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살고 싶다, 그림처럼, 시처럼] 80년 5월, 부산 골목시장 풍경극

구보씨 2012. 2. 16. 16:00

제목 : 살고 싶다, 그림처럼, 시처럼(부제 : 술과 쌍년)

기간 : 2012.02.16.~02.26

장소 : 게릴라극장

출연 : 김륜호, 최태익, 김미미, 이유경, 정원혁, 하치성, 강동석, 김응모, 유손희, 김인하, 윤현덕, 이다혜, 오유진

작/연출 : 양지웅

제작 : 미지 씨어터

  


연극 <살고 싶다, 그림처럼, 시처럼> 앞에 붙은 ‘2012 게릴라극장 젊은 연출가전’이라는 수식어만으로도 기대는 충분하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와 <부산가마골소극장>과 연계하여 변방의 지역 극단의 젊은 연극인들을 소개하고 발표 할 수 있는 장’이라는 의미에서도 뜻 깊은 기획이다. 젊은 연출가와 배우들로 짜인 극단 ‘미지씨어터’가 서울에서는 낯선 터라, 게릴라극장 기획전이 아니었다면 좀처럼 주목을 받기 힘들었으리라 본다.

 

다만, 이전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양날의 검처럼 같은 기획 타이틀을 달았다고 해도 게릴라극장의 자체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극단 연희단거리패 자체 제작 및 기획 공연에 비해 극단 드라마팩토리의 <존 레논을 위하여> 등 지역 극단 작품들은 완성도 면에서 비교적 다소 아쉬움이 들었다. 연희단거리패 공연이 워낙 강렬하고 개성이 강한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같은 이유로 게릴라극장에서 올라가는 공연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까닭이기도 하다.



 

<살고 싶다, 그림처럼, 시처럼>는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작품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고, 연관성이 없는 다소 추상적인 제목처럼 전체 짜임새가 다소 헐거운 편이다. 정돈되지 않고, 분주한 인상을 받았다면, 극중 다양한 인물 군상이 보여주는 소소한 에피소드 사이 연결 고리가 느슨하다는 데에 있지 않다. 다큐 형식을 차용한 풍경극이라고 정의를 내린 이상, 그 의도에 잘 맞았는지 여부를 물으면 그만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시장 사연을 모으고 다시 추리는 과정에서 좀 더 냉정하게 정리할 부분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제 살을 도려내듯이 아깝겠지만,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다소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면 고민해볼 부분이다.)

 

‘정치 압제와 가난에 시달리는 시절이나 인정 많고 따뜻한 풍경들로 가득한 1980년 5월, 부산 어디쯤 길 끝 시장’ 풍경은 극중 국밥집 여주인 사연 등 5.18광주민주화항쟁과 맞물리는 몇 가지 정황을 집어넣지만, 정치적인 판단이나 개입을 자제하면서 인물 군상에 초점을 맞춘다. (정치적인 암울한 시기를 설명하는 정도 그친 데에는 작품이 중심을 잡는데 미덕이라고 본다. 하지만 관련해서 다루는 계엄령 관련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좀 더 세밀할 필요가 있다.)




시절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소품, 작은 극장을 시장 골목 풍경으로 영리하게 활용하는 무대나 개성이 뚜렷한 인물 배치, 극 마지막 합창, 군무 등은 뮤지컬 <빨래>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정도 <빨래>가 주는 따뜻한 사람 냄새 나는 작품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다만 극의 중심을 잡고 가는 주인공 격인 시인 지망생이 보여준 초반부 깊은 절망은 이유를 알 수 없고, 외팔이 상인은 가벼움과 진중함 사이 캐릭터가 모호하며, 극중 희화화에 집중한 상인의 겁탈 장면은 불필요해 보인다.

 

극 도입부 30년이 흐른 2012년 현재, 지하철에서 우발적인 살해를 당하는 한 중년 여성의 과거 회상으로 넘어가는 원인 역시 짐작하기 어렵다.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르는 남자는 그녀가 처음 만난 주인공의 모습과 겹치기도 하지만 부러 짐작하자면 인간 관계가 파편화된 삭막한 공간으로, 요사이 ‘~녀’ ‘~남’처럼 구경거리가 된 지하철을 보여주려는 의도인가 싶다.

 

암울한 시절, 그때를 향한 무한정 그리움만은 아닐 것이나, 용케 견디어낸 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박해진 세상에서 허무한 죽음과 대비 효과를 낸다. 정성껏 꾸민 세트, 젊은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 등 발전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다. 부산 가마골소극장 초연작인데, 게릴라극장 무대가 좀 더 넓었더라면 세트 배치나 배우 동선이 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그 악다구니나 활발함이 잘 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앞으로도 부산에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사진출처 - 미지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