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푸는 하얀 동그라미] 판소리로 푸는 '코카서스의 백묵원'
제목 : 소리로 푸는 하얀 동그라미
기간 : 2011/09/01 ~ 2011/10/22
장소 : 대학로 물빛극장
출연 : 한명일, 윤성원, 황준영, 장우용, 김성환, 조유아, 조준희, 이지연, 정지혜, 고승조, 박수진, 김주영, 최주연, 김지현(악사), 정명기(악사)
원작 :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출 : 정호봉
작창 : 한승석
작곡 : 김수정
안무 : 김봉순
제작 : 중앙음악극단
하필 추석 당일이었다. ‘소리로 푸는’ 공연이라 우리 가락이 추석과 잘 어울리는 게 맞으나, 요사이 씨름대회에서나 들을까, 성형수술하고 피우 허여멀끔한 아이들, 아니 아이돌들 등살에 티비 어디를 돌려도 그놈이 그놈이란 말이지. 일요일을 하루 쉬고, 정작 추석에 나와 공연을 하건만 객석이 텅텅 비었더란 말이다. 그러니 소리가 송편으로 목이 꽉 막힌 듯, 배에 힘이 안 들어가고 비지땀만 주룩주룩 쏟아낸다.
부러 추석 공연을 잡았을 텐데, 하필 추석이 되고 말았다. 추석 때 대학로 자체가 전보다 한가하기는 했더랬다. 대학로 명물 거리의 악사도 안타깝게 들을 이 없는 이들을 향해 이별노래나 불러댔으니 말이다. 공연을 올리는 중앙음악극단이 순진하다고 해야할까나. 공연예매 사이트를 끼지 않으니 오로지 입소문과 여기저기 붙인 포스터로 경쟁을 하는 당찬 결의를 보여주는데, 하필 포스터도 요즘 고등학교나 교회 발표회도 그리 하지 않을 흑백이라 안 그래도 벽에 서로 덧붙이기 일색인 판에 눈에 당최 들어오질 않는다.
허나 요런 푸대접을 받을 만한 이들이 아니다. 중앙대학교 국악과 졸업생들이 만든 극단이라는데, 식견없는 내 귀에도 종종 중앙대 국악과에서 실력파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들이 만든 창단극 <꽃피는 바리>는 수작으로 입소문이 타기도 했다. 기사 검색을 해보니 대보름 축제 참여 등 나름 활발하다. <하얀 동그라미>라는 제목이 그렇듯이 원작은 또 브레히트이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종종 무대화되기는 하나 역시 만만하게 덤빌만한 작품이 아니다. 연출 정호붕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는 외국 관광객을 사로잡을 워커힐 호텔 레퍼토리 <꽃의 전설>을 만든 이라면 알게다. 그전에도 학생들을 데리고 음악극 축제에 종종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극단 취지에서 말하듯이 전통의 맥을 잇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대에 걸맞은 국악예인들을 양성하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왠지 보고 나면 눈이 어지러울 듯한 화려함의 극치 <꽃의 전설>에 비해 <하얀 동그라미>는 꽤나 단백하다. 왕의 식탁과 백성의 밥그릇 차이랄까, 하지만 양념 뒤범벅이 아닌 재료 고유의 맛이 중요하듯이 배우들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 그 만큼 자신 있다는 의미일 게다. 서랍이랄까, 상자를 아이들 쌓기놀이처럼 두루 활용하거나,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몇몇 소품 사용이 보기 좋다. 상자 활용은 다른 오브제극에서 봤던 부분이긴 하나 섬세하고 다채롭기로는 으뜸에 속할 만하다.
남자 셋, 여자 다섯에다 가끔 악사 둘까지 거들어 두루 역할을 나눠 연기를 하는 방식은 애초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봐왔다고 하나, 따로 주인공을 딱 정하지 않고 주인공 꽃분이 역할을 세 명이 두루 나눠 연기하면서도 어색함 없이 이어지는 걸 보면 배우들이 그 만큼 소리에 자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다. 대신 창극이 뮤지컬보다 오페라가 가까운 장점인 동시에 아쉬운 점이라면 캐릭터가 단순하다는 점인데, 착하기만 한 꽃분이 역할을 나눠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막극인지라, 두 시간 넘도록 연기만 해도 쉽지 않은 판에 소리까지 하려니 쉽지 않고 옷이 금세 흠뻑 젖는데 소극장 객석에 빈자리가 많아 괜히 미안스럽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객석을 보며 연기를 할 때 다소 허망하리라 여겼는데, 눈빛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이제 극단으로 막 시작이라는 의미일까 싶기도 하고, 극중 꽃분이처럼 이 정도 난관쯤이라 하는 눈치로도 보였다. 따로 무대 장치가 없고 배우들이 등퇴장이 거의 없이 앉아 진행하는 공연은, 조명이 두루 세밀하게 쓰이는 대목이 있지만 장소 구애를 덜 받을 작품이라 레퍼토리 공연으로 적응력이 좋으리라 봤다.
작품을 특유의 한국식 음악극으로 개작하는 과정에서 여흥이 는 반면 줄이고 쳐낸 부분이 많아 극 흐름이 물 흐르듯이 흐르지는 않는데, 좀 더 이야기에 손을 보면 좋을 듯하다. 주제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점도 생각할 여지이다. 추석에 걸맞은 공연이긴하나, 상업화된 대학로는 가족 단위로 찾아와 즐길만한 명소는 아니지 싶다. 부러 추석 시즌에 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100곳이 넘는 대학로 극장 사이에서 부대끼려면 습성을 이해해 주말에 짤막하게 거리공연을 해서라도 홍보를 하거나, 아니면 지원공모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만한 고민이야 당연히 했지 하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추석에 잘 어울리는 판소리 한마당이다. 젊은 배우들의 땀방울이 뚝뚝, 침이 툭 튀어나와 떨어지고, 오지게 걷고 뛰고 웅크리고 앉고 거기에 기운을 가득 담은 소리가 추석 보약을 한 채 지어먹은 듯-좀 과장하자면-하다. 두루 많은 관객들이 추임새도 넣고 웃고 즐기는 서로 기 충만한 공연이 되길 바란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
사진출처 - 중앙음악극단cafe.naver.com/musicdramacompany/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