가 된 인물이다(라고 본다). 그는 부부가 짠 가상의 무대에 틈입하는 유일한 타인이자 동시에 상상이 아닌 실재하는 인물이고, 실제 이웃에서 벌어지는 불륜의 당사자일 수도 있다. 티타임을 지나 현실로 넘나들기 시작한 정사마저도 그리 행복하거나 오래갈 듯 보이지는 않는다. <창녀>가 아닌 <정부>라는 제목은 사라가 마침내 실재하는 누군가를 정부로 기다릴 테고 불러들이게 될 상황을 시사한다. 티타임(휴식)이 없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에서 <러버>는 <티타임의 정사>보다 어울리는 제목이다.*
사진출처 - (주)연극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