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들Les Bonnes - apply to a play]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망치를 들고
제목 : 하녀들Les Bonnes - apply to a play
기간 : 2011.09.01~10.30
장소 :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원작 : 장 주네(Jean Genet)
출연 : 김미옥, 연해성, 최미현, 황유리안나, 정해영
재구성, 연출 : 김현탁
조연출 : 박선주 / 무대감독 : 이진성 / 분장 : 정지호 / 조명 오퍼 : 김다흰 / 음향 오퍼 : 현진호 / 동영상 : 이창환
주관 : 극단 성북동비둘기(02-766-1774)
쥬시
<김현탁의 햄릿>나 <메디아 온 미디어 MEDIA on media>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공을 들여서 원작을 해체하는 작업은 이들의 겨냥하는 지점에 원작 테스트 자체가 아니라 유명 텍스트에서 특정 부위만 차용하는 대중문화를 겨누고 있다. 그래서 개작 수준을 뛰어넘어, 심하게 표현을 하면 도살장에서 껍데기이나 뼈대만 남겨놓은 결과물을 내보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뒤집어쓰고 그 원래의 형태를 상상하고 그 원형으로 행사하면서 체화하는 몫은 관객에게 돌린다.
극단 성북동비둘기가 올린 작품이면 해당하는 평가라, 비슷한 얘기를 리뷰마다 썼다. 생껍질을 쓴 도살장 비둘기라, 비유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극단은 배우들에게 땀과 침과 눈물과, 때때로 까지고 할퀴면서 생긴 상처에 맺힌 피까지, 무대를 체액을 흥건하게 적시길 요구한다. <하녀들> 전에 오른 <세일즈맨의 죽음>은 주인공 윌리 로먼 역 이진성이 러닝머신을 켜면서 시작하고 끄면서 끝난다. 젊지 않은 배우가 내내 달리면서 대사를 치고 연기를 한다. 극단이 책장에서 각색을 위해 꺼내드는 작품은 그리스 고전에서 <춘향전>, <혈맥>까지 한국 근현대소설까지 천차만별이나 언제나 극장을 습기로 채우는 쥬시한 연극으로 뒤바뀐다. juicy, [1. (호감) 즙[물기]이 많은 2. (비격식) (충격적이거나 흥미진진하게) 재미있는[군침 도는] 3. (비격식) (많은 돈・만족감을 안겨 주어서) 매력적인[군침을 흘릴 만한].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석은 성북동비둘기를 설명하는 뜻으로 잘 어울린다. 그런데 실제로 비둘기들이 쥬시한가? 토사물을 콕콕 쪼아 먹는 비둘기를 떠올리면 어림도 없지만, 다양한 비둘기종 가운데 4종 가량이 고기 맛이 좋아 멸종당한 이력을 떠올리면 '비둘기 자체는 쥬시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붙인 평화의 상징을 두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떠올리는 건 연결고리가 아주 동떨어진 건 아니다. 그러나 도시에 빌붙어 사는 비둘기, 먼지가 뭉친 덩어리인 듯 보이는 비둘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 극장 일상지하에서 기존 연극 텍스트와 논법은 날것으로 사정없이 해체된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조근조근 얘기해도 울릴 지하무대에서 목이 쉬도록 배우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만, 관객은 덩달아 흥분되거나 군침을 흘리기보다 점점 심리적 거리를 둔다. 객석과 무대가 하나인 탓에 객석마저 조명에 노출되니, 소품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곤욕을 견디어야 한다. 데커레이션이 들어간 플라스틱 음식모형으로 찍은 체인음식점 메뉴에 길들여진 입맛은 도살장에서 싱싱한 고기를 제일 먼저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공포 영화 배경쯤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관객들은 땀을 흘리는 배우들과 다르게 몸이 옹그리고 으슬으슬 떤다.
하녀 둘, 하녀들
연극이 보통 1시간 반 남짓 안에서 친절하게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구조라면 성북동비둘기의 작품은 선행 학습을 요구한다. 검색 수준 정도라도 기본 이해를 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올리는 작품이 대체 같은 작품이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 원작을 한 번쯤 읽어봤다고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성북동비둘기의 작품은 다른 극장에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을 보고난 직후에 시작하는 연극이다. 마라톤 피니쉬라인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형국이다. 내가 알기로 극단 창단 이후 모든 작업이 이런 방식을 고수했고, <하녀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무대로 보이는 자리에는 스피커가 연결된 마이크 하나, 한쪽에 있는 소품 상자. 20세기 초 프랑스 시골마을인 원작 배경과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무대 대부분은 하녀들 벽을 향해 놓은 접이식 의자 수십 개가 있다. 그중 객석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뒤쪽 서너 줄이다. 관객이 지하실 의자를 다 채운다면 무대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애초 관객 수를 제한할 상황을 설정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극장 밖 관객 상황을 보고 무대 배치를 그때마다 새로 하는 걸까. 그날 관객은 서너 줄 안에 들어찼으니 객석은 그 정도면 됐다.
내 앞 자리에 여자 둘이 앉아 있다. 가만히 보니 오한이 들린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고, 제대로 보니 온몸에서 땀이 뚝뚝 범벅이다. 하녀들이다. 왜 연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땀을 흘리면서 떨고 있는가? 연극이 시작하면 원작의 결 따라 자매가 주인과 하녀로 역할을 바꿔 유희를 즐기나 싶지만 애초 전제 조건이 다르다. 지금 이 자리는 막 살인사건 벌어진 현장이다. 하녀들의 무고에 구치소에 구금됐다가 풀려난 마담의 애인 무슈는 원작과 다르게 마담의 집에 찾아왔다가 그녀들의 손에 죽었다. 바닥에 흘러넘친 핏물이나 여기저기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면 분노로 가득한 현장이다. 길길이 날뛰는 걸 죽이려면 그 만큼 땀을 흘리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땀에는 두려움이 묻어나 서늘하다. 시작부터 숨길 수 없는 비극이다.
1933년 2월 2일 프랑스의 르망시 브뤼에르가 6번지에서 두 모녀가 하녀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르망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자매인 레아 파팽과 크리스틴 파팽은 7년간 하녀로 일하던 집에서 주인 모녀의 눈을 맨손으로 뽑아 죽인 뒤 시체를 망치와 부엌칼로 난자했다. 자매는 몸을 씻고 나이트가운을 걸치고는 자신들의 다락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사랑을 나누었다. 시체 은닉에 대한 아무런 시도도 없었으며, 발각 당시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이제야 제대로 되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당시 이 비극에 매료된 각 분야의 저명인들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과 논문을 발표했다. [희곡 '하녀들' 배경 설명 중에서]
<하녀들>은 실제로 벌어진 파팽 자매 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와 재구성한 작품이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할 때 누구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작가”, 사생아로 태어나 거지, 도둑, 창남으로 살았던 장 주네가 쓴 작품이다. 글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파팽 자매와 그리 다르지 않은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을 남자다. 자매가 하녀로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7년을 견딘 과정이, 부랑자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요약한 축약 본이자 통쾌한 복수극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등장인물 셋이면 족한 <하녀들>은 전 세계 크고 작은 극장에서 수도 없이 무대에 올랐다. 나만 해도 요 몇 년 사이 몇 편의 평작과 수작을 두루 봤다. 장 주네가 사건을 자기 식으로 하녀들을 중심에 두고 걸러낸 희곡을 연출마다 새롭게 해석하고 걸려낸 작품은 적어도 파토스만큼 풍미를 즐길만했다. 허나 희곡에 흐릿하게 남은 피비린내를 거슬러 올라가 '재연(再演)'이 아닌 사건을 ‘재현(再現)’하는 작품이 있었나 떠올려보면, 연희단거리패 정도가 비슷한까, 내 기억에는 드물다. (그렇다고 다른 극단 작품이 완성도가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격정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이다.) 내 앞 자리에 땀범벅으로 앉아 있는 배우들은 장 주네가 글로 다듬기 전 파팽 자매 원형의 21세기 무대 버전이다.
연극판
쥬시한 성북동비둘기와 <하녀들>의 만남이라, 아찔하지만 과한 게 아닐까, 붉은색 위에 붉은색을 덧칠하는 식이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러자 성북동비둘기는 부조리한 사회 대신 부제 ‘apply to a play’처럼 메타 연극으로 극단을 둘러싼 연극계 현실을 단검처럼 겨눈다. 어림짐작이지만 언론이나 관객의 관심 없이 일상지하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신들을,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스스로 취해 밴대질을 하는 파팽 자매와 비슷한 처지로 보는 걸까.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 제대로 된 조명도 없이, 이게 공연장이야? 어? 어?” 파팽 자매가 하녀로 살 수밖에 없는 천한 신분과 가난한 현실에 자학 혹은 망상을 꿈꿨듯, 극중에서 마님의 입을 통해 성북동비둘기가 머무는 일상지하를 대놓고 비꼬는 장면이 등장한다. 성마른 외침을 바늘이 되어 꽂힌다.
대략 7년 쯤 연극을 했다면 나이나 경력으로 보아 다른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다. 7년을 하녀로 산 파팽자매에게도 결혼이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소박한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 평생 하녀로 살 처지를 감지했거나, 혹은 가난한 우유 배달부 따위를 만나봐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행한 아이를 낳을 처지를 직감했을 때, 매일 별 볼 일없는 주인 모녀의 삶이 부조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꿈이란 한낱 꿈이라는 지독한 현실을 알아버린 자매에게 모녀살해는 필연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두 차례 세계 전쟁을 겪은 장 주네의 삶이 만만치는 않았다고 하나 동시대 모든 작가들이 거지, 도둑, 남창으로 살지는 않았다. 하녀들이 다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미국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보라, 흑인 운전사와 백인 노부인은 결국 서로 얼마나 돈독한가… 싶지만 역시 웃기는 소리다. 호크는 똥고집에 잔소리만 늘어놓는 미국 남부의 인종주의자 데이지를 죽여서 뒤 트렁크에 싣고 다니는 상상을 늘 했을지도 모른다. 장 주네와 파팽자매는 같은 핏줄을 타고났다. 자매에게는 펜 대신 꼬챙이가 들려 있었다는 차이뿐이다.
무사시 님(hiredhot) 블러그(http://blog.naver.com/hiredhot)
유명세를 탄 배우들이 영화, TV, 뮤지컬에서 혹은 연극에서 연기하는 햄릿, 메디아, 춘향, 세일즈맨의 죽음을 극단 성북동비둘기도 무대에 올린다. 무대, 소품, 조명은 열악하나 작품을 이해하고 올리는 진정성이나 변주한 완성도만큼은 삭힌 홍어애 삭힌 젓갈국물 한 방울처럼 진하게 파고든다. “너에게는 다락방 냄새가 나.” 희곡 대사는 “너희한테는 쾨쾨한 지하실 냄새가 나”처럼 귀에 들린다. 자괴감 섞인 자매 사이 대화처럼 자조적인 상황이나 다를 바 없다.
몰락한 귀족 부인이 감옥에 갇히면 위안 삼을 대상이 자기 자신밖에 없으므로 거울을 챙겼다. 파팽자매는 서로 거울 역할에 충실했으므로 둘 사이 근친상간은 나르시시즘이다. 왜 다른 하녀들처럼 동네 건달들과 놀아나지 않았을까. 역으로 유추하면 마님을 욕망하면서 심리적 감옥에 자신들을 가둔 셈이다. 원작 희곡에서 마님이 하녀들의 젊음을 두고 부럽다고 말하는 부추김과 자매들이 마님놀이를 하면서 마님의 옷과 화장품을 몰래 훔쳐 바르는 이유가 그렇다. 희곡에서 일상지하로 되돌아오면 연극은 언론, 광고, 평론가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관객들을 잡아끄는 대학로 메인스트림(the mainstream (사상・견해 등의) 주류[대세])에 반발을 하면서 역시 그 자리를 욕망한다. 그러면서도 타협할 줄 모르거나 고작 주인 모녀가 먹다 남은 식은 스프나 얻어먹자고 이러고 있을까(끌레르가 다시 마담으로 등장하며, ‘문화공간활성화 지원?’하고 쏠랑주를 비웃는다-팸플릿 참조), 젊고 예쁜 우리가 왜 저 주름 자글자글한 늙은 마녀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할까 싶을 때 연극은 시작된다.
성북동비둘기's
그런데 성북동비둘기 작품은 여느 극단의 햄릿, 춘향, 세일즈맨의 죽음, 하녀들과 맞붙어도 자신을 가질만한가? 인력, 기획력, 자본력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적은 인력이 뿜을 수 있는 내공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기존 무대와 객석이 정해진 극장 틀을 벗어나면 기준이 달라진다. 무대와 객석이 작품마다 새롭게 재배치되는 극장이라면 어떨까. 고정 객석도 고정 조명도 없으니 뭘 어떻게 배치하고 비틀고 뒤엎는 일이 가능하다. 원작과 다르게 마담의 기둥서방 무슈는 하녀들을 강간했다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다. 무대 한쪽 박스(원작에서 옷방)에서는 무슈의 몸에서 빠진 피로 흥건하다. 육식동물 성북동비둘기가 다른 연극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남은 껍데기를 소품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극장은 곧 상상력의 한계이다. 연출의 시선으로 보는 영화의 사각 프레임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기준으로 보면 성북동비둘기 연극은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무대를 가득 채운 관객 없는 빈 접이 의자는 처절하게 날아다니고 깔리고 소품으로 바뀌고 연극이 끝나고 청소하듯이 싹 다 치웠다가 다시 편다. 그 자체로 뛰어난 오브제 연극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은연중에 객석을 내던지는 연기는,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우회적으로 관객을 향한 독설이다. 두 달 동안 공연을 하는데, 의자 몇 개는 망가졌고 몇 개는 삐거덕거린다. 자매의 격렬한 다툼과 자학에 공연은 가면 갈수록 부서진 의자가 나올 판인데, 의자 위로 뛰어다니는 배우도 위험하고-바닥은 말처럼 콘크리트 맨바닥이다-결국 마련된 객석마저 없어지니 관객도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격한 연기에 하녀들 역이 하루걸러 더블캐스팅이라 나머지 한 팀 공연을 볼 생각인데, 마지막 10월 30일 공연이 기대된다. 물론 작품을 위해서라도 의자를 사겠지만 말이다.)
결국 객석 몇 줄을 빼고 객석이었던 무대는 난장판이다. 무대와 객석의 전복을 넘어서 무대가 객석이고 객석이 무대이고 그날그날 관객 수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진다. 의상을 봐도 마담(김미옥 분)외에 하녀들은 극 중간 메이드복을 걸치기는 하지만 공연 연습을 하듯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연기한다. 연습과 공연의 경계도 흐릿하다. 그렇다면 연기는 어떨까? 마담이 평론가로 정론에 충실한 시선에서 연기를 지시하지만 연기 스타일이 다른 성북동비둘기식 메소드 연기는 ‘살인을 감추기에 급급한 듯’ 과장으로 보인다. 마담은 비꼬다가 퇴장하는데 성북동비둘기를 바라보는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glitters is gold
연습과 경계가 없다면 소품을 부러 갖출 필요도 없다. 안 그래도 이전 작품에서 본 낯익은 소품이 종종 다시 등장한다. 쏠랑주는 총이랍시고 두툼한 망치를 거꾸로 들고는 끌레르의 머리를 겨눈다. 불이 꺼지고 꽝! 콘크리트 바닥을 힘껏 내리치는 소리는 귀에서 윙윙 오랫동안 맴돈다. 효과음이나 화약총으로는 어림없는 충격이다. 대관 공연이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지하실 바닥을 깨버릴 심산일까? 그보다는 연극판에 대한 분노처럼 보인다. 극장 밖으로 망치질을 확장하면 김현탁 연출 말처럼 우리의 삶이 곧 하녀와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결론이 또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극장을 나서서 내가 내딛는 걸음이 곧 망치질이 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심코 내딛는 걸음마저도 조심스럽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불만으로 가득한데, 바뀌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화를 내기 전에 내 걸음걸이가 황소의 정수리를 겨누는 정처럼 정곡을 노리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쏠랑주가 마이크를 붙잡고 관객을 향해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을 부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무대에 서는 이유를 (There's a lady who's sure all that glitters is gold) 알아준다면 (And if you listen very hard, When all are one and one is all) 성북동비둘기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And she's buying a stairway to heaven), 라는 비유처럼 들린다.
사회를 진단해 점잖게 결론을 내고 조언을 내놓는 식이 아닌 상처를 드러내고 화를 모조리 쏟아낸 <하녀들>은 성북동비둘기를 위한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사적)이자 소시오드라마(sociodrama, 공적)이다. 슬슬 일상지하 밖에서 관객들로 꽉 찬 극장에서 그릴 비행 궤적이 궁금해졌다. 기독교 확산 이후 사신(邪神) 취급을 받아 물받이 신세가 된 가고일Gargoyle이 망루를 박차고 오르듯, 비둘기의 탈을 쓴 괴물들이 조망하는 새로운 무대 오감도를 기대한다.*
사진출처 - 성북동비둘기http://club.cyworld.com/bee2gee
참조 - 성북동비둘기 하녀들 소개 http://blog.yes24.com/document/5076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