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됴화만발] 흙먼지 날리는 상여를 타고 영화를 겨누는 무협활극
제목 : 남산예술센터 2011 시즌 프로그램 - 검객괴담 됴화만발
기간 : 2011/09/06 ~ 2011/09/25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출연 : 박해수, 홍원기, 장희정, 황선화, 염혜주, 이재호, 설하, 박경주, 이정수, 안재현, 이운호, 안창환, 김주환, 유명훈, 조민정, 진명희, 장세준
원작 : 사카구치 안고
재창작/연출 : 조광화
주최 : 서울문화재단
제작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아! 뮤지컬이나 연극과 경쟁하는 게 아니다. 이 연극은… 추석 개봉영화들과 맞짱을 뜨자고 나선 작품이다.” 개인적 취향과 감상만 놓고 보면 600만 관객을 동원한 <활>과 맞붙어도 낫다고 봤다. 어둑어둑한 시각, 남산예술센터에서 나와 소파로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휘돌아 올라오는 먼지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딱! 든 생각이다. 바람이 매연을 품고 휘익 몰아치는 순간, 내 시선은 주인공 검객K처럼 매섭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쉽게도 날씨가 쌀쌀한 탓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관객이 없었다. 검객K는 식욕과 색욕,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원작 소설을 보면 요부 단이 외에 일곱을 아내로 두었고, 연극에서는 화자인 소녀 외에 남녀 앙상블(계집탈을 쓰고 등장한) 모두를 겨느렸더랬다. 생각해보면 불사의 몸을 가진 그가 본능 외에 예의나 격식을 따질 이유가 있겠냐 말이다. 좌우지간 보고나니 2시간 내내 앉아 있었으면서도 내몸을 날뛴 마냥 욱신거린다. 이소룡 영화를 온몸으로 따라하며 봤던 코흘리개 시절 가물가물한 기억이 됴화(桃花)가 만발하듯 몸에서 발화한 것일까. 어쨌거나 예상치 못하게 간만에 수컷들의 격렬한 향연을 보고 내 속에 저 안쪽 꽁꽁 숨은 야성이 되살아났다. 고기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영화 <황해> 면사장(김윤석 분)처럼 커다란 고깃뼈를 손에 잡고 우걱우걱.
<됴화만발>을 두고 할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만 유감부터 애기하겠다. 2년 전에 부활해 작년까지 무사히 이어지면서 안착하나 싶었던 <뉴웨이브 페스티벌 場>이 올해 없어졌다. 벚꽃이 우수수 진 자리인듯 허무하다. <됴화만발>의 원작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1947) 마지막 문장처럼 ‘그곳에는 꽃잎과 차가운 허공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와 같은 심정이 절절하다.
<페스티벌 場>이 작은 기획이긴 했으나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풍성한 공연축제 중에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신선했고 또 공연 본연의 소통이라면 면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블러그 페스티벌 장 리뷰 참고) 그런데 1년을 손꼽아 기다린 보람이 사라진 것이다. 요부 단이를 죽인 뒤 심정이 이랬을까, 검객K의 감정과 대사를 빌어 인용하자면 “누가 복숭아나무를 베어버렸는가! 고독한 가을을 선사했는가!”이다. 갑작스레 뜬금없이 엉뚱한 불만을 털어놓는 이유는, 남산예술센터가, 제작 지원이 가능한 서울문화재단시설이거니와 다원예술작품을 올리기에 드라마센터 가변식 무대만한 데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과 다르게 올해 같은 시기, 배우 박해수가 진흙을 떡칠하고 노려보는 붉은 얼굴이 포스터에 떡하니 걸렸다. 미필적 고의.
남산예술센터 종횡무진 변하는 가변식 무대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간이 객석은 애당초 2시간 넘는 공연을 소화하기에 좋다고 보기가 좀 그렇다.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 배길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또 뒷사람이 무심코 툭툭 건드리는 뻘짓, 아니 발짓이 그대로 전달되니 꽤 신경 쓰인다. 그런데 2시간짜리 연극을 휴식 없이 한 번에? 무리수를 두었다 싶다. 재미가 없다가는 이리저리 뒤척이는 등쌀에 툭툭툭 등안마 받고 올 태세다. (그래서 무대가 멀지 않아 부감으로 보는 재미도 그렇고 이런저런 이유로 극장 맨 뒷자리를 선호한다.) 뭐, 하지만 <됴화만발>은 앞 단락에서 한 얘기를 다시 주워 먹자면 ‘도발적이면서도 몰입도가 단연 압권'이다. 공연 시작 전 무대를 봤을 때부터 이미 맘이 좀 누그러들었다. 반타원 무대 위에 세로로 길게 상단 무대를 세웠는데, 액션을 소화하기 위해 최소한 잡은 무대인데도 앞쪽 세줄 객석을 포기했다. 정승호 무대연출은 "부유하는 상여" 이미지라고 했고, 난 죽은 무사들이 무대 아래로 사라지거나 무대 위로 솟는 장면은 무대에서 구현하지 못한 숲의 이미지, 땅의 순환(생명의 순환이라고 보기는 힘든 구조지만)을 상징한다고 봤다.
극 말미에 상여라고 했던 그 이유가 반전처럼 한 번 더 드러난다. 개폐교처럼 상단 무대 앞쪽에 철사줄을 걸어서 들어 올리면서 감춰져 있던 하단 무대가 저승처럼 드러난다. 또 위로 들린 상당 밑바닥에는 거대한 지옥도가, 붉은 조명과 해금 연주와 어울려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만신 굿을 재현하듯 관객을 망아경(忘我境, ecstacy)으로 이끈다. 정승호 교수가 조광화 연출과 호흡을 맞춘 뮤지컬 <남한산성>를 보면서 동적이고 세련된 무대와 장치에 능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무대가 작고 반타원인 남산예술센터 무대를 효과적으로 잘 사용했다. 조광화 자신이 창작 뮤지컬에 애착을 갖기도 하거니와 주연 박해수가 뮤지컬도 가능하기도 하고, 또 무대 때문에라도 <됴화만발>이 뮤지컬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푸른문학시리즈' (2009, 니혼TV). 읍내로 내려와 머리를 수집하는 단이의 그로테스크한 취미
검객괴담이라는 부제가 붙은 활극에, 올리고 내리는 좁은 부감 무대 위만 주로 사용한다는 게 상식 밖이고, 실제로 배우들로 꽉 찬 무대는 답답해 보인다. 허나 붕붕 날아다니는 종합격투기식 넌버벌퍼포먼스가 한류 대표상품으로 익히 자리 잡은 마당에, 무대를 좁히고 동작을 압축한 선택은 성공이다. 왕가위 감독의 무협영화 <동사서독>을 보듯 무술감독 대신 무용수 심새인에게 맡겨 선 고운 액션 미학을 선택하고, 그 위에 영화 이상 강렬한 조명과 음향 효과를 효과적으로 강하게 섞어서 나온 혼합물이라 가능했다.
조광화 연출이 허리우드 키드인 동시에 TV의 폭력적인 이미지의 세례를 받은 세대라는 특징이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연극으로 재현한 영화, 만화, TV식 장르물이라니! 이 작품이 2003년 첫 구상 이후 오래 묵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적지 않은 제작비에 제약이 많은 무대 위에서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올리겠다고 하니 말이다. 남산예술센터가 제작자로 판을 깔았다고 하나, 완성도 높게 나왔으니 망정이지, 자칫 내년 남산예술센터 제작 심사 기준에 영향을 줄 뻔한 ‘저주받은 걸작’으로 남을 뻔했다.
그러나 모티브부터 제작 방식까지 다양하게 혼종한 결과물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우선 원작이 일본에서 유명한 소설이자 일본 영화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가 각색, 연출한 <만개한 벚나무 숲 아래>(1975)나 이시즈카 아츠코 만화영화 감독의 ‘푸른문학시리즈'(2009, 니혼TV)로 제작된 바 있다. 연극이 원작 벚꽃을 복숭아꽃으로 바꾸는 수준이 아닌 재창작 수준이긴 하나 원작부터 이후 재창작물까지 항상 수작으로 평가받는 바, 연출의 부담이 눈에 보인다. 조광화 연출이 스스로 밝히기를, 일본 극단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할 당시 “꽃잎이 극장에 가득하고 제일 앞자리에 앉은 내 무릎에 두껍게 쌓이는 화려하고 자극적 비주얼”에 충격이었다고 하면서 "그 순간 외로움이 더 오롯이 드러났다"고 했다. 즉 관객과 다르게 창작자 입장에서는 꽃잎이 쌓인 아우라가 확실히 컸지 싶다.
검객K가 단이를 업고 산을 오르고 있다(영화 포스터 참조,1975). 그가 업은 그녀는 그의 지독한 업일지도
그래서 <됴화만발>이 기사, 리뷰, 댓글마다 붙어 벚꽃잎마냥 우수수 떨어지는 ‘스타일리쉬’한 장점 위에 2천년 묵어 진흙이 몇 번이 되고도 남을 고독을 어떻게 무사히 화룡점정 수준에 올렸는가, 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전반부는 영생을 꿈꾼 진시황 일화 위에 <프랑켄슈타인>을 덧입혀 장고의 세월을 몽타주처럼 빠르게 이어가면서 작가/연출이 의도한 무협으로 빠른 속도감과 잘 어울리나, 원작소설 결에 충실한 후반부는 느리고 정적이면서 추상적이라 대비 효과를 빚는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극중 삼천 동남동녀를 잘라 붙여도 영생에 실패한 의원의 미완성 의술처럼 어긋나는 셈이다. 번역본으로 원고지 140장 내외 짧은 소설이 품은 특유의 은유와 압축미는 뮤지컬 제작진을 데리고 연극무대에 세련되게 이식한 조광화 식 무대미학과 충돌이 일어난다.
"스토리는 핑계이고 배우가 내뿜는 뜨거움과 존재감이 연극의 참맛"이라고 연극미학 밝힌 연출/각색 조광화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게다. 그리고 약점을 숨기지 않고 강점을 밀어붙힌 2시간짜리 카메라 한 대 없는 땀범벅 아날로그 방식은 무대와 객석 사이 화끈하게 통한다. 시선이 산만하게 분산되지 않도록 겹을 쌓아 압축한 무대 위에 카메라 앵글처럼 포커스를 집중해 극 마지막까지 단단하게 풀고 놓지 않는다. 더욱이 좁은 무대는 뮤지컬에 비해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는 연극으로 객석이 맞닿은 남산예술센터가 맞춤이다. 검객K 몸과 동남동녀 종이인형 세밀하게 새긴 경혈도가 대형 공연장 2층 R석은 물론 1층 S석 쯤에서도 흔적이나 보이겠는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상단 무대가 올라가 하단(저승)이 드러난 상황이다.
극장 자체 제작으로 대관과 달리 충분히 숙달될 만한 여건이 마련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간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른 공연들을 돌아봐도 이번 작품만큼 극장 역학 구조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드물다. 객석 정면이 아닌 반원이 끝나는 측면 객석에서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사각이 있지만 [됴화만발]은 측면 객석에서 보면 무대가 가로로 길게 펼쳐지면서 정면에서 보는 시야와 다르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극 초반 극 초반 산적들이 등장할 때, 측면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무대 안쪽 깊숙한 공간을 활용한다. 부감 무대 뒤쪽으로 2층 높이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산이라는 지형 특색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산과 계곡을 타고 적이 다가오는 시간적 공간적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 안쪽 무대는 작품을 위해 따로 설치한 장치가 아니다. 극장의 2층 통로, 즉 다른 작품에서 막이나 세트로 가리는 구조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떠돌이 검객과 대결을 앞두고 있다. 떠돌이 검객 뒤에 악령처럼 붙어다니는 분신들이 보인다.
백문불여일견. 이미지를 글로 구현하는 데에는 제반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중간 중간 액션 마다 드러나는 슬로우/스톱 모션 아이디어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차용했다고 해도 연극적으로 발전한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정도의 힌트가 다다. 연극 한 편에서 그 동안 봤던 활극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때 이른 혹은 때 지나 만개한 복숭아꽃처럼 말이다.
공연을 보고 영화 속 면사장처럼 커다란 족발을 뼈채 잡고 뜯었다. 나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푼 연극 감상이다. 극장에서 멀지 않은 명동 어디쯤 나름 알 사람은 아는 족발집이었다. 한창 물어뜯는데, 홍원기(의역 역) 배우가 젊은 배우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우리가 시킨 족발이 마지막이었는지, 그는 아쉬운대로 보쌈을 시켰다. 방금 무대와 객석에서 만났는데, 허름하고 작은 가게 안 바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으니 묘한 인연이다 싶다. 하긴 보는 관객도 야성이 솟아 뜯을 맘이 들었는데, 배우들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연기도 하지만 희곡도 쓰는 그이인데 후배를 챙기는 모습이 좋았다. 무대 안팎으로 의원 역할에 충실한 셈이다.*
사진출처 - 남산예술센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