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업데이트] 개성이 드러나듯 혹은 물 흐르듯
제목 : 2011정보소극장 기획프로그램2- 제2회 정보연극전 :
햄릿 업데이트 - 첫 번째(청우, 백수광부, 여행자)
기간 : 2011/08/20 ~ 2011/09/04
장소 : 대학로 정보소극장
원작 : 셰익스피어
연출 : 김광보 / 이성열 / 양정웅
출연 : 강승민, 민상오, 한상우, 정준호, 최현준, 신병헌, 정연준, 원향라, 문하나 / 임진순, 김현중, 윤서정 / 김기분, 강보라, 정수영, 이화정, 김주희, 강지안
주최 : 정보극장운영회
기획 : 코르코르디움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러다 결국 친해지기도 하는. 사람 사이만 그렇지는 않다. 정보소극장은 앞자리에서 보나 뒷자리에서 보나 내게 영 편치 않은 극장이다. 대학로 소극장 여건이 대개 비슷하지만 정보소극장도 단 차이가 낮다보니 앞 쪽에 앉으면 뒷사람들 눈치가 뵈고, 뒷자리에 앉으면 앞 사람들에 가려 무대 앞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목을 쭉 빼고 앉을 수 있는 맨 뒷자리나 통로 쪽 혹은 좌우 측면 자리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유독 정보소극장을 들어 얘기한 이유는 정보소극장 공연은 대부분 객석이 가득 차는 바람에 눈치껏 이리저리 좀 움직이면서 눈치를 보지 않을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끔 몇 분 지각에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얘기가 돌고 보면 갈 때마다 아무래도 좀 더 일찍 나서서나,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 감수를 한다.
특정 흥행작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닌 극장을 두고 하는 얘기라,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으나 이른 바 정보소극장운영위원회 면면을 보면 이해가 갈 대목이다. 요사이 <햄릿 업데이트>에 참여하는 극단 6곳(극단 청우, 극단 골목길, 극단 백수광부, 극단 여행자, 극단 작은신화, 극단 풍경)은 2009년부터 운영위를 꾸려 활동 중이다. (극단 청우는 1회 정보연극전 당시 운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중견 극단으로 이들은 한국 연극계의 중심을 이루고 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1회 정보연극전 출품작 극단 여행자의 <한 여름밤의 꿈>은 해외 공연은 물론 얼마 전 중극장인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을 했다. 얼추 이들 극단을 거치지 않은 배우나 제작진이 있을까 싶다. 좋은 배우들을 양성하고 좋은 극작가와 좋은 제작진이 함께 하니 관객들이 몰리는 데에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09 <정보연극전 - 多視> 이후 2년 만에 열린 2회 정보연극전은 편당 30분 내외로 하루 세 작품씩 두 번으로 나눠 각각 3주씩 정보소극장에 올린다. 나가수로 비유하자면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에 이어 공통 주제를 정한 이번 기획은 1회와 달리 워크숍에 가까운 기획이지만 한국 연극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를 더해갈수록 더욱 주목 받을 만한 프로그램이다. 이름만 있거나, 위세만 내세우는 기획과 달리 관객들의 관심을 끄는 선의 경쟁 구도는 우선 알찬 기획으로 보이고, 첫 번째와 달리 관객에게 익숙한 셰익스피어 ‘햄릿’을 공통 주제로 삼았다는 점도 좋은 선택이다. (한편으로 중극장 붐이 일면서 연출가마다 각자 바쁜 제작 일정도 짧은 소품을 올리는 방식을 택한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햄릿 업데이트 - 첫 번째>. 평일 공연인데 매표소 입구에 ‘매진’이 붙었다. 들어가니 6곳 극단이 햄릿을 놓고 벌이는 걸진 한 판을 눈여겨 본 건 공연관계자들만은 아니다. 꽉 찬 객석 사이를 용케 비집고 들어가 앉으니 중앙은 아니나 신경이 덜 쓰이는 자리이다. 햄릿을 어떻게 풀어냈을지 기대로 허리가 쭉 펴진다.
극단 청우의 <Let Them Talk>(김광보 연출/공동창작) 백수광부의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이성열 연출/김명화 작), 여행자의 <영매 프로젝트2-햄릿>(양정웅 작, 연출)이 한 무대 위 간단한 소품 몇 가지만 더하고 뺄 뿐 가운데 붉은색 올림 마루를 두고 이야기를 펼친다. 6팀이 바뀌지 않는 같은 무대를 사용하는 이상, 공통 무대를 두고 얼마나 잘 적용해서 활용하는지 이번 기획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익히 많은 작품 무대를 올린 노련한 무대미술가 손호성은 “멋지게 노래하고 춤차라고 붉은 색조 멍석”을 깔았다고 설명한다. 나무로 짠 얼개는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길게 뻗어 있다. 몇몇 자리를 포기해야 하지만 무대 확장 효과는 물론 객석과 하나의 묶음으로 동시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극단 청우는 몇 번의 암전을 통해 무대를 바쁘게 사용한다. 무덤지기가 일을 하다가 잠이 들고, 몽롱한 꿈을 꾸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틀에서 진행한다. 셰익스피어가 싸그리 죽여버린 햄릿 등장인물들은 덴마크 무덤을 배경으로 묻을 시체가 많다며 투덜거리는 무덤지기의 꿈인 듯 환각인 듯 몽롱한 시점에서 등장해 후일담을 나눈다. 죽고 난 뒤 복수, 치정, 탐욕, 권력욕, 수치, 갈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2라운드를 펼치듯이 서로 비난과 힐난을 일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모든 정황이나 속내가 밝혀진 이상 햄릿이라는 주인공도 피의자의 한 사람일 뿐이다. 햄릿을 가볍게 변주한 작품은 무덤지기 외에 햄릿, 거트루드, 오필리어, 삼촌 클로디우스, 폴로니우스와 그의 아들 레어티스,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까지 주요 인물 대부분이 등장해 원작 대립 구도를 보여주면서 <햄릿 업데이트> 기획 전체 개요를 설명하는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들이 보여주는 구차한 행태는 요사이 드라마와 비슷한 전개를 보여주는데, 셰익스피어의 시적 대사와 몇 가지 상황을 걷어내고 뼈대만 놓고 보니, 구분이 없다.
당시 연극이 영화, 드라마와 비슷한 대중매체였고, 셰익스피어가 요사이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들과 비슷한 위치였다. 그렇다고 해도 <Let Them Talk> 식의 해석은 삶이란 정도의 차이일 뿐 속내를 보면 지저분하고 구차한 치정극이라는 결론과 닿아 있으나, 역으로 보는 시각이나 해석에 따라 다른 감흥을 주는 원작 특유의 아우라를 드러내기도 한다. 청우 단원들이 공동창작한 작품은 짧은 시간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다 보니 전개가 산만하고, 주역들 외에 캐릭터가 구분이 잘 안되는 한계를 보인다.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여주는 몇 가지 코믹한 행동은 다소 불필요해 보인다.
백수광부의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는 의자 몇 개를 끌어와 무대를 분장실로 꾸몄다. 우선 극단 미추 오태석의 <분장실>이 떠오른다. 배우들 사이 밀고 당기는 관계를 보여주는 점도 얼추 비슷하나 <분장실>이 체홉의 ‘갈매기’ 여주인공 역할을 하지 못해 한이 서린 배우, 귀신들이 아웅다웅한다면 <햄릿...>에서 여주인공 격인 오필리어를 맡은 배우는 자신의 역할이 가진 수동적인 면에 발끈하는 식이다. 그녀의 한탄은 무대 뒤에서나 가능한 일, 결국 드레스를 챙겨 입고, 햄릿 역 배우는 멋쩍게 뒤에서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올려준다.
무대 위에서나 무대 뒤에서나 상반된 듯 비슷한 욕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제 3자 격인 분장사의 눈에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는 듯 하다. 분장을 하기 전과 후, 현실과 무대를 나누는 힘은 어쩌면 그의 환상적인 분장 솜씨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죽음이 멀지 않은 늙은 분장사는 스스로 분장을 하면서 무대 뒤/앞, 현실/환영의 경계를 지운다. 작품이 끝난 뒤 급하게 분장을 지우는 배우들이 야속하기도 하나 현실이 곧 그렇다. 햄릿은 무대와 객석, 조명이 밝게 비추는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동시에 무대 뒤 벽 뒤에 가려진 어둠 속에서도 또 한 편의 변주를 만든다.
6명 여배우들이 옷을 들고 나와 주섬주섬 여기저기 걸어놓고 굿판을 만들면서 시작하는극단 여행자의 <영매 프로젝트 2-햄릿>은 퍼포먼스 위주 대사 대신 몸으로 대신하는 작품이다. ‘지난해 페스티벌 봄에서 미국의 비주얼 아티스트 캐서린 설리번, 숀 그리핀 씨와 함께 작업했던 ‘ouija(심령술에 쓰이는 점판)! 영매’의 후속작업이다. ‘ouija! 영매’는 2009년 여행자가 무대화한 입센의 연극 ‘페르귄트’를 해체해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소개에서 힌트를 얻어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해라, 글쎄 감각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작품으로, 세 작품 중에서는 무대 미술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작품이다. 소극장이라 향내가 쉬이 객석까지 퍼지고, 극 막판에 배우들이 객석 여기저기 자리 잡는 모양새도 어색하지 않게 흐름을 잘 이어갈 수 있다. 햄릿 업데이트 기획 대본집에는 아예 대사가 없다. 대략 동선만 짠 뒤 즉흥적인 연기에 많이 의존하나 신음처럼 중얼거리거나 힘겹게 터져 나오는 몇몇 대사에서 햄릿을 짐작할 몇 가지 단서를 준다.
<Let Them Talk>가 저승에서 만난 햄릿 인물들의 후일담이라면 <영매 프로젝트 2-햄릿>은 (어쩌면) 동일한 내용을 이승으로 불러내 보여주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배우들의 몸을 두고 벌이는 춤 혹은 몸짓이나 몇 가지 격정적인 행동은 대사(이성)으로 받아들인 내용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마지막, 객석으로 찾아오는 장면은 영매를 통해 그들이 무대에서 벗어나 객석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려는 혹은 감시하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하는데, 다시 말해 햄릿의 비극이 현실에서 (관객의 몸을 빌어) 계속 벌어지는 인간 속성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세 작품은 각각 극단 특성을 드러내지만 살짝 같은 행동을 반복하거나, 같은 소품(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연계망을 가진다. 세 작품만 본 상태에서 전체 기획의 완성형을 봤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세 번째 작품 <영매 프로젝트 2-햄릿>은 앞선 두 작품에서 도움을 받거나 변주하는 부분이 보이면서 대사가 적은 대신 햄릿과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감흥을 드러낸다. 대사가 장점인 셰익스피어이나, 그의 작품이 현대인에게 피로도가 높은 바, 굿이 그렇듯이 깔끔하게 기름기를 걷어내고 맛 본 기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연극을 많이 올리는 극단들 이름이 걸린 기획이다 보니 무대, 시간 등 제약을 생각하지 않고 기대치가 컸다. 기대 만큼은 아니었으나 젊은 배우들의 열정을 본 한편, 협업으로 모든 과정 자체가 갖는 의미가 무척 중요하다고 본다. 무대, 조명 등 하드웨어를 파악한 뒤라 곧 이어 오를 두 번째 묶음 공연 세 작품에서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좀 더 냉정한 시선에서 기대가 된다. 첫 번째 무대를 보고 벼르는 관객들에게 그 만큼 더욱 치열하게 준비한 작품을 가져오리라 본다.*
사진출처 - 정소소극장운영위원회