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리_한예종] 새로운 기대주들의 향연, 잊히지 않을 연극

구보씨 2011. 12. 1. 11:48

제목 : 이리

기간 : 2011.12.01(목) ~ 2011.12.03(토)

장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실험무대

출연 : 김두진, 김정화, 박용우, 박희철, 양정윤, 오정택, 장미, 장율, 정동철, 정혜지, 최영재, 최효성, 한기장

작/연출 : 큰바위(김남건, 박범수)

드라마터그 : 김종우

제작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사 수업 과정에 해당하는 공연이 이래도 되나 싶다. 다시 생각해봐도 반칙 같은 작품이다. 딱 3일 공연이니, 놓쳤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작품으로 손에 꼽을 만하다. 한예종 레퍼토리 작품이야 교수로 재직 중인 연출가를 보고 결정한다지만, <이리>는 학생이 쓰고 연출하고 연기하는 데다 게시판에 실린 간단한 정보만 알고 보니 어느 정도 작품 완성도를 감안하게 된다. 게다가 2시간 30분이 넘는 창작극이라 자칫 시간 낭비를 넘어서 곤혹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실험무대 간이 객석 역시 감수해야 할 판이다.

 

요 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을 보면서 지도교수가 누군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리>를 보면 지도교수로 이름을 올린 박근형 연출이 대뜸 떠오른다. 가족, 친구, 이웃 사이 그 진득진득하고 질척질척한 감정이라니, 알면서도 보고 보면서 눈물을 찔끔거리고 만다. 이 작품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순박한 시골 시장터를 중심에 두고,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휘둘리는 장삼이사들의 멜랑콜리한 신파를 잘 녹여낸 작품이다. 얼핏 전개, 구성, 인물 등 영화 <화려한 휴가>(2007)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혹은 2010년 30주년 기념 뮤지컬)과 달리 77년 우발적인 이리역 폭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역사적 현실이라는 부담을 덜어내고 간다. 실제 일어난 사건에 익산으로 바뀐 사라진 지명 ‘이리’를 통해 ‘망각의 방식이 지배자가 내세우는 통치수단의 한 방편’으로 당시 시대상을 해석한 작품은 모티브를 잘 잡아 극으로 끌어낸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2007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나 인혁당 사건을 1977년 사건에 대입해 픽션으로 가공한 점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 만하다. 극중 지혜를 중심으로 이리역 폭파를 통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가 사건의 가장 중심축인데, 얼개가 허술하다. 지혜가 다이너마이트를 얻는 과정은 당시 서슬이 퍼랬던 긴박한 시대사에 비해 실소가 터질 정도다. 술에 취한 박정희(동명 인물)를 두고 벌이는 도입부과 결말부는 두루 아쉬움이 남는다. 훔치면 간단한 걸 사고파는 과정과 엮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상황은 난센스에 가깝다. 게다가 제목과 달리 다이너마이트를 구했다면 암살 장소가 꼭 이리역일 필요도 없을뿐더러 극중 총을 구한만큼 암살은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진다. 역을 폭파시켜 암살에 성공했다고 한들, 피치못할 시민들의 희생을 두고 역사적 의미를 운운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다시 말해, 지혜가 처한 상황이나 벌이는 행동이 치기어린 모습으로 다가오다 보니 역사적 아픔을 기억하자는 의미에 앞서, 실제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대들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중앙정보부 이형안 형사가 이리시장 시골 장삼이사를 인혁당재건위로 조작하는 과정도 공탁이나 학봉이의 이전 삶에서 그들의 학력이나 살아온 이력을 보면, 실제 사건 피해자들과 다르게, 이북 출신이라는 점 외에 짜 맞출 여지가 적다보니 조작 자체에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동시대 젊은 관객들에게 와 닿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두고 2시간 30분 동안 몰입을 이끌어내는 실력만큼은 무척 탁월하다. 올해 연극계에 신성처럼 등장한 오세혁과 연희단거리패 김지훈에 이어 새로운 이야기꾼이 탄생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작은 소극장을 잘용한 무대도 눈에 띄지만 배역마다 펄펄 뛰는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연극은 결국 배우 예술인만큼 이 정도로 배우들의 역량을 끌어낸다는 건 대단한 재능이다. 배우들 역시 70년대 50대 시골 장터 촌부들 연기를 나무랄 데 없이 잘 이해하고 연기로 펼친다. 앞으로 이 작품으로 중극장 공연을 기대하는데, 그 전에 소극장 공연으로 객석과 배우 사이 짧은 거리를 두고, 표정이나 동작에서 디테일하게 신경 쓴 연기라 더욱 힘을 더한다.

 

김재엽 연출의 <장석조네 사람들>을 2009년 연우소극장 버전으로 보는 듯, 부모 세대의 각박하나 따듯한 정서가 이리시장에서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로 잘 녹아 있고, 전체 구성도 에피소드들이 튀지 않게 연결이 잘 된 편이다. 극 전체를 끌어가는 힘이 탄탄해 객석을 쥐었다가 놨다가, 울렸다가 웃기는 솜씨가 솔직히 능글맞을 정도다. 이 작품이 <장석조네 사람들>처럼 좋은 작품으로 소극장 중극장을 아우르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꼭 연극적인 문법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 편집을 하듯 전개되는 구성이 좀 더 꽉 짜였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큰바위 팀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가 되길 바라지만 연극인으로 앞으로 오래 기억되었으면 한다.*

 

사진출처 - 까칠한 호돌씨 블러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